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44. 대답 없는 여신 (1)
“망인의 가는 길에 하늘색의 꽃길이 펼쳐지길. 호라의 품에서 영원히 안면하기를.”
장례식장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관에 실려 가족 영묘로 향하는 고인을 눈으로 배웅했다.
한 여자가 죽었다.
그 여자는 카렐리아의 귀족 가문의 여식으로 상당한 재산을 남긴 채 죽었다.
그 배우자는 그 여자보다 열 살 아래의 야심 찬 군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 사내는 황제와 연줄이 있어 황제의 소개로 현재의 배우자를 만났다고 한다.
부부의 금실이 좋았다는 건 주변의 평가, 심지어 주인 흉보기를 좋아하는 하녀와 고용인까지 이구동성으로 증명되는 바이다.
무심한 신의 무관심이 그녀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마가 그녀를 해치도록 내버려 두었고, 그녀는 병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상주 만슈타인은 무표정한, 그러나 눈동자에 진한 슬픔을 간직한 채 아내가 떠나는 길을 마지막까지 배웅했다.
만슈타인은 제국 대령 대우로 현재 카렐리아 경비대 기병 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
500명 남짓한 경험 많은 기수가 그의 아래서 카렐리아 의회가 주는 급료로 먹고살았는데 그들의 평소 임무는 카렐리아 주변, 특히 상업의 핏줄인 주요 도로를 순찰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한때 황제의 군대를 이끌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는 그에겐 보잘것없는 한직이다.
실제로 급료도 넉넉지 않았다.
간신히 품위 유지를 할 정도다.
그러나 연상의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의 재산이 모조리 만슈타인에게 넘어왔다.
카렐리아 후작의 외동딸인 그녀는 카렐리아 의회에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기사 영지 두 개와 의회 참석권은 딸리지 않았지만, 상당한 소출을 올리는 과수원과 광산, 다수의 채권 증서를 갖고 있었다.
그 액수는 무려 200만 탈러에 달한다.
빈털터리와 다를 바 없던 만슈타인은 순식간에 카렐리아 지역 사회에서 어깨에 힘 좀 주는 명사로 올라선 것이다.
하지만 카렐리아 상류 사회에서 그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만슈타인은 구교 신자다.
그것도 구교의 가장 강력한 수호자인 황제 루페르트를 바로 옆에서 보필한 자다.
기억이 좋은 사람들은 만슈타인이 결혼을 할 때 황제가 직간접적으로 중매를 섰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
만슈타인은 황제의 사람이고 따라서 구교도 측의 인물이다.
만슈타인의 신앙심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비록 그가 호라교의 경전보다 점성술이나 카드점 같은 엉터리 미신에 심취해 있다 해도 그가 구교 신자라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명백히 카렐리아의 주류에서 배척된 위치에 선 자이며 그러므로 적이다.
그것이 카렐리아의 상류사회가 만슈타인이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이다.
다만 그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의 개인적인 품성은 지역 사회에서 평가가 높았다.
그는 인내심이 강하고 예의 바르며 농담을 자제할 줄 아는 카렐리아인들은 잘 갖지 못한 덕목의 소유자이며 사심 없는 도움과 조력을 마치 봉사를 하듯 다방면에 뿌려 인근 사람은 물론 그를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에게 대단히 좋은 평가를 얻었다.
그러한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만슈타인은 감히 그가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하는 카렐리아 의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야볼라프 백작은 비라네츠 백작의 상대가 되지 못하지.”
소식을 전해 온 지역의 친우에게 만슈타인은 확신을 담은 눈동자로 곡식이 영글어가는 광활한 농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야볼라프 백작은 대대로 카렐리아 사람이며 수많은 귀족들의 진심 어린 지지를 받은 지역 사회의 지도자인데. 반면 비라네츠 백작은 사실상 제국인 아닌가? 심지어 그가 투표에서 행사할 수 있는 표는 하나에 불과해. 백작이라고 하나 제국 백작이잖아? 그가 의회에 참석한 자격은 기사에 불과하고. 기사는 고작 한 표를 행사할 뿐이지만, 영주들은 세 표를 행사할 수 있지. 그게 야볼라프와 비라네츠 간의 격차야.”
카렐리아 본토 사람답게 만슈타인의 친우 얀 프라코브는 목소리에 핏대를 세워 자신의 주장을 강변했다.
그의 상식에 의하면 대립하는 두 의회의 수장들은 한마디로 결투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둘의 격차는 심했다.
카렐리아 의회에서 부농과 시민들의 여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하지만 실제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건 땅을 가진 귀족들이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운 상인과 장인들로 이루어진 시민들이 조금이라도 더 큰 이득을 얻어 보겠다고 비라네츠를 내세워 일을 일으켜 보려 하지만 얀이 보기엔 비라네츠는 귀족의 지지를 조금도 얻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귀족의 폭넓은 지지를 얻은 전통 있는 카렐리아 귀족인 야볼라프의 상대가 도무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 만슈타인은 비라네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프라코브가 포도주를 내밀며 만슈타인에게 물었다.
“야볼라프는 잃을 게 많은 사람이지. 그는 현상 유지 그 자체만을 원해. 시민과 부농의 불만은 그에게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그가 아무리 높은 명성을 누리고 평판이 좋다고 해도, 불이 활활 타오르는 집안에서는 근엄하게 앉아 있는 사람보다 뭐라도 해 보려는 사람이 높은 평가를 얻는 법이야. 지금은 야볼라프가 의회를 휘어잡고 있다고 해도 자네도 알다시피 이 동네 귀족들의 의리라는 건 뭐, 푼돈 몇 푼에 오갈 정도로 줏대가 없는 법이지.”
“아무리 그래도 야볼라프가 비라네츠 같은 뜨내기에게 질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친우의 아리송하다는 태도에 만슈타인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낮이지만 하늘 저편엔 만월에서 반월로 기울어 가는 달이 창백하게 걸려 있었다.
“어떤 자리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듣는 자는 어처구니없는 의견을 말하는 자도, 모두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는 자도 아니야.”
“그러면?”
얀 프라코브가 포도주를 마저 기울이며 물었다.
만슈타인이 달의 미세한 움직임을 확신에 찬 눈동자로 유심히 관찰하며 말을 이었다.
“답변 자체를 미루려는 자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움직이려 들지 않는 자. 수구라는 단어에 왜 그리 많은 부정적인 인식이 깃들어 있을까?”
“그러고 보니…….”
야볼라프는 전형적인 사람 좋은 웃어른이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한쪽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펼쳐 명쾌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법이나 논리가 아닌 개인의 양보와 납득을 끌어내서 해결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쪽이 둘 다 상처를 최소화하는 멀리서 보면 최적의 해결책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원망이 오가는지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만이 알 것이다.
“야볼라프는 시간을 끌어서 사람의 생각이 바뀌기를 기다려 문제를 부드럽게 넘기는 방식에 익숙하지만 글쎄. 지금 사안이 그러한 미룸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
만슈타인이 달에서 시선을 떼며 친우를 눈에 담았다.
고민하던 얀 프라코브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마 안 되겠지. 두루뭉술한 방식으로 중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당장 저 클라인하르트가 성 스코다 교회를 그들의 성당으로 개조하겠지.”
“그런 상황에서 습관적으로 결정을 미루는 행위를 한다면 귀족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될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나?”
얀 프라코브는 전형적인 카렐리아의 소귀족이다.
대충 돌아가는 세계와 국내 정세는 알고 있지만 깊이 알지는 못하고 그보다 자신의 영지에서 일하는 소작농의 가정사와 갈등 상황, 말과 돼지, 소들의 건강 상태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이다.
만슈타인이 웃었다.
많은 사람을 매료시킨 유쾌하고도 쾌활한 웃음.
그다지 매력적인 용모가 아님에도 그의 주변에 늘 사람이 끊임없게 한 원동력이다.
한바탕 크게 웃은 후 만슈타인이 여운처럼 남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친우를 돌아보았다.
“전쟁이 일어나겠지.”
“전쟁.”
얀 프라코브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어떤 전쟁인가?”
“빨리 끝나면 이 카렐리아만 살짝 불태울 수도 있는 전쟁이야. 하지만 크게 번진다면 그 불길은 제국을 넘어 이 세상 전체를 불태워 버리겠지.”
“그런 엄청난 일이 우리 카렐리아에서 벌어진단 말인가?”
“당장 의회에선 레벤호스트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고 해. 그건 반역이지. 본인도 알고 있을 거야. 자신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사안인지. 난 왜 그가 그토록 어리석은 선택을 고수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가 왕관을 쓴다는 데 10만 탈러를 걸지.”
“난 걸지 않겠네.”
“카렐리아가 반역을 일으키면 황제의 힘은 절반으로 깎여 나가. 카렐리아의 막대한 재원이 레벤호스트에게 흘러가는 순간 제국의 무게중심은 슈발츠마인에서 트라이아로 옮겨 간다는 이야기지. 그 변화는 아마도 호시탐탐 지켜보던 외국인들에게 좋은 기회로 비치게 될 거야. 내 장담하지. 레벤호스트가 단 한 번이라도 커다란 승리를 거둔다면 제국을 적대하는 수많은 외국 사절이 선제후를 만나 뵙기 위해 줄을 설 것이라고.”
“그 정도인가?”
얀 프라코브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만슈타인은 살짝 생각을 가다듬었고 곧 이를 말로 옮겼다.
“제국은 너무나도 많은 업보를 쌓았어. 대제와 현제라 추앙받는 수많은 황제가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이 해결한 건 당장의 급급한 문제뿐이야. 본질은 늘 외면했고 후세에 위임했지. 당장 우리 카렐리아에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을 보라고. 선제, 무려 철혈대제라 불리던 자가 약조한 금인칙서 하나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진 게 아닌가?”
“……그건 그렇지.”
선제의 약속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그가 전쟁 비용을 걷기 위해 카렐리아 주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금인칙서를 써 주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문제가 불거질 소지는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 땅의 군주가 그 땅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건 카렐리아의 얼치기 농부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뭐, 그때 거둔 특별세로 철혈대제가 다른 곳에서 승리를 거둔 건 사실이긴 하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랫돌을 빼서 윗돌에 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해결방식이야. 이제 카렐리아라는 돌이 가장 끝단에 왔기에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는 때가 온 것이지.”
“듣고 보니 심각하군.”
“운 좋게도 여태까지의 업보가 제국을 덮칠 때마다 천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 제국을 지켰지만 글쎄…….”
만슈타인의 눈은 저 멀리 있는 아름다운 도시 슈코브를 향했다.
10만 명의 자유롭고 부유한 시민과 귀족들이 살아가는 곳.
제국의 옛 수도이자, 어쩌면 다음에 수도가 될 수 있는 세계의 심장.
그 보석 같은 도시에서 제국을, 어쩌면 세계를 불태울 수 있는 불길이 일어나리라.
“아마도 이번만큼은 어렵지 않을까?”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얀의 물음에 만슈타인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글쎄.”
그는 한 인물을 생각하고 있었다.
젊다기보다는 어린 나이지만, 속을 짐작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인물을 생각했다.
그의 이름은 루페르트고 나의 황제다.
“……나에게 이 문제를 결정할 힘이 생긴다면.”
얀의 눈길이 만슈타인을 향했다.
“아마 나 스스로 그 불길을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정말인가?”
얀이 실없이 웃었다.
아무리 만슈타인이 유능하고 비범한 인물이라고 해도 너무 멀리 갔다.
그가 말하는 거대한 전쟁은 지방의 일개 기병 대장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니니까.
황제와 선제후, 막강한 군주와 수만 명의 군세를 호령하는 장군들이 해결할 문제다.
그 거인들 옆에 나란히 서기에 만슈타인이라는 사람의 크기는 지나치게 작다.
그럼에도 만슈타인의 눈동자에 담긴 확신의 빛은 도무지 사라질 기색이 없다.
“별들이 내게 말하더라고.”
만슈타인이 웃으며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