197화 44. 대답 없는 여신 (2)
카렐리아의 왕관 도난 사건은 수많은 의혹을 남긴 채 미완 사건으로 수사 종결되었다.
혹자는 전설적인 도둑 슈레케 뮤지크가 그가 저질렀던 수많은 괴이한 절도 사건처럼 완벽하게 카렐리아의 왕관을 도르니에의 금고에서 빼냈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그들은 도르니에의 금고가 열렸을 때 참관했던 익명의 금고 경비병의 증언을 든다.
금고 안엔 녹슨 월계관만이 있었고, 카렐리아의 왕관이 있어야 하는 자리엔 바스러진 유리 조각만 있었다고.
혹자는 시중에 도는 카렐리아 왕관 도난 사건은 호사가들이 만들어 낸 날조된 사실로, 왕관이 도난된 적은 없고 익명의 경비병이 봤을 때 왕관이 없었던 건 그 왕관이 수리를 위해 황궁의 보석공에게 맡겨졌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진실이 어느 쪽이건 카렐리아의 왕관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테타우를 넘어 제국 전역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 도난 사건이 루페르트에게 좋지 않은 징조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왕관 하나를 잃었다는 이유로 회귀의 나팔을 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기상조이며 아직 때가 아니다.
‘회귀를 굳이 많이 할 필요는 없다. 작은 일 하나를 거스른다고 해서 그때마다 회귀를 한다면 진정으로 큰 줄기를 보지 못한 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으니.’
회귀라는 능력이 어떤 권능과도 비할 바 없는 능력이라는 건 누구보다 루페르트 본인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회귀는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수반한다.
같은 일을 두 번이나 겪어야 한다는 것은 같은 말을 듣고 같은 분위기 속에서 같은 흐름을 느껴야 한다는 것 같다.
사람들이 인형처럼 혹은 바보처럼 보인다.
오직 자신만이 살아 있다는 생각마저 느낄 때도 있다.
그러한 비현실 속에서 루페르트는 강한 피로를 느꼈고, 때로는 사람에 대한 회의 자체를 느끼기도 했다.
오직 단 한 명, 저 속을 알 수 없는 울피아나만이 시간의 반복이라는 격변에도 불구하고 항상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그것도 능력일 수도 있겠지.’
황제의 최근 관심사는 당연하게도 들끓고 있는 자신의 영지, 카렐리아다.
카렐리아의 의회에서 일어나는 격론은 토씨 하나까지 제국 첩자의 귀에서 서류로 기록되어 황제에게 보내졌다.
“선제가 남긴 짐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군.”
신하들이 있기에 루페르트는 말을 가려서 말했지만, 실제로 그가 이 사안에서 철혈대제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짜증을 넘어선 경멸이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왜 한 거지? 내가 아닌 그가 황제가 되었다면 또 어떤 식으로 문제를 처리하려 한 거지? 의회 사람들을 전부 죽이기라도 할 생각인가.’
철혈대제의 방식을 크게 요약하면 분열과 정복이다.
철혈대제는 언제나 상대하는 적을 이간질하여 여러 세력으로 갈라놓았고, 그 약해진 세력을 압도적인 자신의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걸 즐겼다.
정석이라면 정석적인 방법이겠지만, 사실 누가 이간질을 당하고 싶어 할까?
누가 형제와 자매와 친우를 갈라놓는 자를 좋아할 수 있을까?
분열을 획책하는 자는 언제나 깊은 원망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수많은 원한이 철혈대제의 치세라는 이른바 황금시대 아래 조용히 씨앗을 뿌리고 있었고, 이제 그 싹이 루페르트의 치세에 고개를 들었다.
‘선제의 방식은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번 사안이 중요하다는 건 황제 집무실에 드나드는 시종마저도 아는 사실이다.
카렐리아의 의회에서 일어나는 격동을 막지 못한다면 제국엔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그 원인이 뭔지는 루페르트도 잘 알고 있다.
클라인하르트다.
루페르트는 오랜만에 자신의 조언자이자, 그가 직접 멍에를 맨 대주교를 찾아갔다.
간만에 방문에 대주교는 체통도 잊고 싱글벙글 웃으며 루페르트를 입구까지 마중했다.
“폐하! 프리!”
“…….”
‘미친 늙은이 또 이러는군.’
“페하!”
클라인하르트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진정한 신의 세 번째 음절이 밝혀졌습니다.”
“뭔가요.”
“니! 니! 입니다.”
“프리니. 프니리. 둘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왜 프를 항상 앞에 두는 겁니까?”
“그게 뭔가 듣기 좋지 않습니까?”
“글쎄요.”
대주교와 원치 않는 이야기를 하면서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니라니. 프리니. 리프니에. 어째 그 신의 이름이라는 게 점점 우리 여신님의 이름을 닮아 가는데. 설마 그 호라의 진짜 이름이라는 게 우리 여신님의 이름은 아니겠지?’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네 번째 음절은 아마도 에가 아닐까?”
“……네?”
루페르트가 정색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실제로 그것이 사실이라면 호라의 진명은 리프니에.
그의 여신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그의 여신은 호라가 아니다.
그건 그녀가 직접 이야기한 사실이고 실제로 그의 여신은 호라를 죽은 신이라고 수시로 경멸했다.
그런 그녀가 호라일 수는 없다.
하지만 왜?
무엇이 그녀를 호라의 진명과 일치시키는가?
루페르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여신의 신물인 소라고둥을 매만지는 것뿐이다.
“아, 그건 연구 중입니다. 정확한 게 아니에요. 가능성만 있을 뿐이죠.”
“그, 그렇군요.”
“최근 저기 북쪽 끝. 리히트 보덴이던가. 폐하의 직할 영지 말입니다.”
“네.”
“거기의 총독이 우리 교단에 이상한 자문을 구해 왔더군요.”
“아서 픽튼이?”
아서 픽튼은 루페르트의 영혼 동맹이다.
여전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고 만날 방법도 없지만, 영혼 동맹으로서 그가 제공하는 괴력이라는 심심한 권능은 루페르트의 몸에 당연하다는 듯이 깃들어 있다.
“네. 사람을 닮은 원주민-스크라엘링이라는 괴물을 생포했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괴물이 글쎄요. 리프니에! 리프니에! 이런 소리를 내더랍니다.”
“…….”
“폐하? 갑자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대단히 창백하신데.”
“아, 아닙니다.”
루페르트가 속으로 생각했다.
문제가 있다.
현재 벌어지는 상황은.
당장 클라인하르트가 추진하는 호라의 진정한 이름이 리프니에를 닮았다는 것도 그렇고, 그가 직접 본 스크라엘링이라는 구제할 수 없는 괴물이 여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도 그가 가진,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을 부채질했다.
확실한 건 직접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아서 픽튼을 불러야겠군.’
그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지금 루페르트가 이 자리에 온 건 그것만이 아니다.
당면한 문제.
카렐리아의 반란과 관계된 일이다.
루페르트가 말했다.
“대주교께서 카렐리아, 슈코브 쪽에 추진한다는 계획을 들었습니다.”
“아, 성 스코다의 교회 건 말이지요?”
대주교가 활짝 웃었다.
루페르트가 말하기도 전에 대주교가 먼저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카렐리아의 반도가 해결할 수 없는 논리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루페르트는 그 대주교의 생각이라는 걸 들을 생각이 없지만 끊지는 않았다.
황제의 방관 속에서 대주교의 말이 이어졌다.
“선제가 남긴 금인칙서가 카렐리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인 건 맞겠지만, 제국의 지엄한 법률과 과거 크로지우스 동란 당시 종교 회의에서 정한 규칙에 의하면 왕은 왕의 토지에 직접 자신의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규정했습니다. 현재 성 스코다의 토지는 우리 교단이 소유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 성직 선제후의 영토라는 건 곧 황제의 영토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이름으로 스코다의 교회를 성당으로 개조하겠다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그 조항을 문제로 삼는다면, 그 알량한 신교의 제한적 자유 자체의 근거를 신교교도 스스로가 허물게 될 테니까요.”
클라인하르트가 활짝 웃었다.
“성 스코다의 교회를 성당으로 개조한다면, 그쪽의 오만한 귀족들의 권위는 크게 깎일 겁니다. 그 오만한 귀족의 기세에 눌려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했던 숨은 호라 교도에게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러한 작은 변화로부터 카렐리아를 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폐하의 굳건한 영토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지요.”
말은 그럴듯하다.
나름의 논리도 있고 그럴 개연성도 있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알고 있다.
이 늙은이가 그토록 집요하게 그 일을 추진하려는 건 오로지 자신의 공명심을 위한 것이라고.
그럴듯한 치적을 쌓아 자신의 노욕을 드높이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당장 교회를 개조하면 전쟁이 나게 생겼는데.
대주교 같은 영특한 자가 그 위험성을 보지 못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단지, 못 본 척하는 것이다.
전쟁 같은 건 황제에 떠넘기는 것이다.
“계획을 취소하면 안 되겠습니까?”
루페르트가 물었다.
대주교는 능글능글 웃었다.
그는 왜냐고 묻지 않는다.
그 왜라는 질문이 자신에게 곤란한 주제와 이어진다는 걸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대신 대주교는 다른 형태로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려 했다.
“신의 일입니다. 신의 일을 인간의 형편에 따라 고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교활하게도 사람의 일에 신을 끌어들인다.
루페르트는 역겨움을 느꼈다.
‘이 늙은이, 다 알고도 저런 짓거리를 하려는군. 자신의 행동이 내전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알고도 끝까지 추진하려 하고 있어.’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루페르트가 사실을 적시했다.
노회한 클라인하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전이요?”
루페르트의 역겨움이 더욱 강해졌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내전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아니, 누가 어떻게 내전을 일으킨다는 겁니까? 그것도 신의 일을 행했을 뿐인데. 그건 호라신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일입니다.”
“카렐리아 사람들은 용서할 것 같습니다만.”
“그 사람들에게 진정한 믿음의 길로 이끄려고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것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저의 소임입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늙은이를 말로 해서는 안 된다.
황제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그는 한 마리 벌레, 혐오스럽기 이를 데 없는 끔찍한 벌레를 자신의 손아귀 안에서 뽑아내는 상상을 했다.
곧 황제의 손안에 꿈틀거리는 붉은 벌레 한 마리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이 세상의 물질이라기보다는 상념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토록 격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루페르트의 촉각엔 어떠한 역겨움도 전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루페르트는 그 벌레를 손에 쥘 수 있다.
“대주교님.”
루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폐하.”
“그만두시지요.”
“하오나…… 아아아아아아아아악!!!!!!!!!!!”
클라인하르트의 눈알이 뒤집혔다.
잦아드는 비명을 내지르며 대주교는 자신의 입을 자신의 손으로 틀어막아 비명을 감추고 끝 간데없는 발작을 일으켰다.
위태로울 정도로 경련하는 대주교를 향해 루페르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 스코다의 교회에 손을 대지 않았으면 합니다.”
머리에 악마의 벌레가 심어진 대주교의 의식 속에 황제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그가 숭배하는 신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혼돈 속에서 대주교가 답했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루페르트가 벌레를 지워 버렸다.
동시에 대주교의 경련이 멈추고, 그의 정신이 돌아왔다.
‘무,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 지는 자신도 알 수 없다.
단지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고 우관이 삐뚤어졌다는 걸 통해 잠시 의식을 잃었던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성 스코다의 교회는 어떻게 할 겁니까?”
황제가 물었다.
대주교는 강한 저항감을 느꼈으나 너무나 당연한 어조로 정중하게 답했다.
“당연히 그대로 둬야겠지요.”
대주교의 대답에 황제는 빙그레 웃었다.
“좋습니다. 프리.”
황제의 돌발행동에 대주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프리니입니다. 프리니.”
하나의 문제가 해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