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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95화 (195/225)

195화 43. 도둑 (6)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마디만 더 하면 내 검이 가만있지 않을 거요.”

베르크 란이 으르렁거렸다.

그가 예의를 갖춘 건 저 루돌프가 한때 황제와 동행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저 노인은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크 란의 분노에도 노인은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그는 이 상황이 재미가 있는지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리듯이 읊조렸다.

“주인에게 이빨을 들이대는 개라.”

베르크 란이 검을 휘둘렀다.

창고 안의 식자재 전부가 흔들릴 정도의 강격.

그러나 그 검은 노인에 닿지 않았다.

간발의 차로 노인은 베르크 란의 검을 피해 냈다.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미세한 경악이 떠올랐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다.

죽이려고 한 검격이다.

그걸 너무나도 간단하게 피해 버렸다.

같은 도펠죌트너도 아닌 늙어 빠진 노인네가 말이다.

“도펠죌트너의 힘의 기원이 뭔지는 알고 있을 테지?”

베르크 란이 마를로네에게 눈짓했다.

마를로네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조부의 뜻이 워낙 확고하다.

그녀 또한 노인의 측면을 잡으며 검을 휘두를 준비를 했다.

베르크 란이 다시 한번 매섭게 검으로 찔러 들어갔다.

노인은 어렵지 않게 검격을 피해 냈다.

마치 유령처럼 검이 닿는 순간 사라지면서 어느새 또 다른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전쟁의 신 미르미도스는 과거 미네아 지방에서 두루 숭배받았다. 그 신의 상징은 도끼고 신의 챔피언은 하나 같이 소의 두상에 깎아지른 듯한 근육질의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다 전하지.”

이번에는 두 개의 검이 동시에 노인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마를로네의 검이 노인의 옆구리를 노렸고 베르크 란은 노인을 일도양단할 기세로 검을 높이 들고 내리쳤다.

쿵!

창고가 들썩거리며 선반에 있던 식자재들이 앞다투어 떨어졌다.

그중 밀가루를 담은 통이 무너지며 창고 전체에 자욱한 연무를 만들어 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우윳빛 장막 속에서 루돌프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그 신은 숭배자들의 왕국이 몰락하면서 함께 죽었지만, 그 신을 모시던 자들이 전쟁신의 피 몇 방울을 갖고 있었다.”

마를로네가 총을 겨누었다.

베르크 란이 제지했다.

이 정도 분진 속에서 섣불리 총격을 가하다간 창고 전체가 날아갈지도 모르니까.

“내게 원하는 게 뭐요?”

검으로 그림자조차 쫓을 수 없는 노인을 향해 베르크 란이 입을 열었다.

“그 피를 희석해서 마신 자가 도펠죌트너라고 불리는 괴물이 되었다. 사실 전쟁 신의 피를 마신 건 그대들이 처음은 아니야. 300년 전엔 란츠크네히트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 그대들과 비슷한 권능을 가지고 전 세계에 폭력과 증오의 씨앗을 뿌렸었지.”

“…….”

베르크 란은 검을 내려놓았다.

그가 마를로네에게 눈짓했다.

조용히 창고를 빠져나가자고.

그런 다음 불을 질러서 저 노인을 산 채로 태워 버리자고.

뒷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도펠죌트너의 본능이 말한다.

저 노인은 반드시 죽여야 되는 적이라고.

“내가 왜 그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줄 아나?”

“떠들기 좋아하는 거 같은데 한번 지껄여 보시오. 들어는 드리리다.”

둘은 창고를 빠져나갔다.

마를로네가 어느새 벽에 걸린 등불을 가지고 와 앞으로 내밀었다.

불을 질러서 끝장을 낸다.

혹 불길을 피해 빠져나오면 그때를 노려 처단한다.

단순하지만 확실한 계획을 세우며 베르크 란이 마를로네에게 등불을 던져 넣으라고 손짓하려고 할 때였다.

“베르크 란.”

노인이 말했다.

다음 순간, 베르크 란은 자기도 알 수 없는 끔찍한 목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걸 느끼며 돌연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지?!”

마를로네가 다급히 조부를 부축해 보지만, 조부는 갑자기 그녀에게 검을 휘둘렀다.

죽일 생각으로 휘두른 게 아니라 간신히 피해 냈지만,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나갈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충격 속에서 마를로네가 베르크 란을 부릅뜬 눈으로 보았다.

“마, 마리……!!”

베르크 란이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온몸을 벌벌 떨었다.

“할아버지?”

불길한 흔들림 속에서 창고 안에서 안개처럼 흐릿한 노인이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노인의 등장에 베르크 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꿇은 채 일그러진 얼굴로 뭔가를 필사적으로 참으려는 것이 그가 취한 유일한 행동이었다.

노인이 피식 웃었다.

다음 순간 노인의 얼굴이 또 다른 노인의 얼굴로 변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베르크 란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 속에서 하나의 이름을 뇌리에 떠올렸다.

‘서, 선제?!’

틀림없다.

저 냉혹하고 인정머리 없고 사람의 목숨을 벌레처럼 여기던 저 노인은 틀림없는 철혈대제라는 이명을 가진 클라우데 2세다.

베르크 란에게 모든 걸 주고 모든 걸 빼앗아 간.

“폐, 폐하께서 어떻게?!”

“베르크 란. 아직도 나를 폐하로 불러주는군.”

클라우데 2세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대는 전장에 있어야 할 몸이야. 그것이 그대가 전쟁 신의 피를 몸에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내정된 운명이야. 그런데 한심하게도 인쇄소 같은 하찮은 곳에서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다니. 한때 그대에게 큰 기대를 품었던 사람으로서 실망을 금할 수가 없군. 그 부르봉놈의 야망이 고작 이 정도였으면 전쟁 신에게 사랑받는 그대의 육체에도 불구하고 중용하지 않았을 거야.”

“…….”

베르크 란은 움직일 수 없다.

머릿속에 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것이 들어있고 그것이 그의 몸을 옥죄는 느낌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기괴한 감각.

마치 머릿속에서 벌레가 꿈틀거리는 느낌.

“……난 말이지. 강한 자를 좋아하지.”

무릎 꿇은 베르크 란을 향해 클라우데 2세가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오직 강한 자만이 거울 속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거든.”

“할아버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마를로네가 그에게 검을 들이댔다.

클라우데 2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를로네가 검을 찔러 오자, 그는 망토 안에서 뭔가를 내밀어 가볍게 휘둘렀다.

챙캉!

검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검이 아니다.

지나칠 정도로 짧고 뭉툭하고 심지어 손 보호대조차 없다.

역사에 정통한 이가 이 검을 본다면 그것은 룸 제국 병사들의 검이라고 말할 것이다.

방패와 방패를 나란히 들고 방진을 형성하다 야만족이 오면 방패로 만족을 후려치고 그들의 복부나 목에 꽂아 넣던 정복자의 검이라고 말할 것이다.

“넌 약하다.”

클라우데 2세는 베르크 란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마를로네에게 말했다.

“거기다 계집은 싸울 필요가 없다. 굳이 자기가 싸울 필요 없이 자신 대신 전장에 나서서 피를 흘려 줄 전사를 낳으면 그만이니.”

“…….”

마를로네의 눈동자에 감출 수 없는 경악이 떠올랐다.

‘느, 늙은이가 힘이 왜 이렇게 강해?! 우리 할아범도 늙은이긴 하지만!’

“싸움은 그만하지.”

클라우데 2세가 검을 휘둘러 마를로네의 검을 쳐 냈다.

검에 실린 힘이 얼마나 강한지 마를로네는 몇 발자국이나 뒷걸음질 쳐야 했다.

클라우데 2세는 검을 감추며 하늘 쪽을 올려다보았다.

“도둑이 나타났군.”

“도둑.”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가 서로를 보았다.

그렇다.

그들은 도둑을 잡기 위해 황궁에 왔다.

하지만 저 사내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다른 인간도 아니고 죽은 황제가 돌아왔는데.

둘의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클라우데 2세의 얼굴은 흐릿한 안개처럼 변하더니 모두가 아는 루돌프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베르크 란이 말했다.

“다, 당신은 대체 뭐요?!”

그의 눈썹이 호랑이처럼 치켜 올라갔다.

진정으로 베르크 란은 분노하고 있었다.

“당신이 누군지 말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사생결단을 내겠다.”

“베르크 란.”

루돌프가 인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대를 받아 줄 마지막 군대이니라.”

“군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졌을 때 나를 찾아와라. 그대가 가졌어야 할 모든 걸 주겠다.”

“…….”

루돌프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를로네와 베르크 란이 그를 찾았지만 루돌프의 기척은 마술처럼 사라졌다.

당황과 충격 속에서 마를로네와 베르크 란은 서로를 보았다.

“할아버지…….”

같은 일을 당했고 같은 말을 들었건만, 둘의 표정은 미묘하게 달랐다.

마를로네는 오로지 조부의 안위만을 걱정했지만, 베르크 란은 다르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꽤 오랫동안 루돌프가 사라진 어둠을 더듬었다.

마치 미련이 남는다는 것처럼.

“할아버지?”

“아니다. 마리.”

베르크 란이 검을 집고 돌아섰다.

둘의 귀에 기괴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소문대로 엇박자에 제멋대로인 곡조가 허공에서 아니 어쩌면 땅끝에서 또 어쩌면 사람의 마음속에서 불가해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날 황제는 카렐리아의 왕관을 상실했다.

하지만 그가 잃은 건 금과 보석으로 이룬 알량한 왕관만은 아닐 것이다.

“…….”

베르크 란.

전쟁의 숙명을 타고난 자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한때 정을 붙여 보려고 노력했던 인쇄소의 풍경이 이제는 손녀의 눈보다 더 조악하게 보인다.

베르크 란이 자신의 손을 보았다.

피 대신 잉크로 검게 물든 손.

그 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때 마음을 가라앉혀 주던 윤전기의 소음은 그저 시끄럽고 귀에 거슬리게 들릴 뿐이다.

그가 갈구하는 총칼과 총포의 소리. 아우성. 고함. 비명과 단말마.

전장의 소리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가혹한 운명이 노병을 부른다.

* * *

사실상 왕이 공석인 카렐리아는 하나의 지방이 아니다.

제국이 수많은 독립 군주와 도시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합체인 것처럼 카렐리아 또한 옛 반유목민의 부족의 느슨한 연합체였다.

카렐리아의 강역은 크게 클레스나비우, 카메니체, 루드니츠 3개의 옛 군주국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가장 부유하고 권세가 높았던 땅인 카메니체가 자연스레 카렐리아의 중심이 되었고 그 수도인 슈코브는 제국의 수도로 세계에 이름을 널리 떨치기도 했다.

제국보다 작은 나라라고 해서 민족이 적은 것도 아니다.

이제는 기원조차 모호한 수많은 반유목민과 정주민, 심지어 가계의 시조가 룸 제국의 장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수많은 민족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같은 카렐리아조차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의 다양한 언어와 이단에 가까운 수많은 믿음이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카렐리아를 묶어 줄 구심점은 카렐리아의 왕이었으나 이제 그 왕관은 제국의 황제가 쓰고 있고, 차선책으로 카렐리아 사람들은 카렐리아 의회를 그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최고의 의결기구로 삼았다.

카렐리아 의회는 카렐리아에 땅뙈기 하나라도 가진 귀족만이 구성원이 될 자격이 있는데 현재 의회는 크게 두 개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다.

한 명은 제국에 유화적이고 온건적인 태도를 갖춘 카렐리아 백작 헤르베르트 야볼라프다.

부농의 지지를 받는 그는 카렐리아에서 유수 깊은 명문가 출신으로 의회에 더 많은 지지자를 가지고 있고 사회적 평판 또한 높았다.

그에 반대되는 자는 시민의 지지를 받는 디트리히 비라네츠 백작이다.

백작이라고 하나 그 백작의 작위는 제국의 것이다.

그가 카렐리아 의회 구성원으로 참석한 작위는 카렐리아 기사에 불과했다.

실제로 그는 인생 대부분을 제국에서 보냈고 제국 군인으로 복무했다.

연대장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연대를 지휘하기도 한 그는 그다지 독실한 신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신교의 자유를 의회에서 부르짖었다.

“클라인하르트 대주교가 우리 성 스코다의 교회를 그들의 성당으로 바꾸려 하고 있소. 그러는 동안 우리의 새 황제는 선제의 약속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소. 우리는 언제까지 참아야 하오? 언제까지 황제의 답을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그것도 제 왕관 하나 간수 못 하는 황제의 말을!”

의회의 분위기가 들끓기 시작한다.

제국은 물론 대륙 전체를 불태우려는 불길이 의회에서 제국으로 옮겨붙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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