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37. 진창과 도랑 속에서 (4)
“……혹 폐하께서 말씀하신 군주들이 신교도 동맹을 결성한다면, 최소한 우리도 같은 구교 동맹을 만들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명심하셔야 할 것이…… 구교도의 숫자는 신교도보다 배는 많지만, 군주의 경우엔 그 반대라서 구교보다 신교를 믿는 군주의 숫자가 좀 더 많습니다.”
“현재 시점으로 확실한 우리의 동맹은 선제후 중에서는 아카이아, 렌타이어마르크, 하위 군주로 가면 브라운베르그, 울름, 모르카르 정도가 구교의 대의에 부합할 만한 조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같은 종교를 믿는 카스무어 왕국은 당연히 우리를 지지하겠지만, 부르봉 왕국은 우리를 결코 돕지 않을 것입니다. 부르봉인들의 염원은 오로지 하나, 우리 제국의 멸망뿐이니까요. 그들은 제국이라는 거인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박쥐 같은 자들입니다.”
“고어문트가 돕는다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겠지만, 제국 국토가 전쟁터가 되는 미래는 피할 수 없겠지요.”
또 다른 시간 축에서 결성된 레벤호스트를 맹주로 하는 새로운 신교도 동맹은 글자 그대로 제국을 내전으로 불태울 재앙의 불씨였다.
3 총신은 물론이고 루페르트 앞에서 실력을 증명하고 싶은 야심 찬 신하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주재했지만, 새로운 신교도 동맹에 대해서 현재의 루페르트가 할 수 있는 건 전쟁뿐이다.
‘그레나스의 함락이 제국의 내전으로 이어진다니.’
과거를 되새겨 보았다.
그레나스라는 곳이 함락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장군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카스무어 왕국이 그레나스를 취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외국의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의 내전은 레벤호스트와 골트문트의 불화라는, 저지대의 사정과 무관한 영역에서 일어났다.
‘이런 흐름도 결국 내가 꼭두각시 황제가 아니라서 일어나는 것인가.’
길고 지루한 회의 끝에 루페르트가 얻은 결론은 그레나스의 함락을 미루거나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었던 베르크 란은 실패했다.
카를슈타인 대령의 보고서는 철저한 공격자의 입장에서 기술된 문서다.
공성에 일가견 있다는 퇴역 장군에게 보고서를 보냈는데, 그 장군은 이것으로는 그레나스를 함락시킨다고 보기 어렵다는 모호한 의견을 내놓았다.
첩자를 통해 저지대 연방에도 제공해 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마 그들은 그 문서가 타국이 제공한 역공작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외교적으로 전쟁을 해결하는 방법은 없나?”
간만에 오토 브라에를 불렀다.
과거를 보는 것만으로 고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럴 땐 내키진 않지만, 총신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
오토 브라에는 차분하면서도 재기 넘치는 눈동자로 황제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지대 연방와 카스무어 왕국의 원한은 이백 년이 넘어가고, 결국 철혈대제 시절 둘은 양립할 수 없는 원수로 변했습니다. 이미 시작된 전쟁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중재는 할 수 있겠지만 전쟁이 재개된 직후라 할 수 있는 현재 시점에 중재하는 건 카스무어 왕이 들인 비용도 비용이겠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체면을 적잖이 상하는 결과로 돌아올 겁니다. 자칫하면 카스무어 왕국이 제국의 전열을 이탈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카스무어 왕국은 혼인과 세월이 맺은 굳건한 동맹이다.
왕국은 강력한 해군과 육군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해군의 명성만큼이나 육군의 명성도 높다.
부르봉 왕국이 제국을 증오하나 제국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후방을 카스무어 왕국이 꽉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카스무어 왕국이 저지대 연방을 견제하는 것도 제국의 이익에 부합한다.
갈수록 탐욕스러워지고 부유해지는 저지대 연방을 가만히 놔뒀다간 제국의 신교 세력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지원자가 되어 제국의 균형을 한 번에 무너뜨릴 테니까.
“카스무어 왕국과 저지대 연방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중재는 양국이 슬슬 전쟁에 지치기 시작할 무렵이겠죠. 이제 시작 단계인 전쟁에서 중재를 한다는 건,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어려운 일로 보입니다.”
‘중재도 안 된다는 건가.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군.’
그레나스를 지켜야 한다.
루페르트가 직관적으로 생각했던 방식이 옳았다.
하지만 어떻게?
제국군을 저지대 연방에 도시에 투입할 순 없다.
그건 미친 짓이다.
그렇다고 제국군 일부를 꾸며서 보낼 수도 없는 법.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레나스의 함락을 늦추고 싶다.”
“저도 그레나스의 함락을 늦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용병을 쓰면 안 될까?”
“용병도 불가능합니다. 용병들도 전쟁에 개입하려면 그들을 고용한 군주의 이름으로 활동해야 하니까요. 아무리 정신 나간 용병 대장이라고 해도 익명의 고용주를 위해 전쟁터에 뛰어드는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어렵군.”
“결국은 소수의,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는 쪽이 그나마 힘이 되겠지요.”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방법은 처음부터 썼다. 오토 브라에.’
오랜만에 부른 오토 브라에는 안 된다는 말만 잔뜩 하고 물러났다.
외교에 소질이 있는 그로서도 이번 사태를 해결할 뾰족한 해법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전장의 일은 전장에서 해결해야 한다.
루페르트는 답답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은데, 베르크 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를로네가 왜 죽었는지조차.’
문득 생각이 들었다.
직접 거기서, 그 안의 전장을 경험할 수 있다면?
공성전은 테타우에서 경험한 게 처음이자 끝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성벽에 오르는 걸 중신들이 허락하지 않았고, 성벽에 오를 정도의 여유가 생겼을 땐 황궁의 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달아난 뒤였으니.
“그레나스. 거기에 갈 방법은 없는 건가.”
루페르트가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순간, 그의 목에 건 소라고둥이 가볍게 움직였다.
[ 루페르트 가우저. ]
여신의 목소리다.
루페르트는 그 목소리에 반가움과 더불어 피가 식는 듯한 배신감을 동시에 느꼈지만, 그가 외부에 보인 감정은 기쁨이었다.
“여신님.”
[ 보아하니, 그레나스라는 곳에 가고 싶은 거 같은데. 제 생각이 맞나요? ]
‘보고 있었군.’
루페르트는 감정을 추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그레나스의 사정을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아야 원만한 대응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타인의 입을 거쳐서 전하는 사실은 저마다의 주관이 묻어 있으니까요.”
[ 흐음. 그렇군요. 좋아요. ]
소라고둥이 다시 한번 몸을 흔들었다.
[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엔 제가 당신한테 너무했던 것 같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당신만큼 변치 않고 저를 생각해 주는 인간도 없는데. ]
“…….”
[ 혹시 저한테 실망하거나, 나쁜 마음을 먹은 건 아니겠죠? 루페르트 가우저. ]
“전혀 아닙니다. 저보다 그분이 여신님을 먼저 알았고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을 여신님과 보냈다는 것 또한 압니다. 거기다가 과거의 그분의 굽히지 않는 신념을 보니 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 말이 많아졌네요. 루페르트 가우저. ]
여신의 목소리에 가벼운 차가움이 묻어 나왔다.
[ 예전과는 달라요. 예전엔 좀 더 단순하지만 많은 감정이 담긴 말들을 했었는데. ]
“……황제라는 자리가 제게 다변을 준 거 같습니다.”
[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아무튼 저도 당신에게 잘못한 게 있으니 선물 하나를 주려고 해요. ]
“선물, 말입니까?”
이번에는 루페르트도 모처럼 꾸미지 않은 기대심을 드러냈다.
여신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녀의 아티팩트는 하나 같이 이 세상의 상식과 섭리를 아득히 초월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선물한 안개 가면만 해도 그렇다.
단지 가면 하나를 뒤집어쓴 것만으로 모든 인간의 이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요정이나 마녀에게 받은 만능의 마술 도구라고 할까.
그런 걸 하나 더 받을 수 있으니 아무리 강한 반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루페르트는 기꺼이 고개를 넙죽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선물입니까?”
“아, 이건 예전의 폐하도 즐겨 쓰셨던 아티팩트랍니다.”
소라고둥이 이번에는 직접 소리를 내어 답했다.
“철혈대제께서 말입니까?”
“네. 자, 그럼 손바닥을 펴 보세요.”
루페르트는 시킨 대로 했다.
곧 수많은 빛의 입자가 그의 손바닥 위로 모여들더니 이내 작은 인형의 현상을 갖추었다.
“이건?”
루페르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야. 이건.’
문어다.
인형도 아니고 그냥 살아 있는 문어다.
끈적거리고 미끌거리는 감촉과 빨판과 촉수, 시큼한 바다의 악취가 나는.
동시에 빛나는 문자가 루페르트 눈앞에 떠올랐다.
“……문어 아닙니까?”
“문어라니요. 당치도 않아요. 그는 가장 귀중한 아티팩트 중 하나 흉내 내는 자랍니다.”
문어가 여신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지 촉수를 일제히 흔들거렸다.
“…….”
“촉수 하나를 당신의 얼굴에 갖다 대 보세요.”
“이, 이 녀석의 촉수를 말입니까?”
“네.”
죽어도 싫다.
제국인은 문어를 먹지 않는다.
대구와 청어를 제외한 생선 자체를 거의 먹지 않고, 비늘이 없거나 생선 모습조차 아닌 해산물들은 악마의 산물이라고 두려워한다.
루페르트로 제국인 중 하나로 당연히 문어 같은 건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거부감이 있다.
“어서요.”
하지만 여신의 명이다.
게다가 이 팔을 휘감고 있는 문어는 저렇게 보여도 아티팩트란다.
‘으억.’
루페르트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문어의 촉수를 들어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댔다.
그 순간 촉수에 가려져 있던 문어의 두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름 끼치게도 그 괴물은 인간의 눈을 하고 있었다.
“흐음.”
문어가 말했다.
루페르트의 얼굴을 역겨운 촉수로 뱀처럼 쓰다듬으면서.
곧 문어가 대가리를 돌려 바닥에 시커먼 먹물을 쏟아 냈다.
기이하게도 그 먹물을 쏟아 냄과 동시에 문어는 마치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말라비틀어지더니 이내 모습을 감췄고 대신 바닥에 뿌려진 시커먼 먹물 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솟아 나왔다.
곧 모습을 갖춘 시커먼 형체를 보고 루페르트는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인간의 형체였다.
곧 검은색이 사라지자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은 다름 아닌 루페르트 그 자신이었다.
똑같은 얼굴을 가진 자가 루페르트를 향해, 자신이 지을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도, 도펠갱거?!”
“그런 불길한 건 아니랍니다.”
소라고둥이 가볍게 움직였다.
“인사하세요. 당신을 대신해 당신을 연기할 새로운 벗을 향해.”
또 다른 루페르트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루페르트 가우저 님.”
루페르트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또 다른 자신을 보다 가슴에 건 소라고둥을 매만졌다.
비슷한 수준이 아니다.
자신을 향해 헤실헤실 웃고 있는 저자는 완벽한 루페르트 그 자체다.
옷차림은 물론 얼굴, 작은 미소의 주름 하나까지.
‘이, 이건 대체 뭐냐? 어떻게 저 문어가……?’
곧 여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음속에 직접적으로 울려 퍼졌다.
[ 바깥에 나가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
“여, 여신님.”
[ 걱정 마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이 문어는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며 셀 수 없는 인간과 인간 비슷한 것들을 상대해 왔답니다. 당신의 자리를 대체할 순 없겠지만, 잠시는 대신할 수 있겠죠? ]
‘방금, 문어라고 하셨지?’
루페르트는 왠지 뺀질거리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여전히 믿기지 않은 눈으로 응시했다.
“다, 당신이 내 역할을 한다고?”
“뭘 그리 딱딱하게 말해?”
문어였던 무언가는 루페르트와 달리 대단히 능글맞은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다.
그가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걸 보며 루페르트는 못마땅한 눈으로 보며 넌지시 물었다.
“뭐라고 호명하면 되지……?”
루페르트의 물음에 또 다른 루페르트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시원하게 답했다.
“문어라고 불러.”
역시 문어였다.
[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가 친애하는 루페르트 가우저를 위해 준비한 비장의 아티팩트 “흉내 내는 자”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