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36. 대경기장 (4)
삼십 대 일의 절망적인 전장을 피하려고 노예들을 죽였지만, 돌아온 건 이십구 대 일의 또 다른 절망이었다.
무수한 투창이 루페르트에게 날아들었다.
슉- 슉-
한 대만 맞아도 죽음에 이르는 투창이 화살 비처럼 루페르트에게 내리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루페르트는 그 무수한 투창의 빗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
길이 보인다.
저 속으로 뚫고 가야 할 길이.
루페르트는 민첩하게 옆으로 구르고 질주하면서 날아오는 투창을 전부 피해 버렸다.
툭! 투두두둑!
그가 있던 자리에서 열 개에 달하는 투창이 박혔다.
나머지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거나 혹은 지면에 박혔다.
어떤 놈은 자기 발을 찌르기도 했다.
“아아아아악!!!”
관중들의 폭소가 울리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다른 창을 뽑아 들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
순간 드는 의문 하나.
전부 다 죽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투창은 이제 네 개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싸워야 한다.
투창이 하나밖에 없더라도 어떻게든 싸워서 이 상황을 연장해야 한다.
다시는 그 창에 맞고 싶지 않다.
루페르트는 주저 없이 또 다른 노예를 향해 창을 던졌다.
이번엔 멀다.
앞에서 경계하는 놈 대신, 뒤편에서 여유를 가지고 보던 노예를 노렸다.
창은 정확히 무방비한 노예의 심장을 관통했다.
“커억!”
와아아아아-!!
“주, 죽여!”
“이 새끼가!”
노예들이 재차 창을 던졌다.
루페르트는 이번에도 모든 창을 피해 냈다.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는 루페르트도 모른다.
그냥 뭐랄까.
축구처럼 했을 뿐이다.
돌이켜 보니 루페르트는 축구를 잘했다.
축구라는 운동은 단순히 힘만 세고 날래서 되는 일이 아니다.
힘은 물론이고 유연함과 체력, 세련된 기술과 육박해 오는 상대 전체를 두루두루 봐야 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저 바다 건너, 레벤호스트의 장인의 나라이기도 한 앙쥬 왕국에서는 축구를 병사들의 훈련을 겸한 놀이로 이용한다고 한다.
제국군도 훈련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축구를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달리 말하면 축구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전투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정점을 찍었다는 것이 당시엔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자신에겐 자기도 모르는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하지만 그 재능이라는 것도 결국은 현실에 발목이 잡히는 법이다.
철컹!
신들린 듯 날아오는 투창을 피하던 루페르트의 몸이 멈췄다.
발목에 묶은 사슬이 한계에 걸린 것이다.
‘이런!’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루페르트가 떠올린 건 한 마리 고슴도치였다.
푸푸푸푹!
셀 수 없는 투창이 루페르트의 몸에 박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진 루페르트의 몸을 향해 또 한 차례의 창들이 분노를 담아 날아왔다.
한 마리 고슴도치가 된 채 황제는 또다시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 * *
“…….”
이제 몇 번째 회귀인지 알 수 없다.
기이하게도 루페르트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떨지 않는 걸 발견했다.
뭔가 차분했다.
차분하고 조용하고 안온하기까지 했다.
여전히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지옥과 다를 바 없지만 루페르트의 마음은 홀가분하기만 했다.
뭐랄까.
미련이 없어진 느낌이다.
몸에 박힌 수십 개의 살의가 머릿속을 지탱하고 있던 무언가를 끊어 버렸다고 해야 할까.
이 끔찍한 세계에 던져졌을 때만 해도 루페르트는 여신에 대한 애증, 자신을 도울 거라는 기대와 여신에 대한 원망을 동시에 가졌지만, 여러 개의 창을 몸에 받아들인 이후에는 그런 고민도 방황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중요한 건 하나다.
이 상황을 빠져나가는 것.
오늘을 살아나가는 것이다.
“내 이름이 뭐였지?”
루페르트는 옆에 있던 비달에게 물었다.
비달이 뭐라고 말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루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여신은 있다.
지켜보고 있다.
지켜보고 있기에 현재 자신이 머물고 있는, 이 놀랄 정도의 운동력을 가진 육체 주인의 이름을 안 들리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좋다.
여신이 보고 있다면.
“고슴도치라고 아나?”
육체와 정신은 둘이 아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대부분 맞는 말이다.
몸이 떨림이 멈추자 루페르트는 자기도 놀랄 정도의 침착함과 사려 깊음을 느끼며 주위를 살폈다.
자신을 포함해 총 30명의 노예들.
이들은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니다.
하나의 퍼즐이다.
이 퍼즐을 어떻게 움직여서 어떻게 배치해야 오늘의 전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보았다.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티그리트를 불러내는 것.
그건 살기 어려운 방법이다.
두 번째는 노예들끼리 살육을 펼쳐 경기를 끝내는 것.
이 또한 쉽지 않다.
표적이 되는 순간, 루페르트는 협공을 받아 죽게 될 터이니.
하지만 루페르트가 볼 때는 후자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레벤호스트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와 벌인 수많은 협잡질의 경험이 있어서일까.
루페르트는 더럽고 냄새나는 노예들만 모인 이 상황이 정치의 또 다른 연장으로 느껴졌다.
‘비달 말대로 절반이 살아남고 끝나는 경기라면 아군은 필요하다.’
누구를 아군으로 할 것인가.
한 명은 정해졌다.
“비달.”
“어, 그래. 누로스인.”
“누로스? 그건 뭐지?”
“네 고향이라며?”
“에피크로티아도, 사니움도 아니야?”
“뭔 소리야. 어제만 해도 누로스 술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누로스 여자가 제일 예쁘다며?”
“……그렇군.”
루페르트는 조용히 비달에게 자신의 계책을 말했다.
“뭐? 힘을 합치자고?”
“고슴도치라는 경기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고슴도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투창 하나는 자신이 있거든.”
“레슬링과 원반던지기도 잘한다며? 뭐, 제일 잘하는 건 여자를 기쁘게 하는 기술이었나.”
“……그건 잠시 잊어 줘.”
루페르트는 속으로 이 육체의 전 주인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궁금해했다.
루페르트처럼 다정다감하고 조용히 자신의 취미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리라.
그의 심증은 곧 나타난 감독관에 의해 완벽히 굳어졌다.
짝-!
감독관이 루페르트의 뺨을 때렸다.
여기까지는 전과 비슷한 흐름.
루페르트는 하나의 질문을 추가했다.
“왜 제가 맞는 거죠?”
“뭐?!”
“아니, 감독관님.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이 새끼가! 네놈이 밤새 노래를 처불러 대서 이 방의 노예는 물론이고, 다른 방의 검투사도 잠을 못 잤다고 하잖아!”
“마, 맞을 짓 했군요.”
짝-!
“한 대 더 맞아!”
매를 하나 더 벌긴 했지만, 루페르트의 입가에 걸린 건 희미한 미소였다.
‘대체 어떤 놈인가. 내가 움직이는 이놈은.’
거울이 있다면 보고 싶다.
이 육신의 얼굴을.
행실은 경박하지만 누구보다 잘 단련되고 잘 움직여 주는 육체를 만들어 준, 이 사람의 얼굴을 말이다.
“노예들은 일렬로 서라. 곧 경기를 시작한다.”
회귀의 복도를 연상케 하는 복도에 다시금 섰다.
저 멀리 빛의 영역을 보며 루페르트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더 이상의 떨림도 두려움도 미련도 없다.
앞만 보는 짐승이 두려움을 모르는 것처럼, 적어도 오늘은 그런 한 마리 짐승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주르륵-
오줌 줄기가 실개천처럼 흘러내린다.
그때마다 피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같은 언어를 쓰는 자의 오줌을 맨발로 밟으며, 루페르트는 비달에게 미소 지었다.
“겁쟁이의 오줌은 용기 있는 자의 행운을 준다고 했나?”
이에 비달이 웃으며 답했다.
“네가 한 말이잖아.”
이제 대경기장이 두 사내 앞에 펼쳐졌다.
“비달.”
“응.”
“투창에 경험이 있나?”
“우리 고향에서는 투창으로 사냥을 했지. 사자, 코끼리는 물론이고 바실리스크와 코카토리스조차 투창으로 잡았지.”
“귀여운 동물이 많이 사는 곳이군.”
“귀엽지는 않던데.”
“나는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지. 나중에 돌아가면 황궁에 있는 동물원을 돌봐야겠어.”
“황궁? 무슨 소리 하는 거지? 어제부터 이상하더니 드디어 미쳐 버린 건가?”
감독관들이 발목 족쇄의 고리에 쇠사슬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루페르트는 룸 숫자로 13이라는 숫자가 쓰인 자신의 족쇄를 물끄러미 보다 비달에게 말했다.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만한 놈이 있을까?”
“우리 편?”
“고슴도치를 한다면 편을 먹는 게 좋지 않겠어?”
“일단 너는 아무도 안 좋아해.”
비달이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 그렇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이곳의 루페르트가 만인의 원망을 산 건 확실하다.
지난 전장에서 나머지 모든 노예가 일치단결해 루페르트를 죽이려 든 것도 어떻게 보면 루페르트의 실력 탓만은 아니리라.
‘쉽지 않군. 이건.’
어째서인지 루페르트는 지금 상황에서 강한 흥미를 느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회귀라는 권능. 아니 돌아갈 수 있다는 권능의 메리트를.
지나칠 정도로 많은 제약과 정치적인 문제, 여신의 어려움으로 그 권능의 사용을 주저했다.
사실, 정치라는 게 돌린다고 해서 획기적인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찰나에 운명을 걸고 덤비는 상황이라면?
회귀의 힘을 통해 상황을 만들어가고 재구성하는 맛이 있는 게 아닐까?
‘내 편은 비달뿐인가. 둘로는 어려워. 최소한 다섯은 있어야 한다. 내 실력을 감안하면.’
다섯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안 그래도 미움받는 천덕꾸러기인 현재의 시점에서.
‘아니.’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방법은 있다.
있을 수밖에 없다.
“어이! 시꺼먼 이빨! 이야기 좀 하자!”
루페르트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가장 놀란 건 비달이었다.
“어이. 너. 고어인의 말을 할 줄 아는 거냐?”
“……기본 소양이지.”
루페르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야만인을 향해 자신의 언어로 당당하게 말했다.
“살고 싶나? 살고 싶으면 나와 함께 싸우지 않겠나?”
“무, 무슨 소리냐?! 이 건방진 곱슬머리!”
“이번 경기가 무슨 경기인지 알고 있지? 살고 싶으면 한 명이라도 같은 편을 만드는 게 좋은 거 아닐까?”
루페르트의 말은 다른 노예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다.
대놓고 편을 짜고 자기들을 죽이자는 소리니.
당장 이쪽에서도 편을 짜고 맞서려 들 것이다.
하지만 현재 루페르트가 말하는 언어는 오직 야만인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
고어인이라 불리는, 새로운 제국을 이룰 부족만이.
주저하는 고어인을 향해 루페르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고어인은 겁쟁이인가?”
도발이다.
“오줌을 지리고 아녀자처럼 벌벌 떨며 바닥에 누워 죽는 게 고어인의 천성인가?”
머리에서 썩은 버터 냄새가 나는 야만인들이 앞다투어 욕을 내뱉었다.
루페르트가 그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 언어는 우리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 우리가 편을 먹는다고 해도 여기 있는 다른 놈들에겐 들리지 않는다는 소리지. 이 유리함을 그냥 허투루 날려 보내는 게 고어인의 수준인가?”
야만인은 야만인이다.
모두가 역정을 낼뿐 누구도 루페르트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한 명이 있다.
“기다려 봐!”
검은 치아가 말했다.
오줌을 지린 그 사내다.
“내 이름은 우줄두스다.”
“우줄두스.”
루페르트가 쾌활하게 웃었다.
“룸어에 더럽히기 전의 이름이구만.”
용기 있는 자는 겁쟁이의 오줌에서 행운을 얻는다고 한다.
그 겁쟁이가 루페르트를 진지한 눈으로 보았다.
“우리를 살려 줄 수 있나?”
이에 황제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명에 따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