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58화 (158/225)

158화 37. 진창과 도랑 속에서 (5)

[ 폐하께서는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아티팩트 안개 가면과 흉내 내는 자의 힘을 빌려 직접 가장 문제가 되는 상황을 눈으로 보고 해결책을 모색했지요. ]

예전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대로 된 황제라면 사방에 뿌린 첩자와 충직한 신하들의 간언으로 제국의 뒷골목에 사는 시궁쥐의 숫자까지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전혀 아니었다.

분명 같은 현상이건만 이를 표현하는 사람의 말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사람마다 시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며 종교가 다르니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도 나고 자란 경험과 습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결국 어떤 건 제대로 이해하려면 직접 보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다.

그레나스는 루페르트가 제위를 맞이한 이래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서의 성패가 제국의 운명을 가른다.

그레나스가 버텨 낸다면 내전은 미뤄질 것이고, 그레나스가 함락되면 제국은 전화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동맹국도 아닌 외국, 그것도 잠재적인 적국 도시의 운명이 제국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니.’

당장 내전이 일어나는 건 치명적인 상황을 초래한다.

승리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제국이 쑥대밭이 된 이후의 일일 것이다.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힘의 우위가 필요하다.

내전을 일어난다고 해도 상대방을 가볍게 지르밟을 정도의 힘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 고어문트를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힘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다.

루페르트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골트문트는 여전히 미적지근한 반응이다.

적어도 루페르트를 적대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열성적으로 루페르트를 지지하는 건 아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그레나스는 이제 루페르트에게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부상했다.

“인사드립니다. 베르크 란입니다.”

“그 손녀 마를로네 란입니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가 루페르트 앞에 서서 공손히 인사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게 루페르트라는 걸 모른다.

루페르트가 아티팩트 안개 가면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흉내 내는 자를 받으면서 루페르트는 안개 가면의 정확한 사용법을 여신에게 배웠다.

[ 당신이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사람을 강하게 생각하세요. 당신의 손에 당신이 보이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이 마치 가죽을 벗겨 낸 것처럼 올려져 있을 거예요. 그걸 뒤집어쓰세요. 그럼 당신은 타인의 눈에 그 사람처럼 보일 거예요. ]

리프니에의 정체가 무엇이건, 그녀가 얼마나 종잡을 수도 없고 삐뚤어진 성격을 가지고 있건 신적 존재로서 리프니에의 권능은 감탄을 감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돌리는 건 논외로 하고서라도 그녀가 가끔씩 하사하는 권능의 조각만 봐도 알 수 있다.

안개 가면은 티그리트가 가장 즐겨 쓰던 아티팩트였다.

지금도 루페르트는 티그리트의 이미지가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지적인 노인의 모습으로 연상할 정도다.

이제 철혈대제의 도구는 루페르트의 손에 있다.

그것과 짝을 이루는 또 다른 아티팩트 흉내 내는 자와 함께 말이다.

‘아마, 여신님은 일전의 일로 내가 상심한 걸 알고 그를 달래 주려고 이런 선물을 던져 준 것이겠지.’

어쩌면 그녀도 후회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신은 막강한 권능만큼 그리 어른스러운 존재는 아니니까.

하지만 이미 루페르트는 자신과 여신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었다.

‘어떤 의도로 줬건,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써 주겠다.’

한 가지 걱정되는 건 그 문어의 행동이다.

과연 그 괴이한 문어가 루페르트의 흉내를 제대로 낼 것인가.

자기 말로는 고대의 군왕에서부터 교수대에 매달린 사형수까지 두루 연기를 했다고 하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다지 미더운 존재는 아니다.

‘결국 문어잖아.’

그럼에도 루페르트가 문어에게 제국을 맡기고 가는 건 회귀라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정의 목적은 그레나스의 함락 원인을 밝혀내는 것, 원인을 알아내는 즉시 회귀를 해서 모든 걸 바로 잡을 것이니까.

이 여정에서 루페르트는 레크라는 가상의 인물을 연기했다.

나이는 20대 초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제국 귀족의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당연하게도 그 누구도 루페르트를 황제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여신의 권능이 단지 인간의 시각을 희롱하는 것만이 아닌, 그를 받아들이는 정신까지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확실히 여신님의 권능은 비할 바 없는 축복이다.’

안개 가면만이 아니다.

떠나기 전에 대신 자리를 차지한 문어가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그는 중신들에 둘러싸여 산더미처럼 쌓인 탄원서 하나를 집어 들고 있었다.

그걸 본 루페르트는 피식 웃었다.

‘골치 아픈 일이지.’

황제만큼 많은 읍소를 받는 사람이 이 세상에 따로 있을까.

마냥, 된다 안 된다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다.

황제에게 직접 올라온 문서인 만큼 나름의 이유를 대 줘야 한다.

아랫사람에게 맡기는 일도 있겠지만, 그 아랫사람이 일을 제대로 한다는 보장이 있을까?

결국 루페르트는 그러한 잡다한 업무까지 스스로 도맡아서 결재를 했다.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그 사안이 미묘하고 복잡할수록 황제의 고민은 깊어진다.

중신들의 표정을 보니 이 문어에게도 그러한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가 주어진 모양이다.

그러나 문어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어떤 귀족이 상속이 이루어지기 전에 재산을 후처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하고 죽은 직후,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부친이 살아 있는 시점에 나타났다. 이 경우 제국법과 지역 관습법의 결론이 다르기에 황제의 해석을 요구한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 아닌가?”

내용만 들어도 까다로워 보인다.

루페르트는 문어처럼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문어는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이 문제를 해결했다.

“왜 황제에게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지? 황제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그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을 지배하는 자의 종교를 따르는데 그보다 덜 중요한 세속적인 문제는 별론으로 하고 황제에게 떠맡겨도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탄원서를 즉각 반려하되, 지역 영주에게 이미 해결을 요청한 바에 있으면 그에 따르게 하고, 지역 영주의 결론을 듣고도 이 탄원을 보낸 거라면 이 사실을 지역 영주에게 알리도록 해라.”

놀랍게도 문어는 자칫 까다로운 논쟁에 휘말릴 수도 있었을 사안을 종교에 비견해 지역 영주의 책임으로 돌렸다.

문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세련된 일 처리다.

적어도 루페르트는 이토록 단시간에 이 문제를 가볍게 넘기진 못했을 것이다.

중간에 눈이 마주치자, 문어는 손을 촉수처럼 흐느적 휘저어 가 보라는 시늉을 했다.

‘하, 하긴 저 녀석도 여신님의 아티팩트. 왜 아티팩트인지 모르겠지만 수천 년을 넘게 살며 다른 인간을 흉내 낸 건 확실하니.’

적어도 저지대에 가 있는 동안 황궁에 시끄러운 문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루페르트는 자신을 기다리는 베르크 란 일행에게 합류했다.

“갑시다.”

여기서 루페르트의 신분은 황제의 밀명을 받은, 제국의 첩보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제국의 눈’의 일원이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는 레크라는 이름을 쓰는 알 수 없는 사람에게 큰 의심을 하지 않았다.

황제 본인이 직접 지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가면도 모든 걸 속일 순 없는 법.

안개 가면엔 목소리조차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꾸는 권능이 있지만 루페르트는 되도록이면 베르크 란 일행과 말을 섞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 인간.’

루페르트는 건너편에 앉은 초로의 사내를 꺼림칙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 이후에 두 번이나 더 왔어.’

황제가 괜히 그레나스에 직접 행차하는 게 아니다.

베르크 란은 거듭해서 실패했다.

그러니까 마를로네 없이 혼자 나타났다.

아픈 건 딱 질색인지라 그가 혼자, 공허한 얼굴로 서 있는 걸 보자마자 소라고둥을 불었지만.

‘저 베르크 란이 3번이나 실패하다니. 처음은 몰라도 나머지 두 번은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때는 겨울이다.

루페르트가 가문의 숲에서 티그리트를 만난 직후의 시점.

일주일 뒤면 해가 바뀐다.

불안한 황제라고 손가락질하던 루페르트의 치세도 3년 차를 맞는 것이다.

렌타이어마르크 동란을 빠르게 해결하고 내전의 불길을 중도에 차단한 황제 루페르트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준수한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

황궁에 소속된 석수들이 벌써부터 선제의 벽에 새길 루페르트의 모습을 의논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대로 내전의 불씨만 잘 꺼뜨린다면, 제국은 무사히 천년기를 맞겠지.’

선제의 벽에 자신의 모습이 새겨질 것이다.

미완의 황제가 영원의 황제로 남게 되리라.

“여기서부터가 저지대 연방의 땅입니다.”

루페르트는 풍경을 보았다.

제국과는 다르다.

가는 곳마다 숲, 숲, 그놈의 숲으로 가득 찬 제국과 달리 저지대 연방엔 드문드문 숲이 있을 뿐, 나머지는 끝없이 탁 트인 개활지다.

단순한 벌판이 아니라 곳곳에 잘 닦인 도랑과 운하가 있고 농지마다 작은 관목을 심어 아담한 울타리를 만들었다.

가끔 보이는 마을은 규모는 아담했지만, 집들은 대체로 훌륭했다.

‘저지대 연방엔 부농이 많다고 들었다.’

외국에 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제국이 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우월한 나라라고 교육받고 또 그렇게 생각했다.

여느 제국인처럼 외국의 사정은 아무래도 좋은 먼 곳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루페르트에게도 뚜렷이 나타났다.

실제로 그가 직접 본 외국은 대체로 가난하고 비참했지만, 저지대 연방은 다르다.

가지런하고 정돈된, 곳곳에서 여유와 부가 느껴진다.

“이들의 부는 바다에서 왔다고 하나.”

저지대 뱃사람 전부가 해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급료를 받는 해군은 물론이고 상선 선장마저 자기보다 약하거나 값나가는 화물을 잔뜩 실은 배를 보면 거리낌 없이 해적질을 한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배와 부유함을 늘리고 그걸 바탕으로 강도떼에 비견되는 함대를 만들었다.

강력한 해적의 비호 아래 저지대 연방의 상인은 배를 타고 곳곳에 진출했고, 교역하는 자가 으레 얻는 부유함이라는 축복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축복이 작은 국토 전역에 뿌려졌다.

루페르트는 그 축복이 저지대인들이 자랑하는 막강한 요새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잘 관리된 농토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적어도 이 지방 하나만 떼어 놓고 보면, 저지대 연방은 제국의 그 어떤 곳보다 큰 부를 누리고 있구나. 어쩌면 카렐리아보다, 슈발츠마인보다 더 큰 부를 누릴지도.’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긴 루페르트를 향해 잠자코 있던 베르크 란이 입을 열었다.

“잘 준비된 요새를 3개월 안에 함락하는 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만, 전장에서는 어떤 일이든지 일어나는 법입니다. 저도 잘 준비된 요새가 터무니없는 사유로 함락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어째서인지 베르크 란은 그 딱딱하고 굳은, 안 그래도 요즘은 전보다 훨씬 무서워 보이는 얼굴에 희미하지만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이 무슨 의도로 저런 행동을 하는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 인간도 어쩔 수 없는 노병 출신인가.’

군대 있었던 놈치고 옛날이야기 안 좋아하는 놈은 없다.

제아무리 과묵하고 과거의 일을 숨기는 사람도 계기가 생기면 자기도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을 느끼며 군 복무 시절의 무용담과 경험을 술술 쏟아 놓곤 한다.

그동안 베르크 란에겐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건 루페르트의 신분이 특수하기 때문이리라.

남작 시절에도 루페르트는 황제 후보였고 거기다 베르크 란 조손이 극도로 증오하면서도 따르는 슈발츠마인 계열 사람이다.

타인보다 몇 배는 높은 담을 쌓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레크라는 자는 첩자질을 하는 명백히 급이 낮은 인물이고 슈발츠마인 쪽 사람도 아니다.

“……부르봉 신교도 반란 때 오스티야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잘 방비된 반역자의 도시죠.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첫날 국왕군과 주고받은 포격이 마을의 창고 하나를 건드렸습니다. 불길이 치솟았죠. 그날따라 마른 돌풍이 도시 곳곳을 휘저었는데 그것이 불길을 도시 사방팔방에 흩뿌렸습니다.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주거지 전체를 불태워 버린 도시는 이튿날 성문을 열고 관대한 조건을 구걸했지요.”

“그건 인상 깊은 이야기군요.”

“성내에 이민족이 많거나 이교도가 많은 것도 문제가 되지요. 마찬가지로 부르봉 신교도 반란 때…….”

루페르트가 물끄러미 베르크 란을 쳐다보았다.

‘아니, 이 사람. 말이 이렇게 많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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