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40. 지옥의 4개월 (5)
카스무어의 병사들이 성문 넘어 시가지로 진군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장창병이 거리 전체를 메우며 전진하는 그 모습은 마치 숲 자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죽어 가는 거리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무자비한 포격으로 무너지고 쓰러진 집의 폐허엔 앙상하게 마른 민간인 가족들이 서로 부둥켜안은 채 전진하는 점령군을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기율이 잡힌 카스무어군은 민간인에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선두에 선 정찰대가 광장에 있는 적의 잔존 병력의 존재를 보고해 왔다.
200년의 전통을 가진 “까사트리아” 연대의 연대장은 하드리아멘디투스 이전부터 수많은 공성전에서 참여한 역전의 용사다.
그는 적이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는 걸 알아차리고 전진을 멈추고 지원병을 기다렸다.
총병들이 열과 오를 이루어 창병들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자리를 잡고 두 눈에서 광휘를 발하는 마법사가 두 명의 검사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이 도시에 마법사는 없소.”
연대장의 설명을 들은 마법사는 그 자리에서 제단을 만들고 허리춤에 찬 수은병을 기울여 즉석에서 마법진을 그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주문을 시전했다.
마법진에서 불결한 빛이 번득이더니 자수정을 박은 마법사의 고목 지팡이에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그 불경한 빛은 건물 너머에서도 보일 정도로 치솟았기에 시체의 벽 뒤에 서 있던 저지대 병사의 눈에도 확실하게 포착됐다.
“마법사네요.”
시체의 벽 너머 우뚝 선 그레나스 시청 옥상, 마를로네가 폐허 너머로 치솟는 빛의 기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전투에 앞서 마법의 기운을 일으키는 거 같아요. 아마 강력한 마법을 쓰겠지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앞에서는 병사들이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지만, 시청 청사 안에서는 시장과 군 지휘관이 항복 절차를 의논하고 있다.
한 달을 더 버티기로 맹세했지만, 사실상 여기까지 오면 돌이킬 수 없다.
시장의 생각은 한 번의 항전으로 체면을 세운 후 직접 하드리아멘디쿠스에게 시의 열쇠를 바치는 것이다.
얀한데도 여기에 동의했다.
이미 그는 충분한 경력을 쌓았다.
저 하드리아멘디쿠스의 8만 명의 군세 앞에서 무려 11개월 동안 도시를 지켜 냈으니.
사실상 도시의 수비가 헨드릭 빌렘의 구상과 실행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그는 용병에 불과할 뿐이고 명목상 지휘관은 자신이다.
지휘관을 고용하는 게 왕과 군주, 그에 준하는 세력의 장인 걸 감안해 볼 때 이번 전투의 전공의 팔 할은 자신의 것이고 나머지 이 할은 헨드릭 빌렘에게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헨드릭 빌렘 본인으로서는 대단히 기분 나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일개 용병 대장의 운명이다.
불만이 있다면 그가 직접 저지대 연방의 정치인에게 자신을 어필해 정식 지휘관 자리를 받으면 그만이다.
“적이 마법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병사 하나가 급히 들어와 비보를 알렸다.
얀한데의 시선은 구석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책으로 얼굴을 덮고 졸고 있는 사내를 향했다.
“빌렘 공.”
얀한데가 헨드릭 빌렘을 불렀다.
“마법사가 나타났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헨드릭 빌렘이 머리에서 책을 치우며 피곤한 얼굴을 드러냈다.
“어쩌긴 어쩝니까? 적이 때리면 맞아야죠. 병사 몇 명을 내줄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그게 최선입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적도 다 이긴 전투에서 병사를 잃는 우를 범하진 않을 겁니다. 적당히 죽어 주다 적당한 기회에 백기를 들고 협상을 해 봅시다.”
헨드릭 빌렘은 다시 얼굴에 책을 덮고 다리를 책상에 올린 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 방약무인한 모습에 얀한데는 자존심이 깎이는 걸 느꼈지만 기껏해야 며칠 뒤면 안 볼 사이다.
애써 못 본 척을 하고 시장에게 돌아갔다.
“으음. 그냥 항복할까요?”
시장이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말했다.
“그냥 말입니까?”
“할 만큼 했잖습니까?”
“하지만 넉 달 전 우리가 한 맹세에 의하면…….”
“이 상황에서 석 달이면 충분히 의무를 이행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얀한데는 속으로 생각했다.
바로 앞에 적이 들어오고 이제 곧 공격이 시작될 거 같으니 생각이 바뀐 것이다.
누구나 그렇다.
전쟁 전에야 전장에서 죽는 것이 명예니 뭐니 떠들어 대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고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고 서늘한 창날이 눈앞에 어른거리면 누구나 집의 따뜻한 침대와 마누라의 품이 그리운 법이다.
“그럼, 지금 사람을 한번 보내 볼까요?”
“지금요?”
“마법사가 공격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우리 쪽은요?”
“우리 마법사는 변변치 않지요.”
“하긴.”
시장이 말끝을 흐리며 먼 곳을 바라보다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얀한데에게 말했다.
“항복합시다.”
멀리 책을 얼굴에 덮은 채 자는 척을 하던 헨드릭 빌렘이 살짝 책을 들추며 시장과 얀한데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 도시도 이제 끝인가. 슬슬 여기도 뜰 필요가 있겠어.”
헨드릭 빌렘은 손짓을 해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음산한 사내를 불러 귀에 대고 속삭였다.
“프리츠에게 전해. 소동을 일으키라고.”
* * *
마법사의 등장이 확인된 후 광장의 분위기는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시체의 벽 뒤에서 총기와 대포로 결사 항전을 준비하는 병사들은 불안한 눈으로 하늘과 땅과 거리 저편을 보았다.
언제 어떤 식으로 사악한 마법이 터져 나올지 모른다.
한두 명 죽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청의 옥상에서 루페르트는 그 병사들의 두려움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백전연마의 병사들도 마법사의 등장엔 긴장하는군.’
제국은 가장 강력한 마법사를 보유한 나라다.
어쩌면 그 마법사 집단이 제국의 우위를 보장했는지도 모른다.
저 결코 꺾이지 않던 불굴의 저지대 병사들마저 겁에 질리는 걸 보면 말이다.
“류크 님.”
여기 겁에 질리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마를로네다.
“류크 님은 전쟁이 끝나면 뭘 하실 건가요?”
마를로네가 웃음기를 띤 얼굴로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모습에 내심 놀라며 루페르트가 답했다.
“글쎄. 가서 황제에 이 일을 보고 하고 고향으로 가야지.”
“고향요? 아, 그러고 보니 류크 님의 고향을 아직 듣지 못한 거 같네요.”
“하켄하임.”
엉겁결에 답했다.
달리 다른 지명이 생각나지도 않았고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켄하임. 아, 황제 폐하의 고향이네요? 혹시 동향에서 아시는 사이셨어요? 우리 황제님. 자기 말로는 축구와 플루트의 마스터라고 하던데.”
장난칠 기운도 없고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이토록 급박한 상황에 태평하게 말하는 마를로네를 보자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는 걸 느끼며 맥없이 웃었다.
‘하여간, 이 녀석. 보통 인간은 아닌 건 확실해. 도펠죌트너고 아니고를 떠나서.’
“아, 황제 폐하 말인가?”
루페르트가 실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나보다는 좀 못했지 아마?”
“아, 정말요?”
“아마 황제 폐하는 이 사실에 대해 결코 이야기하지 않겠지.”
“역시 류크 님. 제가 볼 땐 류크 님이 황제님보다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그래?”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생각했다.
사실, 현재의 얼굴은 루페르트조차 알 수 없다.
안개 가면이란 건 겉모습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닌, 이를 보는 인간의 마음에 착오와 혼란을 일으켜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여신의 무한한 권능을 상징하는 증거니까.
“내가 어떻게 보이지?”
궁금증을 느끼며 루페르트가 물었다.
마를로네가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흐릿해요.”
“그, 그래?”
“네. 볼 때마다 다른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괜찮아 보이세요. 우리 황제 폐하. 미남이라면 미남이시지만, 뭐랄까. 저도 알지 못하는 저항감이 느껴지거든요. 솔직히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분도 아니고요.”
“내연의 여인도 가능하지 않나?”
루페르트가 장난기를 담아 물었다.
마를로네가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죽어도 첩 같은 건 안 할 거예요. 설령 그것이 황제의 첩이라고 해도요.”
“그, 그래?”
“……입에 담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제 모친이 남의 집 첩으로 들어갔어요. 애도 낳고 잘 먹고 잘산다고 하더라고요.”
마를로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진한 피로가 느껴지는 건 여전히 마음속에서 모친을 잊지 못해서가 아닐까.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를로네에 대해 생각했다.
‘이 녀석의 기구한 팔자도 따지고 보면, 티그리트의 작품이겠지.’
루페르트가 마를로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네?”
“저기 류크 님.”
마를로네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루페르트는 적잖이 당황하며 흐리멍덩하게 대답했다.
“으, 응. 무슨 일이지?”
“혹시, 마음에 드는 여인은 있으세요? 약혼자라든가.”
“아니, 그런 건 없는데.”
“저는 어떠세요?”
“뭐?!”
“뜬금없는 건 아는데, 이것도 인연이 아닐까요? 저 류크 님을 장기간 옆에서 지켜봤는데 예의 바르고 훌륭하시고 아무튼 대단하신 분 같아요. 제 신분이 조금 비천하긴 하지만, 모아 놓은 재산이 조금 있답니다? 할아버지도 곧 장군이 될 것 같고요. 영지라고 하긴 뭐하지만, 부르봉에 작지만 예쁜 집과 땅도 있어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청산유수처럼 말하는 마를로네를 보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런 끔찍한 전쟁 한가운데에서 청혼을?’
“당장 답을 주시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해 본 소리예요. 하지만 제 모든 말은 진심이랍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뻔뻔하게 프로포즈를 하던 마를로네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루페르트 또한 그녀와 자신을 덮어 가는 그림자를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그 그림자를 드리운 건 거인병이었다.
“운이 나쁘군.”
루페르트를 노려보며 낙센이 무언가를 휘둘렀다.
그것은 그의 키만 한 할버드였다.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육중한 칼날이 루페르트와 마를로네 둘을 동시에 토막 칠 기세로 날아왔다.
마를로네가 두 눈에서 섬뜩한 빛을 발하며 검을 꺼내 날아오는 할버드를 받아쳤다.
챙캉!
검과 할버드가 부딪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검이 순식간에 밀렸다.
마를로네는 속절없이 밀려 나가는 가운데서도 검의 각도가 자신을 향해 기우는 걸 필사적으로 막으면서 루페르트에게 몸을 날렸다.
퍽!
낙센의 무시무시한 힘을 그대로 몸에 실은 마를로네는 루페르트와 함께 저만치 뒤로 나뒹굴었다.
떼굴떼굴 구르면서도 순식간에 자세를 회복하며 마를로네는 첨탑 위에서 수상하게 반짝거리는 빛을 감지했다.
불길한 살의가 예감처럼 어른거린다.
그녀가 급히 자세를 낮추는 순간, 총성이 울리며 그녀의 머리카락 몇 올을 끊어 내며 하늘을 관통했다.
‘우리 측 영역에서?!’
순간 마를로네는 몇 번이고 보았던 섬뜩한 악몽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 앞에 서 있는 거인병을 낮게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맞아. 틀림없어!’
환각도 꿈도 아니다.
저 거인병 낙센.
그는 자신을 죽였다.
그것도 한 번 아닌 여러 차례를.
왜 그것을 아는지 마를로네 본인도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일어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