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42. 업보 (4)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나?”
한스 징펠만이 노여움을 억누르며 물었다.
노파는 그저 히죽 웃을 뿐이다.
“당신이 질문했고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내가 너를 이단 심문관에게 끌고 갈 수도 있다. 너와 같은 일을 하던 사람들처럼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다 죽거나 원치 않는 자백을 하고 화형대에 오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당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스 징펠만의 날 선 얼굴에도 노파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만에 하나 한스 징펠만이 자신에게 위해를 끼칠 거라고 생각지 못하는 모습.
‘이 노파는 대체 뭘 믿는 거지?’
“나는 황제의 사냥꾼이다.”
한스 징펠만이 황제의 사냥꾼인 징표인 이름 없는 짐승의 뿔로 만든 뿔피리를 보였다.
뿔피리엔 룸어 이전의, 룬문자라고만 알려진 해독할 수 없는 태고의 문자가 테두리처럼 뿔피리의 둘레를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오직 황제 폐하에게만 충성하지.”
“아, 역시 귀인이셨군요. 그 오만한 마법사가 함부로 설치지 않는 이유가 있었군요.”
“그대는 자신이 신의 회초리를 만들어 냈다고 말했다. 사실인가?”
한스 징펠만이 노파를 노려보며 담담히 물었다.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라. 너를 체포하겠다.”
내키진 않는다.
이 노파를 체포한다는 게.
하지만 이 노파는 그냥은 넘어갈 수 없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헛소리라고 해도 극형으로 다스려질 중죄다.
문으로 향하던 한스 징펠만이 뒤를 돌아보았다.
“왜 움직이지 않는가? 무력을 쓰기를 원하는 건가?”
“저를 데리고 가셔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노파가 은은히 웃으며 말했다.
“저를 데리고 가도, 저의 다른 자매가 역병을 퍼뜨릴 거니까요.”
“……조직인가?”
한스 징펠만이 몸을 돌렸다.
“글쎄요. 조직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노파가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리자 가려져 있던 꼽추 부분이 유난히 흉하게 한스 징펠만의 눈에 들어왔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그녀를 여기서 죽일 수도 있다.
상대는 일개 천한 노파일 뿐이고 이쪽은 황제의 사냥꾼이니.
눈앞에서 반역에 준하는 죄를 죽인 자는 먼저 죽이고 그 뒤에 죄를 추궁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한스 징펠만은 무력을 쓰는 걸 꺼렸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살인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임무를 위해서라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한스 징펠만이다.
그것도 아내와 자식을 죽인 신의 회초리를 직접 만든 자라면 자신의 손으로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저항감이 한스 징펠만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흐릿한 여인과 사슴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잠시 후 노파가 다시 등을 돌렸다.
그 추악한 노파의 얼굴에 어째서인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품 있는 여성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기묘한 환영이 서린 채 노파가 말했다.
“죽은 신들이 복수를 원합니다.”
“뭐라고……?”
“만신전엔 수많은 신들이 있지요. 그거 아세요? 제국이 하나로 뭉치기 전에 이 땅엔 땅의 이름만큼이나 많은 신들이 있었다는 걸.”
“…….”
“그 많은 신은 왜 사라졌을까요?”
“호라라는 진정한 믿음 속에서 가려진 거지. 태양이 뜨면 별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호라가 기적을 일으켜서 룸인과 고어인의 제국을 세웠나요?”
“글쎄.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신의 조력이 있었기에 제국이라 칭하는 두 개의 강력한 나라를 세울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이 세운 거지요.”
노파가 말했다.
한스 징펠만은 다르타니아 신자지만, 겉으로는 호라교의 신자다.
반 정도는 호라 교도라고 해도 무방하다.
매주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게 그의 일상이니.
가끔은 신부의 목소리에 동의하며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해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언어에 깃든 저 신성 모독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런 말을 자신 앞에서 당당하게 꺼낼 수 있는 무례함이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역으로 묻지요.”
노파가 여전히 환영을 머금은 채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한스 징펠만은 자기도 알 수 없는 자제력을 느끼며 별말 없이 노파의 말을 경청했다.
“그 죽은 신들은 왜 신자가 있었을까요? 아무런 보상도 없는데 인간이 신을 섬기겠습니까? 당장 사냥꾼님만 해도 다르타니아의 신자가 아니십니까?”
“부정할 생각은 없다.”
“네. 당신은 사냥꾼이니까요. 다르타니아의 축복 중 하나가 적중이라는 걸 노르드마르크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그러한 기복성이 신앙의 근간입니다. 실제로 작은 신들은 그런 권능을 신자에게 베풀었고요. 하지만 그 수많은 신들이, 우리가 믿는 다르타니아를 포함한 신들이 호라교의 만신전 구석으로 내쫓겼습니다.”
“…….”
“사람들은 신도가 없는 신을 죽은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 죽은 신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한스 징펠만이 가까스로 노파의 말을 가로막았다.
“말했잖습니까? 죽은 신들의 복수를 원한다고요.”
“……그게 네가 만든 신의 회초리라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어찌 저 같은 하찮은 늙은이가 그런 악몽의 질병을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만들었지?”
“그건 저도 모른답니다. 애초에 그 배합은 제가 알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또 그것은 이미 잊어버렸거든요.”
“헛소리.”
“당신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애당초 이 동굴에 온 것부터가 모종의 신비한 인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저 드넓은 노르드마르크의 원시림 속에서 어떻게 한 번 만에 역병을 만든 범인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의 사명은 역병의 범인을 찾는 것만은 아니다.
흐릿한 모호함 속에서 한스 징펠만은 심호흡을 하고 그가 이곳에 온 진정한 이유를 상기했다.
물론 알지 못하는 미지의 인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 노르드마르크에, 이 동굴에 온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다.
황제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던 그 젊고 수려하고 위엄 넘치는 황제의 얼굴이.
‘나의 황제는 루페르트 님이시다.’
저 들장미로 얼룩진 안젤리나의 저택에서 맹세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루페르트를 지키고 그를 싸우다 죽겠노라고.
‘그렇다. 나는 그분을 위해 살아간다.’
마음을 다잡은 한스 징펠만이 노파를 보았다.
그 눈동자엔 이전의 혼탁함과 흔들림 대신 사냥꾼 특유의 흔들리지 않는, 고정된 살의 같은 것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대에게 해를 끼치진 않겠다.”
물론 그 살의가 향하는 방향은 노파가 아니다.
“역병을 물리치는 법을 알려 줄 수 있나. 무슨 방법이든 달게 듣겠다.”
진심은 통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마음이 있어서인가.
노파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동시에 환영처럼 서렸던 여성의 얼굴 또한 노파의 곁을 떠났다.
소리 없는 기적 속에서 노파가 말했다.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마녀가 조건을 말했다.
그 조건은 하나 같이 들어주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것은.
“다르타니아 신앙의 부활입니다. 노르드마르크는 신교 교회가 지배하고 있지만 다르타니아 신앙에 관해서는 신교 목사도 구교 신부도 다를 바가 없지요.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숲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숲신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할 자유를 줬으면 합니다.”
“그건 어려울 거 같은데.”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역병은 죽은 신의 저주라고요. 사냥꾼님이 목숨을 건진 이유를 생각해 보세요.”
“…….”
그녀의 제안은 불가능하다.
가능하지가 않다.
입을 다문 한스 징펠만을 향해 노파가 꾸깃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약의 제조법입니다.”
한스 징펠만이 놀란 얼굴로 노파를 보았다.
노파는 웃고 있었다.
“재료도 흔하고 제조도 간편해서 마을에 약초사가 있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전처럼 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죽이고 박해한다면, 그때는 무슨 일이 생길지 저로서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신의 회초리보다 더한 역병이 제국 전체를 덮을지도 모를 일이겠지요.”
종이를 보았다.
과연 약의 제조법이 적혀 있다.
하지만 약학에 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는 한스 징펠만은 그 제조법에 자기가 아는 치료 효과가 있는 들풀 몇 개가 들어가는 것 정도만 알아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조건을 성취할 수 없는데도 제조법을 주는 건가!?”
한스 징펠만이 물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거 같아서요.”
노파가 자기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께서 속삭였나 봅니다.”
문틈에서 느닷없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린 여자아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소리는 아이답지 않게 안온하고 성숙한 음색을 머금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한스 징펠만은 눈앞에 사슴으로 이루어진 그물이 지나가는 환각을 보며 등을 돌렸다.
“……고맙네.”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역병에 걸리고도 살아남은 것,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이유, 심지어 너무나도 쉬운 범인의 발견과 그 범인이 약의 제조법을 주는 것까지.
모든 것이 모호하다.
마치 질서의 편린조차 찾을 수 없는 이 야생의 숲처럼.
떠나가는 사냥꾼을 향해 노파가 입을 열었다.
“이 제국은 죽은 신들의 시체 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호라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악마가 그 뒤에 있지요.”
“…….”
“그 악마는 너무나도 강해 모든 신을 죽이고 그 신을 믿는 인간들마저도 죽일 수 있지만, 그 꿍꿍이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살육과 파괴에 지쳤기에 해 보지 않은 일을 시도하려 들지도 모르지요.”
“그 악마가 누구지?”
“글쎄요.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곧 드러나지 않을까요?”
“어떻게?”
“호라가 새로운 이름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한스 징펠만이 뒤를 돌아보았다.
호라에게 이전에 쓰던 또 다른 이름이 있다는 건 황궁에서도 극소수에게만 전해지는 극비 중의 극비다.
프와 리.
두 글자만 밝혀진.
그걸 이 노파가 당연히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한스 징펠만의 경악 어린 시선을 보며 노파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신비로운 안개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건 제가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숲신께서 제게 들려준 것이지요.”
“……숲신이라.”
“곧 제국에 황혼이 올 겁니다. 시체 위에 세워진 나라가 시체가 일어나면서 피할 수 없는 업보의 길을 걷겠지요.”
업보.
그 말을 듣고도 한스 징펠만은 노파를 무시하고 방을 떠났다.
건넛방엔 아까 본 여자아이가 쌍둥이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쌍둥이들을 흥겹게 나이의 노래에 장단을 맞춰 주다 그들의 스승이 오자 황급히 표정을 바꾸고 절룩거리는 다리를 안쓰럽게 움직이며 정자세를 취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거라.”
한스 징펠만이 서둘러 동굴을 떠났다.
동굴을 나가면서 한스 징펠만은 어린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한스 징펠만은 눈을 의심했다.
그를 보고 있는 건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셀 수 없이 사냥한, 사슴의 얼굴이었다.
도망치듯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한스 징펠만을 지겔슈타트가 다가가 부축했다.
“……엽사님. 괜찮으세요?”
지겔슈타트의 걱정에 한스 징펠만은 씨익 웃으며 마법사에게 제조법을 내밀었다.
“이것은?”
“아무래도 우리가 잘 찾아온 것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냥꾼은 빠르게 이 동굴을 벗어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숲보다 더 깊은 이 동굴 안에서 사냥꾼은 그의 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으니까.
최고의 보상을 얻었지만, 한 마디가 사냥꾼의 뇌리에 운명처럼 떠올랐다.
“업보…….”
모두가 떠난 숲엔 정적이 찾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숲속의 짐승들은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삶을 이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