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43. 도둑 (5)
도펠죌트너는 살인자에게서 죽음의 얼룩을 보는 능력이 있다.
왜 그런 능력이 있는지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도펠죌트너가 탄생하던 시기 도펠죌트너 양성에 관여한 이는 현재 아무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오랫동안 전장에서 활약하며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만들어 낸 도펠죌트너들은 나름의 추측을 해 보았다.
전장에서 말하는 강한 적은 힘이 세거나 덩치가 크고 기량이 뛰어난 자가 아닌 사람을 많이 죽여 본 자이며 그러므로 도펠죌트너의 피가 그러한 인간들을 발견해 더 잘 싸울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이 아니냐고.
진실이 어찌 됐든 그 얼룩을 보는 능력엔 우열의 차이가 명백한데 가장 얼룩을 잘 보는 사람은 그 얼룩에서 악취까지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는 그런 부류다.
아무에게나 악취를 맡을 순 없다.
한두 명, 많게는 네다섯 명 죽였다고 해서 얼룩은 악취를 풍기지 않는다.
악취를 풍기는 자는 저 거인병 낙센, 가까이는 베르크 란처럼 백 명이 넘는 인간의 목숨을 직접 취한 자다.
그런 인간이라고 해도 평상시엔 집중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지금처럼 잔뜩 날이 선 상태로 경계를 해야만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애당초 그 능력은 보는 능력이지, 맡는 능력은 또 아니니까.
“저쪽이야.”
전투력은 떨어질지언정 감각만큼은 누구보다 예민한 마를로네가 앞장섰다.
3층이 넘는 높이지만 그녀는 사뿐히 나뭇가지를 잡고 바닥에 뛰어내린 후 황궁으로 급히 들어갔다.
보다 거친 움직임으로 베르크 란이 착지한 후 손녀의 뒤를 따르면서 검을 검집에 놓고 대신 스틱을 들었다.
아무리 황제의 명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대낮.
황궁 안에 드나드는 귀족과 군주 앞에서 검을 빼 들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니까.
종종걸음으로 황궁 복도를 걷던 마를로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지나가는 시녀를 잡았다.
“저기.”
“아, 네!”
시녀가 깜짝 놀라 마를로네를 본다.
시녀는 어렵지 않게 마를로네를 알아보았다.
당연한 일이다.
어떤 장소에서 남들과 다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구설수에 오르는지 생각해 보면 말이다.
‘이 여자가 그 여자 도펠죌트너?’
멀리서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대면하는 건 처음이다.
의외로 나이가 어리다.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이리라.
“저기, 혹시 수상한 사람이 지나가는 거 못 봤나요?”
“수상한 사람요.”
“음, 방금 이 복도를 지나간 사람 중에 낯선 사람이 있었나요?”
“글쎄요. 특별히 신경을 쓰진 않아서요.”
“그렇군요. 좋은 하루 되세요.”
애당초 별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마를로네는 시녀를 지나쳐 황궁의 복도 끝을 향해 빠르게 걸어 나갔다.
시녀는 떠나가는 마를로네를 멍하니 지켜보다 이내 그녀의 뒤를 따르는 건장한 사내를 보고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이 사람도 도펠죌트너였지.’
그는 보다 유명하다.
황제의 챔피언이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는 팔다리가 부러지면서까지 황제를 위한 대리결투에서 싸웠고, 결국 은 가면을 쓴 괴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문은 말한다.
저 사내는 전장에서 셀 수 없는 사람을 죽였고 피와 광기에 물든 도펠죌트너들을 이끌었던 수령이라고.
도펠죌트너가 포로로 잡힌 적병의 사지를 각각 하나씩 잡고 찢어서 죽이는 놀이를 했다는 괴소문은 그들이 전장을 떠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일반 제국 백성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당연히 이미지가 좋을 수가 없다.
그들이 가장 활약하던 시기조차 이능의 힘을 지닌 집단이 으레 그러하듯 도펠죌트너 또한 그들을 변호해 줄 우군을 확보하려는 생각 따윈 조금도 하지 않았으니까.
도펠죌트너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은 이렇듯 군주와 귀족은 물론 일반 백성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괜히 오토 브라에와 베르너가 도펠죌트너의 복권을 막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지금에야 어느 정도 권력의 기반을 다지긴 했지만, 아무것도 없던 시절의 루페르트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심기를 긁는 선택을 계속한다면 결국 그 업보는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테니까 말이다.
시녀의 걱정과 별개로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는 도둑을 잡는다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 사람이야.”
마를로네가 문제의 인간을 찾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저 화려한 망토를 두른, 사치스러운 예복을 입은 사내에게선 어떤 얼룩도 보이지 않는다.
단 한 명도 죽인 적이 없는 무고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일까.
이토록 진한 악취가 나는 건.
베르크 란이 의문을 품고 마를로네를 보자 마를로네는 결심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얼굴 정도는 봐야겠어.”
그 의문의 사내는 황궁 근위대를 위한 식당의 창고로 향하고 있었다.
한 번에 수백 명의 병사가 식사를 하는 장소답게 꽤 넓은 규모와 크기를 가진 장소다.
그 사내는 그 어두운 창고로 들어갔고, 마를로네와 베르크 란이 그 사내의 뒤를 따랐다.
창고 안.
소시지와 치즈, 밀가루와 후추 같은 갖가지 식자재가 쌓인 곳엔 쥐새끼 몇 마리가 식량을 훔쳐먹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아무도 없는데.”
마를로네가 눈동자를 매섭게 굴렸다.
반면 베르크 란은 헤아릴 길 없는 어둠 속을 차갑게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로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곧 어둠 속에서 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마를로네도 베르크 란도 적잖이 놀랐다.
아는 얼굴이다.
“당신은?”
마를로네가 속으로 경악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젊은 남자였는데? 아니, 그런 느낌이었어.’
건장한 체격에 당당한 걸음으로 걷던 사내는 많아 봐야 사십 아래 즈음의 나이였다.
그러나 지금 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나이 지긋한 노년기의 사내였다.
“오랜만이군.”
안드리아의 루돌프가 다시금 도펠죌트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안드리아의 루돌프의 행방은 묘연하다.
한때 황제와 행동을 함께하던 그 사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황제의 조언자 역할을 했고 당연하다는 듯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으니.
신비.
그를 수식할 유일할 단어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갑자기 이 미지의 사내가 왜 다시금 베르크 란 조손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걸까.
“……도둑을 찾는다고 하던데.”
루돌프가 말했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둘 다 대답하지 않았다.
한때 그는 황제의 조언자였지만 지금은 정체불명의 외부인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그의 행적을 보면 명백히 이 창고에 두 도펠죌트너를 끌어들인 것이 분명하기도 하고.
그 조손의 날 선 모습을 보며 루돌프는 털털하게 웃었다.
“잠깐 안 본 사이에 그와 소원해진 모양이군.”
“용건이 뭐요?”
베르크 란이 불쑥 물었다.
“왜 이런 곳에 우리를 불러낸 거요?”
그의 목소리는 무례할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전장에서 구른 감이 말해 준다.
지금 상황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고.
목숨을 걸어야 할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찾아오는 끝 모를 불안감이 마음속을 어지럽히고 있다.
“내가 그대들 앞에 나타난 건.”
루돌프가 은은히 웃으며 마를로네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 녹색 안광이 번들거렸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둘 다 검을 뽑았다.
“무슨 짓인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녹색 안광을 눈에 붙인 채 이번에 루돌프는 베르크 란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주름 진 입가에 과할 정도의 미소가 걸렸다.
“……우리의 여신은 참으로 잔혹하구나.”
베르크 란이 검을 휘둘렀다.
죽이고자 하는 게 아닌 힘으로 윽박질러 저 괴이한 행동을 멈추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검은.
챙캉!
노인의 검에 막혔다.
베르크 란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
‘뭐냐?!’
말도 안 되는 힘이다.
권능을 가진 도펠죌트너의 검격을 두 손도 아닌 한 손으로 받아 내다니.
아무리 위장 공격이라고 할지라도 제법 힘을 실은 일격이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루돌프는 받아 냈다.
베르크 란이 즉시 검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나 자세를 취했다.
마를로네도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대로 검을 든 채 측면으로 돌아 옆구리를 위협했다.
양면에 도펠죌트너라는 강적을 두고서도 루돌프의 얼굴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가 천정에서부터 걸린 소시지 하나를 손으로 떼어 내 입으로 삼키며 질겅질겅 삼켰다.
“음~. 이건 슈타트론의 삼색 물고기 부어스트군. 세 가지 맛이 하나에 담겨 있어.”
한껏 너스레를 떤 후 루돌프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베르크 란 조손을 굽어보았다.
그가 물었다.
“……현재 생활에 만족하나?”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담긴 저의를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으니까.
“……그 젊은 황제가 잔머리를 썼더군. 하지만 말이야. 전장에서 검을 쥐던 자의 말로가 인쇄소에서 롤러나 굴리고 식판이나 만지는 그런 삶이라면 차라리 방랑하며 구걸을 하는 쪽이 좀 더 자유롭지 않겠나?”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루돌프 님. 당신이 누구든 간에 이 이상의 발언은 황제 폐하에 대한 반역으로 생각하겠소.”
“반역이라.”
루돌프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대들을 위해 말한 거야. 마를로네라고 했나?”
루돌프가 마를로네 쪽을 보았다.
“아름다운 아가씨군.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고, 게다가 처녀의 손에 검이라니. 아무리 도펠죌트너라고 해도 그렇지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겠지? 사실, 그대가 원해서 도펠죌트너가 된 것도 아니잖나?”
“저기, 할 말이 있으면 할아버지한테 하세요. 저는 당신하고 할 이야기가 없네요.”
“미래가 보이지 않나? 그대의 미래가?”
“…….”
“평범하고 무의미한 삶이겠지. 황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들의 허드렛일을 하던 그대에게 가난한 촌구석 생활이 어울리긴 할까?”
베르크 란이 기침을 했다.
“적당히 하시오.”
“당신도 마찬가지요.”
루돌프가 웃음을 머금은 채 베르크 란을 보았다.
그 지혜로운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베르크 란.”
“…….”
“나는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지.”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는 거지?”
“잔인하고 욕심 많고 항상 위로 오르려던 마음이 있었지. 왜, 고향에 있을 때 지주에게 업신여김을 유독 심하게 당했다고 하지 않나.”
베르크 란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루돌프가 그런 베르크 란을 힐끗 보더니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그 지주의 이름이 테나르디에였던가.”
베르크 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떻게 그걸?!’
본인조차 잊고 있던 이름이다.
그와 그의 가족에게 유독 심하게 굴어 결국 병사의 길을 걷게 만든 그 악독한 부부의 이름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까맣게 잊었고, 이제는 추상적인 사악한 지주의 이미지만이 남았다.
자신도 잊고 있던 그 이름을 어떻게 저 사내가 알 수 있을까.
‘대체 이자는 누구지?’
치열한 의문 속에서 루돌프가 말했다.
“희생은 보답받지 못한다네. 그대의 일생이 증명하듯.”
“…….”
“보상은 오직 힘에 의해서만 쟁취할 수 있지. 베르크 란. 내 묻겠네. 그대가 가장 많은 부를 거머쥐었을 때는 로텐부르그 함락 당시에 약탈 현장 아니었나? 그때 단단히 한몫 챙겨 연대장의 눈에 띄었고, 황제에게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나.”
처음에는 그저 낯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전혀 다르다.
베르크 란은 이제는 공포를 가진 채 루돌프를 바라본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자신도 잊어버린 과거를 포함한.
“그대는 이걸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