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37. 진창과 도랑 속에서 (7)
저지대 연방은 모든 군주에게 버림받은 땅이었다.
펄과 늪으로 가득 차 농사도 지을 수 없고 가축을 방목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광산도, 심지어 사냥터로 쓸 숲조차 없었다.
대륙의 여간한 지역엔 룸 제국인이 지은 룸식 이름이 있지만, 저지대 연방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저지대 연방은 가치가 없는 땅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살던 쫓겨난 부족과 대륙 각지에서 쫓겨나거나 도망친 사람들은 이 무가치한 땅을 대륙에서도 가장 윤택한 땅으로 탈바꿈시켰다.
펄을 경작지로 만들고 늪을 저수지로 만들었으며 아무것도 없는 땅 위에 성과 도시를 짓고 번성했다.
그들의 부유함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그들을 무시하던 각지의 군왕들이 저마다 이 땅을 차지하려 했다.
보호자를 찾던 저지대 연방은 그들의 보호자로 카스무어 왕국을 선택했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제국의 굳건한 동맹국이며 무시 못 할 군사력을 가졌고 무엇보다 최대의 위협이라 할 수 있는 부르봉 왕국의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다.
그때부터 저지대 연방의 방어 정책은 전 국토를 요새로 도배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카스무어 왕국이 부르봉 왕국의 윤택한 서남부 지대를 공략하는 동안 요새의 사슬로 버티면서 부르봉 왕국이 물러가게 하는 것이 방어 전략의 핵심이었다.
제국의 위협은 문제 되지 않았다.
카스무어 왕국은 제국,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슈발츠마인과 겹사돈을 맺었고, 투표권 없는 선제후라고 불릴 정도로 긴밀한 사이였다.
저지대 연방이 제국의회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도 카스무어 왕국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연방의 부는 더욱 커졌고 카스무어 왕국에 바쳐야 했던 세금과 간섭이 점점 아니꼽게 느껴졌다.
특히 카스무어 왕국이 보내온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사제는 지탄의 대상이었다.
제국의 크로지우스가 신교의 바람을 일으킬 때 연방이 이에 가장 동참한 건 필연이었다.
종교가 왕국과 저지대를 갈라놓았고, 철혈대제가 교활한 혹은 비열한 술수로 저지대 자체를 둘로 쪼개 놓았다.
저지대 남쪽은 카스무어 왕국의 지배 아래 구교의 믿음을 고수하고 북쪽은 연방으로 남았다.
이제 카스무어 왕국이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연방의 관문인 그레나스를 두들긴다.
제국의 황제 루페르트는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왕국군이 온다.”
하드리아멘디쿠스가 지휘하는 8만의 군대가 지평선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랗게 빨갛게 물들인 군기가 도처에서 휘날렸고 북과 피리를 부는 악대의 구령에 발맞추어 왕국의 근간인 왕국 보병대가 열과 오를 맞추어 행군대형으로 도시에 접근해 왔다.
그들이 도시를 포위하기에 앞서, 하얀 깃발을 내건 경쾌한 기수가 아름답고 가벼운 말을 탄 채 성벽 아래로 접근해 의례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그레나스의 시장 프레데릭 반 힌겔메스는 연방 의장 야스퍼의 이복동생이다.
당연하게도 시장은 항복 제의를 일축했고, 사절은 말머리를 돌려 진중으로 돌아갔다.
루페르트가 아는 역사에 의하면 3개월 만에 종결된 그레나스 공성전의 시작이다.
그레나스 방어군의 지휘관은 레오폴드 폰 얀한데라는 제국 군인으로, 철혈대제 시절 벌어진 대전쟁 당시 대륙 각지에서 제국군의 깃발 아래 많은 경험을 쌓은 노련한 지휘관이라고 알려졌다.
그는 전쟁이 임박하자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수녀를 제외한 도시에 남은 구교 신자들을 내몰다시피 하여 도시 밖으로 쫓아낸 것이다.
그 이외 화약과 식량을 비축하고 식료품에 관한 물가 고정제를 예고했다.
수비대의 병사는 5천 명 남짓인데 오백 명은 민병대였다.
나머지 4천 5백 명 중 연방 병사는 3천 정도이고 나머지는 외국, 특히 앙쥬 왕국의 병사들로 채워져 있었다.
앙쥬 왕국의 병사는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노련한 지휘관 사이에선 끈질기고 용기가 있고 궁지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 외 도시엔 제국 마법 대학 출신인 두 명의 마법사가 있었는데, 전투보다는 연금 쪽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라 이번 전투에서는 그다지 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도시에 남기를 선택한 1만 2천 시민들은 모두 신교도로 왕국에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들이 전투 중에 소요를 일으킬 일은 거의 없어 보였다.
이상이 루페르트가 직접 보고 관찰한 그레나스 시내의 전투 전 상황이었다.
‘군사 일은 잘 알지 못하지만, 도시의 분위기는 밝다. 식량도 풍부하고 병사의 사기도 높아. 요새도 뭐, 잘 지어진 거 같고.’
안으로 본 도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뭐가 이 도시를 그토록 빠르게 무력화시켰을까.
루페르트의 품 안엔 카를슈타인의 보고서가 시대를 넘어 그의 수중에 있었다.
여신의 금고가, 루페르트가 생각한 것같이 제국의 금괴를 넣고 회귀해 무한히 복사하는 사기적인 짓거리는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이런 작은 소품 정도는 시대를 뛰어넘어 가져오는 정도의 편의는 제공했다.
‘오늘이 며칠이었더라. 3일이었나.’
루페르트는 날짜를 확인하고 보고서에 적힌 같은 날짜의 기록을 찾았다.
<1월 3일>
장군이 도시의 포위를 지시.
선발대, 강을 도하.
기병대, 북쪽으로 크게 우회하며 도시의 배후면을 장악, 육상 교통로 차단.
<1월 4일>
외부 방어벽 공사 시작.
급료 문제로 현지 노동자들의 작은 소요를 일으킴.
밤늦게 비가 옴, 아니. 우박도 섞여 있었음.
<1월 5일>
공사 진행 중.
대단히 특이한 동물을 굴착에 사용. 거대한 두더지처럼 생겼는데, 혼자 백 사람이 종일 일해야 할 분량을 단 몇 시간 만에 해냄. 하지만 엄청난 악취와 더불어 역겨운 먹을거리를 요구해 제국군에서 사용할 일은 없어 보임.
거기까지 심드렁하게 읽던 루페르트는 눈을 크게 뜨고 문장을 다시 읽었다.
‘거대 두더지?’
괴수를 전쟁에 사용하려는 시도는 많았다.
하지만 괴수는 사람 손에 길들지 않기에 괴수다.
길들었다면 가축의 범위 안에 편입됐을 것이다.
루페르트가 보기에 왕국군이 사용한 짐승은 괴수의 일종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황궁에도 괴수 한 마리가 있었지.’
루페르트는 문어를 생각했다.
이 도시에 온 지 벌써 보름이 지났지만, 제국 쪽에 별다른 잡음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문어는 충실하게 루페르트의 대역을 잘 수행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공성의 흐름은 카를슈타인이 보고한 대로다.
왕국의 장군 하드리아멘디쿠스는 도시를 포위하는 거대한 외벽을 구축했다.
이렇듯 공성은 엄청난 지출을 요구한다.
한 도시나 성을 차지하려면 그 도시를 짓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한다는 이야기마저 있을 정도다.
당장 하드리아멘디쿠스는 무려 8만 명의 병사를 동원했다.
그 전부가 전투원은 아니겠지만 무시무시한 숫자다.
그에 상응하는 급료와 식비가 들 것이다.
그 병사를 그냥 놀리는 건 아니다.
저마다 삽을 들게 하여 요새를 둘러싸는 또 다른 요새를 지어야 한다.
거기다 도시에 접근할 참호를 파는 공병들에겐 두 배에서 세 배의 급료를 지급해야 하고, 참호에 필요한 도시에 선물한 수많은 포탄과 화약도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전쟁은 그 자체로 돈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공성전은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자원을 요구한다.
그런 공성전을 겨우 석 달 만에 끝낸다는 건, 단순히 시간의 절약만이 아닌 엄청난 비용의 절약과도 연결된다.
사상자의 숫자로 마찬가지.
한 달이 지나자 왕국군은 포위망을 완성했다.
베르크 란이 절대 불가능하다던 강줄기 너머로도 포위망이 형성됐다.
“거, 봐. 잘만 포위하네.”
강 위에 우뚝 세운 다리와 그 다리를 지나는 수많은 병사와 마필을 보며 베르크 란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단시간에 저런 다리를 지을 수 있는 거지? 최소한 석 달은 걸릴 텐데.”
혼란스러워하는 베르크 란을 보며 루페르트가 불쑥 말했다.
“미리 자재를 준비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그, 그렇습니까?”
“네. 왕국령에 속한 도시에서 미리 모든 자재를 만들고 그걸 운반하여 조립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적장 하드리아멘디쿠스는 장군보다는 목수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평가도 왕왕 도는 모양입니다.”
이는 카를슈타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 도시를 포위했다고 해도 1년 이상은 거뜬히 버틸 겁니다.”
베르크 란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사기가 높습니다. 물자도 풍부하고. 병사들도 노련하더군요. 이런 요새는 쉽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엔 루페르트도 동의했다.
하지만 루페르트의 손엔 이 도시의 미래가 날짜별로 기재되어 있다.
카를 슈타인의 짧고 때로는 일인칭적인 정돈되지 않은 문서에 기록된 공략 과정은 뭐랄까, 순조로웠다.
루페르트는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방안에서 촛불을 밝힌 채 그만이 가진 비밀스러운 기록을 눈으로 읽어 나갔다.
<2월 12일>
새벽에 중포 다섯 문을 2차 평행호에 옮겨 적의 전진호에 포격을 가함.
포대의 위치가 적의 전진호에 대해 직각의 위치였기에 대단히 효과적인 전과를 기록.
...
...
<2월 22일>
저지대인들이 포대를 기습했으나, 어렵지 않게 격퇴.
동쪽 사면의 능보 점거, 공성 박격포를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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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일>
“주판을 든 상인” 보루 함락. 예상치 못한 결과에 저지대 병사들의 탄식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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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전일 밤에 하아스호름에서 포탄과 화약이 도착.
장군이 도시 건물에 포격을 가할 것을 지시.
도시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성벽 너머까지 치솟는 걸 목격.
...
...
<3월 11일>
시장 프레데릭이 성문을 열고 항복.
“이제 겨우 두 달 남짓인가.”
도시가 함락되기 전까지 앞으로 약 70일.
하지만 도시의 분위기는 밝고 희망찼다.
주변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시는 적어도 1년은 더 버틸 거라고.
그동안 저지대의 군주-야스퍼가 병사들을 이끌고 저지대 곳곳을 해방시키거나 아니면 이 도시를 구원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어.”
카를슈타인의 문장은 지나칠 정도로 축약됐고 생략이 많다.
구구절절한 기록은 많지만 루페르트의 시선엔 ‘하드리아멘디쿠스가 주먹을 휘두르니, 요새가 나가떨어졌다’는 수준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자세한 정황을 확인하려면 성벽 위로는 부족하다.
루페르트의 시선은 카를슈타인이 가장 많은 언급을 할애한 부분.
참호로 향했다.
땡 땡 땡-
경고를 알리는 종소리가 성벽 위에서 울려 퍼졌다.
“왕국 놈들이 참호를 판다.”
“동, 북, 서, 남서, 북동! 다섯 방향에서 동시에 참호를 파 들어가고 있다!”
관측병들이 망원경으로 저마다의 위치를 지키며 다급한 상황을 알렸다.
이에 저지대 병사들이 출동했다.
총과 창 대신, 저마다 삽을 둘러메고.
그 중심엔 기이할 정도로 키가 큰 거인 병사가 있었다.
덩치에 걸맞게 남들보다 3배는 긴 거대한 삽을 어깨에 떡 걸치고서 말이다.
루페르트가 베르크 란에게 말했다.
“우리도 참호에 나가 보는 건 어떨까요?”
마를로네는 난색을 표했다.
“윽. 싫은데. 그건.”
반면 베르크 란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요. 제가 저 로이테르에게 말해 보겠습니다.”
잠시 후, 루페르트 앞에 진창과 도랑으로 이루어진 참호의 세계가 펼쳐졌다.
때마침 우울한 겨울비가 한기를 품고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가 얼굴을 타고 흐르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참호 안을 들여보았다.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그 풍경은 관을 묻기 위해 파헤친 묫자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