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75화 (175/225)

175화 40. 지옥의 4개월 (4)

도시의 수비대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절반이라고 하나 싸울 수 있는 건 3천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크고 작은 부상을 입거나 질병과 영양실조에 걸려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이미 거리 곳곳엔 시체가 즐비하게 쌓였다.

매장할 곳도 찾지 못한 시체들이 교회 땅에 아무렇게 흙만 덮인 채 묻혔다.

파리가 진동했고 구더기가 등천했다.

하드리아멘디쿠스는 성벽에 대한 공격을 지시했다.

냉정한 살인자처럼 포격이 성벽을 깎아내기 시작했고 박격포는 성벽 위의 병사들을 노렸다.

성벽의 함락이 멀지 않았다.

헨드릭 빌렘은 예상보다 성벽의 방어가 빠르게 무너지는 걸 보고 특단의 대책을 내었다.

“집을 허물고 시체들을 꺼내라.”

그는 도시의 중앙청사 주위에 시체들을 쌓게 했다.

벽이다.

달리 자재가 없기에 시체로 벽을 만들고 거기에 최후의 방어선을 만든 것이다.

“적들도 접근을 꺼릴 겁니다.”

헨드릭 빌렘이 기겁하는 루페르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역병은 신교와 구교,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으니까요.”

1년간의 공성은 사람들의 육신보다 정신은 더욱 피폐하게 했다.

1년 전만 해도 시체를 보고 기겁하던 병사들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악취가 나는 시체를 꺼내 그걸 포개 벽으로 쌓고 방벽을 만들었다.

누구도 불평을 터뜨리거나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한 달이라는 날짜다.

그 날을 버티면 이 모든 의무에서 해방이 된다.

도시의 함락과 낙성은 중요한 게 아니다.

“이제 한 달인가요?”

마를로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타났다.

“한 달이군. 그 정도면 우리의 황제도 만족하시지 않을까?”

병사들에 비해 좋은 대접과 식사를 하기도 했지만 베르크 란 조손은 인간 자체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시체를 보고도, 좋지 않은 식사를 먹고도,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1년을 시달려도 여유를 잃지 않는 걸 보면.

“폐하에게 그 황궁에 있다는 룸제국식 목욕탕을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해 보고 싶네요.”

“뭔 헛소리냐. 황제가 미쳤다고 그런 호사를 제공할까?”

“부탁할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데.”

공성의 피로가 아주 영향을 안 미친 건 아닌 모양이다.

“슈발츠마인 때문에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 여기서 한 개고생도 그렇고.”

루페르트가 분한 류크 앞에서도 뻔뻔하게 불만을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루페르트는 오히려 그들의 꿋꿋함에 감사함을 느꼈다.

‘정녕으로 강한 사람들이구나. 이 사람들은.’

한번 여신의 권능을 실험해 보고 싶다.

이들의 운명이 자신과 어떤 식으로 엮였는지.

그러나 여신이 말했다.

이들의 운명을 보는 건 좋지 않은 일이라고.

여신에 대한 악감정이 있지만 루페르트는 여신이 시키지 않는 일은 여간하면 하지 않으려고 했다.

반감이 있다고는 하나 그는 여전히 여신의 사도.

그녀가 없이는 제국의 멸망이라는 운명을 구해 낼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아니까.

차라리 티그리트의 실체를 안게 나은지도 모른다.

그 인간조차, 제국을 구해 낼 수 없었다는 이야기니.

그 루페르트와 베르크 란 조손 앞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오의 해마저 가릴 정도로 큰 키를 가진 낙센이다.

그는 자신의 키만큼이나 긴 할버드를 들고 있었다.

그 거대한 할버드를 보고 마를로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왜 그러냐. 마를로네.”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그녀가 가까스로 표정을 유지하며 낙센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감정 없는, 마치 뱀과 같은 푸른 뱀이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곧 전투가 시작될 거요. 나오시오.”

“무슨 전투?”

“최후의 전투.”

“최후의 전투라면?”

“성벽이 넘어갔소. 이제 왕국군이 몰려들 거요.”

마지막 한 달.

1년이 되기까지 3주를 남겨 놓고 성벽이 넘어갔다.

보통 성벽이 넘어갔다는 건 성의 함락을 뜻한다.

하드리아멘디쿠스가 사절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항복을 한다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는 협박 섞인 통지였다.

시장은 거절했다.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울 것이다.”

시체로 만든 방벽에 몇 남지 않은 병사가 섰다.

병사만이 아니다.

시민들도 힘을 보탰다.

“갑시다.”

낙센이 종용했다.

베르크 란이 일어났다.

그런데 마를로네는 일어서지 않았다.

“마리?”

마를로네가 주저하고 있다.

겁이라고는 별로 없는 그녀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루페르트조차 몇 번 보지 못한 장면이다.

“아, 나. 이번에는 뭐랄까.”

“마리. 우리는 도펠죌트너다. 우리의 황제의 병사다.”

“그건 아는데, 아. 그냥 기분이 안 좋아. 가면 안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어.”

“다가오는 전투를 피하는 건 우리의 영혼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다. 마리.”

낙센이 자리를 떠났다.

베르크 란이 마를로네를 종용했다.

그러나 마를로네는 좀처럼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마를로네의 눈앞에 몇 번이고 꿈에서 본 악몽이 떠올랐다.

‘저 무기. 저 길쭉한 무기가 날 토막 낼 거 같다고…….’

새파랗게 질린 그녀를 보며 루페르트가 옆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마를로네.”

“류크 님!”

마를로네가 반색했다.

“저, 이런 부탁은 잘 하지 않는데요. 이번 한 번만은 전투에서 빼 주시면 안 될까요?”

“마리!”

베르크 란이 언성을 높였다.

루페르트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채 베르크 란에게 한 차례 시선을 주고는 다시 마를로네에게 시선을 옮겼다.

“왜 전투에서 빠지겠다는 거지?”

“모르겠어요. 죽을 거 같아요.”

“죽는 건 병사의 숙명 같은 거 아니야?”

“아니오. 그런 고귀한 죽음이 아니에요.”

“그럼?”

“개죽음을 당할 거 같아요.”

마를로네가 루페르트의 귀에 대고 입을 가져다 댔다.

은은한 악취가 났지만 부드러운 온기는 루페르트의 귓가를 기분 좋게 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실지 모르겠지만, 저 거인병이 저를 죽이는 미래를 봤어요.”

“미래를?”

“네.”

미래라는 말에 루페르트의 심장이 꿈틀 움직였다.

“저기 베르크 란 님.”

“네.”

“이번만큼은 마를로네 씨의 의견에 따르도록 합시다.”

“아니, 전투를 피하는 건…….”

“황제 폐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건 이 전투의 전말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전장에 있다고 하나, 우리가 굳이 신교도를 위해 죽어 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이들 또한 제국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데.”

“…….”

“황제의 병사라면 황제의 적을 파악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전장으로 가겠소.”

“그렇게 하세요.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꼭.”

루페르트가 걱정을 담아 조부를 보는 마를로네의 시선을 느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살아 돌아오셔야 합니다.”

마를로네의 눈이 반짝 뜨였다.

“……류크 님.”

순간 마를로네는 느꼈다.

이 늘 흐릿해 보이는 남자, 류크에게 자기도 모르는 감정이 싹트는걸.

‘언제나 친절하고 세련되신 분이지. 신분도 제법 높고 재산도 있는 눈치고. 결혼은 안 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나에게도 기회가?!’

루페르트와 마를로네의 시선을 받으며 베르크 란은 홀로 전장으로 떠났다.

묵직한 포성이 도시 전체를 장송곡처럼 감싸고 있었다.

떠나가는 그를 보며 루페르트가 마를로네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왜 그런 미래를 봤다고 생각하지?”

호기심이 생겼다.

그럴 수밖에 없다.

루페르트 또한 시간의 수레바퀴에 오른 자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그의 속성이다.

마를로네는 류크라는 남성에게 신비로운 감정을 느끼며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어디 가서 말씀하지 마세요. 일이 어떻게 됐냐면요…….”

마를로네는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의 엄습을 느끼면서 자신이 본 악몽을 이야기했다.

그 악몽은 셀 수 없는 배신과 비열한 급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악몽의 주인공은 언제나 기이할 정도로 키가 큰 거인병이었다.

* * *

낙센의 본명은 아무도 모른다.

그의 고향도 출신도 나이도 모두가 불명.

가족이 없는 건 확실하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과거에 이미 다 죽었다고 말했다.

그에겐 친구가 없지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아주 가끔 있었다.

이를테면 헨드릭 빌렘 같은.

그러나 헨드릭 빌렘조차 낙센의 진정한 속내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전쟁도 끝인가.”

낙센은 알고 있다.

곧 이 도시가 끝난다는 걸.

시장은 결사 항전을 표명했지만 한 번의 공방 후 시장은 갖은 너스레와 체면을 챙기며 도시의 열쇠를 하드리아멘디쿠스에게 바칠 것이다.

위정자의 체면과 거짓말은 이미 수천 번이나 본 것이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건 전혀 다른 것이다.

‘그 도펠죌트너. 베르크 란.’

처음에 죽이려고 했던 그 사내다.

황제의 챔피언이자 그가 얼굴을 기억한 바 있는 그 초로의 사내는 그가 전쟁의 신의 눈길에 들기 위한 최적의 제물이니까.

그를 죽이고 그의 피를 마신다면 그는 도펠죌트너-전쟁의 신의 권능조차 손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끝이 죽음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죽음조차 낙센에겐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미 살대로 산 그에게 생사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니까.

하지만 베르크 란은 생각보다 강했다.

나이가 가져다 준 노쇠함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30년 전에 그를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낙센은 자신이 이 사내를 상대한다면 1분도 버티지 못하리라 보았다.

그렇다면 차선책이다.

베르크 란을 죽일 수 없으면 그 손녀를 죽이면 된다.

비슷한 냄새가 났다.

비슷한 죽은 신의 냄새가 났다.

베르크 란을 죽일 수 없다면 그 손녀라도 죽여서 원하는 운명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이제 전쟁도 막바지다.

이미 준비는 끝낸 상태다.

일곱 남작이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특히 매잡이 프리츠가 그를 뒤에서 장기인 장거리 저격으로 엄호하기로 했다.

마를로네를 죽이고 어쩌면 베르크 란을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어 가는 손녀를 인질로 삼는 방식을 통해.

결과는 정해져 있다.

그 손녀 마를로네는 약하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약간의 잔 기술은 있지만 평생을 전장에서 산 낙센 앞에서는 30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제 시간이 온다.

베르크 란이 손녀를 이 시체의 벽 앞에 데리고 올 것이다.

교회 첨탑 위에 반짝거리는 게 보인다.

매잡이 프리츠의 투구다.

낙센은 긴 팔을 휘둘러 사인을 보낸 후 그와 수백 년을 함께 한 긴 할버드를 손에 쥔 채 다가올 제물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음? 뭐냐.”

베르크 란이 혼자 왔다.

늘 손녀와 함께 오던 그 사내가 이 중요한 피의 제물을 바치는 제전에 가장 중요한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낙센은 치밀하고 잔혹하고 영리한 사내인지라 모든 발언에 주의를 기울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평정을 잃은 거인병의 입에서 다소 거친 언성이 터져 나왔다.

“손녀는 어디에 있소?”

“내 손녀는 왜 찾는가?”

아무리 베르크 란이 의무와 관습과 명예에 속박된 인물이라고 하지만 평상시와 다른 기이한 발언을 의식 못 할 정도로 무지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마를로네의 불안을 떠올렸다.

‘빙해에 가면서도 두려움 한번 안 내비친 아이다. 렌타이어마르크의 괴물과 설인을 보고도 견딘 아이다. 그 말 많은 제국 성인은 물론이고. 그런 아이가 이런 인간을 두려워한다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 설마……!?’

의심이 돋아났다.

그 완고한 마음에.

완고한 마음에 돋아난 의심은 그 싹이 씨앗을 틔우는 것이 어려운 만큼 잘 꺾이지도 않는다.

“내 손녀는 왜 찾냐고 물었다.”

낙센의 흥분한 얼굴과 흐트러진 숨결을 느끼며 황제의 챔피언은 에메랄드 같은 짙은 청록색의 눈으로 자신보다 배는 큰 병사를 올려보았다.

“대답하시오.”

그 시선을, 거인병은 회피했다.

대신 그 탐욕스러운 푸른 눈은 다른 곳을 찾는다.

‘어딘가에 있겠지. 어딘가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