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40. 지옥의 4개월 (3)
한 달, 그리고 또 한 달이 흘렀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진행되는 공성은 루페르트로 하여금 운명의 속성을 느끼게 했다.
어떻게 해도, 어떻게 용을 써도 파국은 피할 수 없다.
참호는 이제 외곽의 능보를 겨누고 있다.
콰콰콰쾅!!
대포가 불을 때마다 보루를 지키던 병사들이 비로 쓴 것처럼 쓸려 나갔다.
병사들은 능보를 포기해야 했다.
해자의 물이 말라 버린 것은 도시 전체로 볼 땐 악재였지만 적어도 능보에서 후퇴하려는 병사들에겐 호재였다.
일곱 남작이 세운 보루가 모든 정면의 적을 견제하며 굳건히 버텼지만, 그것도 두 달을 버티지 못했다.
사방팔방에서 쏘아 대는 포격 앞에서 보루의 벽에 금이 갔다.
헨드릭 빌렘은 보루에서 병사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레나스의 시민 중 힘깨나 쓴다는 참사회의 회원이 아직 더 싸울 수 있다는 의견을 냈지만 헨드릭 빌렘은 이를 가볍게 일축했다.
“적당히 무너지게 한 성채 위에서 적을 싸우게 하다 성채를 무너뜨려 적병도 함께 성채의 파편 아래 묻어 버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흔히 쓰이는 전술이오. 정 싸움을 원하신다면, 잘난 민병대를 거느리고 싸워 보시든가.”
그레나스엔 시장이 있고 수비 사령관이 있지만, 도시의 지배자가 헨드릭 빌렘이라는 걸 부정하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다.
그는 법 위에 군림했다.
어쩔 수가 없다.
그가 있기에 요새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력이 뛰어난 그는 정보가 주는 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루페르트에게 예고했던 지옥의 4개월이 시작되려는 달에 그는 시장을 비롯한 도시의 주요 인사를 불러 모아 놓고 현재 상태를 솔직히 이야기했다.
“외부의 소식을 알 방법은 없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이 도시의 운명은 이제 4개월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빨리 함락될 수 있었지만, 여러분들의 공으로 여기까지 버텼습니다. 그런데 좀 더 버텨야 할 거 같군요. 그런데 그것도 4개월입니다. 4개월이 지나면 항복을 해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여러분 쪽에서 먼저 간청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4개월을 버텨야 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안 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호라가 우리에게 내려준 시련입니다.”
아직까지 도시는 버틸 만했다.
불안한 요소를 감지한 사람은 얀한데 정도지만 그는 이미 헨드릭 빌렘에게 영혼까지 저당 잡힌 상태로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았다.
시장이 헨드릭 빌렘의 의견에 동의했고 도시 참사회와 교회 목사, 기타 연방 관료들이 4개월이라는 시간을 더 버티기로 하는 결의서를 작성했다.
“호라의 이름으로, 우리의 맹세는 지옥의 불길 속에서도 엄수하겠나이다.”
신교 신부의 집전으로 거룩한 맹세의 의식을 올릴 때 작은 소란이 일었다.
한 목사가 집전을 담당하는 목사의 의식 절차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은 것이다.
“성스러운 전병을 찢지 않고 포도주에 적시는 건 고대의 관습과 교회법에 다소 어긋나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성스러운 전병은 호라신이 이 세상에 내린 권능 그 자체, 그것을 여러 개로 나누어 이 세상의 생명을 의미하는 포도주에 찍는 건 그 은혜가 골고루 내리는 걸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그걸 분리하지 않고 하나에 적시는 건…….”
그 언쟁을 지켜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구교의 신부들도 깐깐하지만, 신교의 목사들도 쓸데없는 일로 소모적 논쟁을 벌이는 건 크게 다르지 않군.’
일견 신교가 하나의 종파로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신교도 구교만큼이나 많은 집단으로 갈려 있다.
호라 교단이라는 하나의 매개체가 없는 신교 특성상 그 파편화된 집단의 수는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당장 트라이아의 레벤호스트만 해도 급진적이고 과격한 신교 종파를 믿고 있는 반면, 디터팔츠의 막스 게오르크는 온건한 신교 종파를 믿는다.
기이하게도 그 두 종파는 구교라 불리는 호라 교단보다 더 사이가 안 좋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들이 하나로 보이는 건 구교에 비해 명백히 열세이기 때문이다.
오랜 전통이라는 막강한 유산을 가진 구교에 대항하려면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달라도 뭉칠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의 사정이다.
그런데 이 작은 해프닝은 루페르트에게 번득이는 영감을 줬다.
“잠깐.”
루페르트는 어느새 까끌까끌하게 수염이 자란 턱 끝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신교 간의 분열을 획책할 순 없는 걸까.’
쉽진 않을 것이다.
쳘혈대제도 비슷한 정책을 쓰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신교도의 위기감이 워낙 강해 여간한 외부의 자극으로는 깨뜨릴 수 없는 결속력이 있었다.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일반 백성 사이에서라면 모를까, 군주 레벨에서 신교는 오히려 구교를 압도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다.
배고픈 맹수에서 배부른 돼지가 된 것이다.
‘신교도 사이를 분열시키는 것도 이제는 의미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사안은 역시 내 총신들과 의논해 봐야겠지. 나는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으니.’
머리가 좋지 않은 건 지금도 느끼고 있는 단점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항상 자신이 무식하고 못 배웠다고 말하는 마를로네보다 머리가 나쁜 느낌이다.
같은 걸 배워도 그녀가 훨씬 빠르고 쉽게 이해하는 반면 루페르트는 암기하는 것에조차도 애를 먹었다.
당장 성벽 위에서 표적 간의 거리를 재는 법만 해도 그렇다.
사분의라는 막대기로 적과 아군의 거리를 가늠하고 거기 있는 막대기에 새긴 표로 거리를 계산하는 데 루페르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를 못하는 반면, 마를로네는 간단한 설명만 듣고도 척척 적과 아군 간의 거리를 계산해 포병에게 알려 줬다.
“……류크 님은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치렁치렁 길게 자란 머리에 서식하는 이 때문에 항상 머리를 벅벅 긁어 대며 마를로네가 걱정하는 투로 루페르트에게 말했다.
“…….”
루페르트는 빠르게 포기했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는 건 감정의 소모다. 안 그래도 이 공성전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내가 황제인지 류크인지 구분할 수 없어.’
그래도 이제 그 끝이 보인다.
짧은 깨달음과 함께 루페르트는 이 싸움이 끝났을 때의 일을 그렸다.
‘할 게 많아. 시도할 것도 많고. 하지만 그전에 이 도시를 지켜 내는 걸 봐야겠지.’
운명의 4개월의 첫날이 다가왔다.
* * *
비축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다.
화약 또한 1/3밖에 남지 않았다.
넉넉하다면 넉넉한 양이겠지만 더 이상의 응사나 견제는 불가능하다.
적들이 총공세를 가해 올 때를 대비해 남겨 놔야 하기 때문이다.
대포가 침묵하면 적들은 더욱 대담하고 공격적으로 접근할 것이다.
헨드릭 빌렘은 모든 포격을 중지하고 적들이 장악한 능보를 향한 포격만을 허락했다.
쾅! 쾅!
이쪽의 포격의 빈도가 줄어든 만큼, 상대방의 포격은 더욱 가열차게 성채를 두드렸다.
5성급 요새라는 위명은 장식은 아닌 모양인지 적들의 중포를 동반한 포격은 성벽엔 별다른 타격을 주진 못했다.
그러나 능보 쪽에 드나드는 공병과 노역자의 수가 폭증하고 있다.
낮에는 참호 속에 숨어 있다가 어둠이 찾아오면 개미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재를 실어나르며 능보 쪽을 아예 그들의 요새로 개조하려 들었다.
그 상황에서 천하의 낙센도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제 우리는 할 일이 없소. 최후의 백병전에 가담하는 것 말고는.”
어느덧 계절은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날씨가 무더워지며 말라붙은 하수도 쪽에서 나는 악취가 도시 전체에 퍼져 나갔다.
이미 청소를 했지만 사람은 매일 용변을 본다.
그동안은 도시 안을 흐르는 운하의 물이 하수도에 흘러들어 더러운 걸 씻겨 냈지만, 물이 끊겨 버린 현재 시점에서는 악취와 그에 동반한 역병을 막을 방법이 없다.
가벼운 역병이 퍼지는 가운데 한 달이 지났다.
일곱 남작의 아낙네가 병에 담긴 음식을 사람들에게 풀었다.
그 병조림이라 불리는 것은 놀라운 정도로 신선한 상태로 음식을 보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병조림은 대부분 병사에게 돌아갔고 일반 시민에겐 아주 작은 양만이 주어졌다.
시민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깎이는 게 보였지만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외곽에선 야스퍼의 저지대 연방군이 카스무어의 요충지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낙센 휘하의 용감한 병사가 목숨을 걸고 성벽 밖을 다녀오며 가지고 온 정보다.
도시의 사기는 높게 올랐지만 그 사기는 부족한 식량과 악취, 그리고 능보 쪽에서 밤마다 울리는 공사 소리로 금세 가라앉고 말았다.
“피하시지요.”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에게 대피를 권고했다.
“왜요?”
“왕국군이 공성 박격포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하드리아멘디쿠스는 능보가 있던 곳을 그레나스 전체를 삼키려는 또 다른 요새로 만들었고 거기에 다수의 박격포를 배치했다.
능보 쪽에서 일반 대포는 직사각에 걸려 흙을 덤은 토대를 때릴 수밖에 없지만, 박격포는 다르다.
보루와 성벽을 넘어 도시 안의 건물까지 타격이 가능하다.
그날 하드리아멘디쿠스는 밤새 박격포를 쏘며 도시 전체를 두들겼다.
도시 곳곳이 불에 타고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우성과 절규, 고함 속에서 두 달째가 지났다.
석 달째.
헨드릭 빌렘은 도시 곳곳에 교수대를 세웠다.
교수대는 만들어지자마자 빈자리를 채웠다.
전쟁 중에 범죄-특히 도둑질을 한 사람들을 잡아다 목을 매었다.
일부는 결백을 주장했고 일부는 어린 자식을 위해서라는 간절한 사연을 이야기했지만, 헨드릭 빌렘의 법 집행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줄에 매달린 썩어 가는 시체가 이미 악취로 만연한 도시에 또 다른 시취(屍臭)를 첨가했다.
도시의 민병대와 시민, 병사들로 조직된 소방대가 도시를 수리하고 불을 끄는 동안 하드리아멘디쿠스는 보루를 두들겼고 구멍을 냈다.
이미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보루의 수비병들은 너무나도 쉽게 보루를 포기했다.
보루마저 카스무어 왕국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제 왕국군과 도시의 시민을 가로막는 건 성벽 하나뿐이다.
삼중의 방어벽 중 하나만이 남았고, 그마저도 위태롭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거 같군요.”
시장이 항복을 암시하는 말을 했다.
그러나 헨드릭 빌렘은 석 달 전에 한 맹세서를 꺼내 보이며 한 달만이라는 마법의 단어를 말했다.
한 달.
이미 도시엔 시체로 가득 찼지만 도시의 책임자들은 좀 더 버티기로 했다.
시민들이 몇 명이 죽건, 병사들이 어떻게 부상을 입고 죽어 가건, 그건 그들의 맹세에 비하면 하찮은 문제였다.
“이것이 공성전이라는 건가.”
테타우 공성전은 이렇게 오래가지 않았던 것 같다.
금방 무너졌다.
애당초 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 융커스 베샤문트의 군대는 도시의 절반만을 포위했다.
워낙에 도시 자체가 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위되지 않은 영역에서 지원군이 오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근위대를 비롯한 도시를 지켜야 할 사람들과 귀족, 군주, 성직자들이 빠져나갔을 뿐이다.
남겨진 건 힘없고 갈 곳 없는 백성뿐이었다.
“이제 마지막 한 달입니다.”
반년 전과 달리 뼈가 앙상한 모습으로 헨드릭 빌렘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고 루페르트는 이 사내가 과연 범상치 않은 자라는 걸 다시 한번 거듭 확인했다.
‘이것이 일류의 용병인가. 아니, 장군이라고 해도 무방해.’
훌륭한 인재다.
언젠가 반드시 지켜야 할 성과 도시가 있다면 이 사내에게 수비를 맡겨도 무방하리라.
다만 루페르트는 이 사내가 온전한 자신의 편이라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한 사람의 밑에 있기엔 지나칠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