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37. 진창과 도랑 속에서 (6)
“……성형(星型) 요새의 방어력은 과거 요새의 방어력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대포가 있기 때문이죠. 과거엔 마법사들이 대포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숫자가 그리 많겠습니까? 저지대의 요새엔 최소 100문의 대포가 있습니다. 5성급 요새라면 스베아제 혹은 앙쥬제 최신 대포 150기 정도는 준비하고 있겠죠. 그것이 해자 위를 기어오르는 수천 명의 병사에게 일제히 포도탄(葡萄彈)을 날려 본다고 상상해 보세요. 단 한 순간에 수천 명이 죽는 겁니다.”
베르크 란의 말이 많아진 건 좋은 징조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한 번 물꼬가 트인 이야기가 도저히 끝나지 않는다.
‘아니, 그런 경험이 있으면 날 세 번이나 찾아오지 말라고.’
루페르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베르크 란 옆에 앉은 마를로네를 보았다.
갈수록 여성의 아름다움을 더해 가는 그녀는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금발을 휘날린 채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괸 채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녀도 지루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거기다가.
‘이 녀석.’
새삼스레 느꼈다.
마를로네가 퍽이나 아름다운 여인이라는걸.
어릴 때 사내아이 행색을 하던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서 그녀가 여자로 자라나고 있다는 걸 잘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황궁에는 예쁜 여자가 널렸고,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울피아나가 수시로 돌아다니고 있으니.
어쩌면 그녀의 어딘가 멀리 보는 듯한 슬픈 표정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결국 비슷한 사람에게 끌린다고 하지 않던가.
루페르트의 시선을 눈치챈 마를로네가 초록색 눈동자를 굴려 루페르트를 보았다.
“어머. 레크 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면 제가 너무 예뻐서 넋을 잃고 보신 건가요?”
“고민이 있는 거 같아서.”
“저처럼 예쁜 여자는 고민이 많지요.”
레크의 신분을 어정쩡하게 낮은 인물로 설정해서 그런지 베르크 란도 마를로네도 평소와 사람이 달라 보인다.
“어떤 고민이냐고요? 네. 절 사모하는 남성이 너무 많다는 것이겠죠.”
“오, 그건 좋은 일 아니냐?”
“그런데 그 대부분이 첩 제의라니. 참. 못난 할아버지 때문에 무슨 꼴인지.”
“내, 내 잘못은 아니다!”
“할아버지 잘못은 없긴 한데, 짜증이 나네요.”
마를로네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흘러가는 풍경을 보았다.
“……게다가 이 풍경. 지긋지긋해.”
“와 본 적이 있나? 저지대에?”
“아니요. 저지대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녀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데 여러 번 와 본 거 같네요.”
눈을 감은 채 마를로네가 탄식했다.
“여러 번 죽은 거 같기도 하고.”
순간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맞은 편에 앉은 여성을 응시했다.
‘무슨 뜻이지?’
아마 지금으로서는 알기 어려우리라.
눈을 붙인 그녀는 이내 할아버지의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새근새근 잠이 들었으니.
미동도 하지 않고 손녀의 체중을 팔에 받아들인 베르크 란은 그제야 길고 길었던 무용담을 끝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
다시 침묵에 빠져든 마차는 느릿하면서도 확실하게 탄탄한 도로를 따라 개활지에 우뚝 선 요새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도시는 크다고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요새였다.
요새 안에 작은 도시가 있는 모양새다.
그 크기는 제국의 도시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그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기하학적 형태와 낮은 듯하면서도 질서정연한 높낮이를 가진 성채와 능복, 보루는 높이 솟은 제국의 성벽보다 더 단단하고 단호한 인상을 안겨 주었다.
‘이것이 저지대의 성채인가.’
눈으로 보는 건 이게 처음이다.
그림으로 보는 것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다리로 연결된 성문 쪽에서는 한 무리의 여성과 아이들이 수레에 오른 채 북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우는 소리에 루페르트가 찡그린 표정을 짓자 베르크 란이 대뜸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공성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여자와 아이들을 미리 요새 안에서 빼내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도 입이니까. 게다가 사람이 하나둘 죽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역병 또한 요새 안에 퍼집니다. 병사들은 이를 두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발목을 잡아당긴다고 표현하지요.”
이제야 느낀 건대 루페르트는 이 사내의 기분이 전례 없이 좋다는 걸 발견했다.
말이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리라.
아마 큰 기대를 했거나, 아니면 오랜 부상에서 회복되어 그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는 것이 기쁨을 줬는지도 모른다.
광장엔 산더미 같은 식량과 화약이 쌓여 있었다.
“식량과 화약. 공성전의 필수품이지요. 그건 그렇고.”
베르크 란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남쪽을 향했다.
“카스무어의 장군은 참으로 오만하군요. 눈앞의 성채가 수성을 준비하는데 지척에서 지켜보기만 하다니. 제국의 장군이라면 최소 경기병대라도 보내서 보급선을 흔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베르크 란의 평가와 달리 그 장군, 하드리아멘디쿠스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곧 그는 이 도시를 포위할 것이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이 도시를 무릎 꿇릴 것이다.
루페르트는 오디아덴이라는 시내의 유력 인사를 찾았다.
도시 참사회의 일원 중 하나인 그를 찾은 이유는 그가 루페르트 일행에게 안정된 구경꾼 자리를 보장해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류크라는 사람인가. 트라이아 선제후 레벤호스트를 따른다는.”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을 쌓으려고 왔소. 알다시피 저지대 전장은 군사 경력을 시작하기에 최적의 장소니.”
오디아덴은 검은 옷에 챙이 넓은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전형적인 저지대 권력자의 복장이다.
시커먼 옷에 시커먼 모자를 쓴 그들이 좁은 의사당에 우르르 모여 의제를 결정하는 모습은 제국인의 눈엔 까마귀 무리가 작당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루페르트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어에 이어 까마귀인가.’
그래도 그 까마귀는 루페르트에게 그럴듯한 명함을 줬다.
“고문 자격은 줄 수가 없고 대신 전쟁 참관인 정도 지위를 부여하려 하는데, 괜찮겠소?”
“관계없소.”
“좋아. 그럼 이 검은 완장을 차시게. 누가 물으면 나의 이름을 대고.”
적절한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공성전이 시작되면 여관조차 징발의 대상이기에 오디아덴의 이름을 파는 걸 잊지 않았다.
하루를 쉰 후 루페르트는 베르크란 일행과 함께 요새를 돌아보았다.
베르크 란은 루페르트에게 요새의 각 구조와 설계의 논리, 실제 벌어지는 전투 양상에 관해 짧고 진중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는 말 수가 거의 없고 말할 의사도 거의 내비치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영역 만큼에서는 남들보다 더 유창하게 말하고 또 말하는 걸 좋아했다.
“이런 요새를 상대로 할 땐 참호를 파고 접근합니다. 통상 두 개를 나란히 해서 파 접근해 들어갑니다. 일정 거리 안에 들어오면 요새를 둘러싸는 평행호를 파서 거기에 보루를 쌓아 예비대를 배치하고 다시 공병들이 삽을 들고 참호를 파고 요새에 접근하지요.”
그는 설명에 심취했는지 삽을 놀리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베르크 란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요새는 완벽하게 포위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3개의 물줄기를 끼고 있는데 갈라진 부분은 두 개의 물줄기를 건너야 하고, 나머지 하나의 물줄기는 깊고 폭이 넓으니까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부 포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루페르트가 카를슈타인에게 받은 보고서에 의하면 하드리아멘디쿠스는 두 달에 걸쳐 도시 전체를 완벽히 둘러싸는 포위망을 구축했다.
강도 예외는 아니었다.
메르와 얄타, 두 개가 합쳐서 아르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 위에 배로 이은 다리와 적의 군함을 막기 위해 수중에 말뚝을 박았다고 카를슈타인은 분명하게 기술했다.
“강을 막을 가능성도 고려해 봄 직하지 않나?”
“내가 전장에 있었을 때 저러한 강은 넘보지 못했소.”
베르크 란이 딱 잘라 말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노련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구시대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장을 둘러보고 성벽 위에 올라가자니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길쭉한 사람이 이쪽으로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루페르트는 그 사내의 모습을 보고 잠시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닐까 하고 그를 다시 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큰 키에 길쭉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거의 2m 30cm에 달하는 신장.
그 사내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장대 그 자체로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베르크 란이 낮은 목소리로 귀띔했다.
“로이테르입니다.”
“로이테르? 그게 뭡니까?”
“저지대 연방의 도펠죌트너라 생각하시면 될 듯싶군요.”
“아. 그거였나.”
책에서 본 적이 있다.
200년 전 벌어진 저지대 독립 전쟁에서 나타난, 기이할 정도로 키가 컸다는 초인병이다.
앙상해 보이는 몸과 달리, 그 몸은 신장에 어울리는 괴력을 가지고 달려드는 제국과 카스무어의 병사들을 무참하게 도륙했다고.
특히 이 거인병들이 20m에 달하는 상식을 초월하는 장창을 들고 집단을 이루면 그 용맹하다던 카스무어의 용병들도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고 한다.
‘이 괴물들도 도펠죌트너처럼 서서히 실전되다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직도 생존자가 있었군.’
그 로이테르가 루페르트 앞에 서서 긴 그늘을 드리웠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 그 완장. 누구한테 받은 거요?”
무식하게 큰 키와 달리 나름 시원한 얼굴에 산뜻한 콧수염을 기른 금발의 사내는 첫인상보다는 사람이 좋아 보였다.
“도시 참사회원 오디아덴의 신원 보증을 받고 전쟁 참관인의 지위를 받았소.”
루페르트는 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로이테르에게 내밀었다.
루페르트보다 3배는 길 듯한 손가락을 가진 큼지막한 손이 편지를 집어 높은 곳으로 가지고 갔다.
“아. 그렇군요. 좋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갔던 서찰이 다시 내려가 루페르트 앞에 내밀어졌다.
“낙센입니다. 소티(Sortie) 조의 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긴 허리를 꾸벅 숙여 정중하게 인사한 후 경쾌한 발걸음으로 쭉쭉 앞으로 나아가 사라졌다.
루페르트는 한동안 그 기이할 정도로 긴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지켜보았다.
‘진짜 크네. 진짜 길어.’
루페르트가 베르크 란을 돌아보았다.
“전장에 오래 계셨다고 하는데 로이테르와 상대한 적은 있습니까?”
“있지요.”
베르크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까다로운 적이었습니다. 이능의 힘이 우리보다 부족하다고 하나, 그들은 육신 그 자체에 이능의 힘을 품고 있으니.”
베르크 란의 그늘진 눈동자 위로 과거의 전장의 모습이 그림처럼 떠올렸다.
20m에 달하는 할버드가 질풍처럼 사람과 허공을 가르며 자신에게 쇄도하는 광경을.
“……그다지 적으로 만나고 싶은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루페르트도 동의했다.
“확실히. 그런데 소티조라는 게 뭡니까?”
“부르봉에서 건너온 말로 상대방이 참호를 파고들어 올 때 이쪽도 참호를 파 참호를 파는 공병들이나 전진 배치된 대포를 파괴하는 병사들입니다. 극도로 위험한 임무이기에 가장 대담하고 가장 강한 자만이 그 조에 속할 수 있죠.”
“저렇게 큰 키를 가진 사람이 참호 안에 들어가면 상반신이 거의 노출되지 않을까요?”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군요. 생각이 있지 않을까요?”
베르크 란은 은근한 경계를 드러냈다.
그가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로이테르는 성격이 뒤틀려 있지. 그 저지대 연방 놈들이 그들을 폐기한 이유도 그 괴물 같은 모습만큼이나 뒤틀린 성격 탓이라고 들었다.’
베르크 란은 아까부터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부족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손녀다.
말 많은 그녀가 지금은 어째서인지 한마디도 안 하고 입을 닫고 있다.
그가 마를로네를 돌아보았다.
“마를로네. 배탈이라도 난 거냐?”
아니다.
마를로네의 안색이 비할 바 없이 창백하다.
“뭐냐. 마를로네.”
손녀의 이상을 눈치채고 베르크 란이 낮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창백한 얼굴로, 이마에서 식은땀을 닦아 내며 마를로네는 거인병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안색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답했다.
“저 병사……. 기분 나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목에 걸린, 알 수 없는 목걸이를 더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