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36. 대경기장 (5)
위버하임에서 배움에 매진할 때 루페르트가 가장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과목은 전쟁에 관한 학문이었다.
뭔가 와닿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는 걸 업으로 하는 자들을 움직이고 배치해서 비슷한 인간들을 죽인다는 행위 자체가.
사실 군주가 전쟁과 전술에 관한 기술을 배울 필요는 없다.
군주가 직접 친정(親征)을 하는 일이 드물기도 하거니와, 현재의 전장은 전문적인 직업군인들이 지휘를 맡기 때문이다.
제국이 내전에 휩싸였을 때 골트문트도 직접 자신이 사비로 모집한 군대를 이끌고 친정에 나서긴 했지만, 그 군대를 지휘한 건 당대에 불패의 명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직업군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를 굴려야 할 때다.
여기 삼십 명의 노예가 있다.
이 삼십 명의 노예는 절반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한다.
열다섯 명이 죽기 전까지 살아남는 것이 당면한 목표다.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루페르트는 암암리에 아군을 만들었다.
그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했던 비달, 그리고 고어인.
고어인의 숫자는 총 일곱 명이다.
즉, 루페르트가 즉석에서 만든 파벌의 숫자는 아홉 명.
이들을 이용해 열다섯 명을 빠르게 제거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루페르트가 전술에 아무런 흥미가 없다는 건 본인도 잘 알고 있는 바였으니.
그러나 지금은 머리를 쥐어짜 내야 한다.
‘생각하자. 루페르트 가우저.’
곧 루페르트는 축구를 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 바로 그거야.’
축구에도 전술이란 게 있다.
대부분은 부정하지만 루페르트 정도의 가장 우수한 선수는 축구라는 놀이가 육체적인 능력과 발재간만큼이나 다른 선수들을 잘 조련하고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축구와는 다르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천하의 루페르트도 공을 뺏길 때가 있다.
여러 방향에서 에워싸였을 경우다.
‘방면을 하나씩만 줄인다면, 좀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겠지.’
루페르트가 우줄두스에게 말했다.
“우리 뒤에 있는 놈들부터 제거해 줄 수 있나?”
우줄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겨우 두 놈이니.”
“편을 짜더라도 편을 짠 것처럼 보이게 하면 안 돼.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가 합칠 수도 있어.”
기이하게도 루페르트는 이 상황이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곧 그는 입가에 쓴웃음이 절로 머금어지는 걸 느꼈다.
‘나의 제국과 같군.’
제국 내에서 루페르트의 세력은 어떤 선제후나 군부도 강하다.
국력으로 따지자면 일대일로 감히 슈발츠마인에게 덤빌 수 있는 자는 없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감히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던 건 제국 성인이라는 상식을 넘어선 괴물이 뒤에 있어서였지, 그런 게 없었다면 그 음침한 사내는 조용히 자신의 영지를 관리하며 무탈하게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그 루페르트가 제국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건 혼자의 힘이 강할지언정 모두를 휘어잡기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다.
아홉 명의 우군을 확보했다.
나머지 스물한 명은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아홉 명이 한통속으로 다른 경쟁자를 죽이기 시작한다면 그들도 곧 힘을 합칠 것이다.
그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지시를 내리면서 루페르트는 자신의 제국을 떠올리고 만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팀엔 제국인의 선조 되는 이들이 있다.
그 대목에서 루페르트는 자신과 제국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연결을 희미하게 느꼈다.
‘제국이 나의 운명일지도.’
혹 이 지옥에서 나와 현실로 돌아가 내전을 방지하고 제국이 무사히 천년기를 넘겨 안정된 반석 위에 놓였을 때 그때 루페르트는 무엇을 할 것인가.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 기묘한 전장 속에서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 떠오른다.
제국을 구원한 이후의 자신의 모습이.
‘결혼도 할 수 없고 아이도 가질 수 없다. 영원히 일만 하다 죽는 황제가 되란 말인가.’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순결제는 빨리 죽었다.
어쩌면 자신이 택한 고독과 단절의 비참함을 알고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이. 누로스.”
비달의 지적인 목소리가 루페르트의 상념을 깨뜨렸다.
“시작한다. 뭘 멍하니 있는 거야?”
“미안. 나도 긴장을 한 모양이야.”
“고어인들이 뒤편의 적을 죽여 주기로 했어. 다음은 어떻게 할까?”
“일단은 수비하다가 고어인들이 뒤에 있는 두 놈을 처리해 주면 정면의 적을 도모해 보자. 한 번에 한 녀석을 죽일 수 있겠어?”
“견제만 안 받으면.”
루페르트는 비달의 검고 탄탄한 근육질의 팔을 보았다.
‘이 팔로 날 꿰뚫은 건가.’
점잖고 이지적인 이미지지만 루페르트는 이 비달이라는 자가 화가 나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가볍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다.
투창 솜씨도, 힘도 상당하다.
사람의 몸을 꿰뚫는 투창을 던지는 걸 보면 말이다.
한편, 경기장 중앙에선 번쩍거리는 갑주를 걸친 군인들이 경기를 주최한 물주의 이름이 적힌 휘장을 들고 질서정연하게 사슬에 묶인 노예들 주변을 행진했다.
[ 집정관 포르피리우스 ]
룸의 역사에 의하면 집정관은 아무에게나 주는 자리가 아니다.
한 시대에 단 두 명만이 집정관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룸 제국 후반기엔 집정관이라는 명칭은, 부르봉 왕이 아랫사람에게 뿌리다시피 살포하는 남작 작위나 장자 상속제가 확립되지 않아 공작령 하나가 아들의 숫자만큼이나 자체 분열되는 제국의 작위만큼이나 흔하게 남발됐다.
이 집정관도 수십 명에 달하는 집정관 중 하나일 것이다.
‘망해가는 나라는 이유가 있겠지.’
긴장 속에서 긴 나팔이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죽고 죽여라! 어서!”
감독관들이 날카로운 채찍 소리를 내며 살인을 독려했다.
루페르트는 투창을 든 채 좌우를 살폈다.
루페르트와 비달의 자리 운은 좋았다.
가장자리다.
3면에 적이 있지만 정면의 적은 사방의 적을 상대해야 하기에 이쪽을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루페르트의 양 측면엔 각각 두 명의 노예들이 있는데 거리가 꽤 가깝다.
이들을 제거해야 저 중앙 쪽에 있는 고어인들을 지원할 수 있다.
문제는 협공의 우려다.
양 측면의 노예들이 우연히 마음이 맞아 루페르트와 비달을 공격하면 이쪽은 꽤 난감해진다.
최초엔 수비에 힘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빨리 죽이라고!”
다행스럽게도 최초 국면에서는 모두가 얼어붙은 듯이 긴장했다.
이 긴장은 티그리트라는 재앙을 부르는 단초가 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루페르트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내가 먼저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주목받는 건 피해야 한다.’
루페르트의 시선은 정면 너머에 있는 고어인 패거리를 주시했다.
그들은 제국처럼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경기장의 거의 모든 노예를 안정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위치지만, 역으로 사방팔방에서 협공을 받을 수도 있는 위치이기도 하다.
이들이 주목을 받아야 한다.
손을 잡았다고 하지만, 이들의 안위를 챙겨 줄 정도로 넉넉한 상황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이들이 희생을 해 주어야 한다.
“우줄두스!”
루페르트가 자신에게 행운을 줄 사내의 이름을 외쳤다.
“뭐 하는 거야! 고어인은 다 겁쟁인가?!”
제국의 언어를 말하며.
이 당시에는 확실히 야만의 언어다.
사슬에 묶인 노예들조차 경멸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노예 중에 어리석은 자만 있는 건 아니다.
“너희들 아까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
키가 작고 갈색 곱슬머리를 짧게 깎고 몸에 아무런 문신도 표식도 없는 자가 이쪽을 노려보며 볼멘소리를 해 댔다.
‘룸인인가.’
주변에서 야유를 내는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김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루페르트의 눈엔 관중 하나를 잡아다 옷만 벗겨 놓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룸인의 얼굴이 씰룩거리며 다음 말을 내뱉으려 한다.
‘막아야 한다.’
순간적으로 루페르트는 저 사내가 다음 말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투창을 들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움직임으로.
마치 투창이 몸의 일부분이었던 것처럼 익숙하다.
그걸 천천히 겨누어 허리를 뒤로 젖히고 앞으로 도움 발을 내밀며 어깨가 찢어질 정도로 강하게 던졌다.
슈육-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간 투창은 미려한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더니 그대로 말을 내뱉으려는 룸인의 목에 박혔다.
“꺼어어어억!!!”
사내는 목을 움켜쥔 채 눈을 부릅뜨고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와아--!!
미약한 환호가 관중석에서 터져 나왔다.
노예들의 시선이 일제히 루페르트를 향했다.
‘어쩔 수 없다. 저놈을 말하게 내버려 두었다간 계획 자체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으니.’
이제는 고어인들이 해 줘야 한다.
루페르트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차가운 시선을 감내하며 우줄두스 일행의 행동을 살폈다.
실망스러운 모습이 루페르트의 눈에 들어왔다.
우물쭈물하고 있다.
그토록 전사다운 표식으로 빈약한 알몸뚱이를 치장하고 있음에도.
“고어인!”
결국 루페르트가 고함을 질렀다.
“겨우 이 정도냐? 숲의 버러지들아.”
짧은 외침.
그러나 그 외침은 고어인들의 방황을 날려 버렸다.
우줄두스는 여전히 겁먹은 눈치지만 그의 동료들은 그렇지 않았다.
고어인 하나가 약속을 상기하고 투창을 꺼내 루페르트의 양 측면을 위협하는 노예를 향해 창을 던졌다.
루페르트 하나만을 주시하고, 다른 노예들도 그러할 거라고 기대했던 갈색 피부의 노예 눈앞으로 투창이 지나갔다.
“헉!”
그가 뒤늦게 고개를 돌려 고어인 패거리를 봤을 땐 이미 늦었다.
슉- 슉-
여러 개의 투창이 그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투창 두 개가 꽂힌 채 사내는 고꾸라졌고, 그 옆에 있던 노예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 측면의 위협 중 하나가 사라졌다.
“멋지군!”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뜨거운 칭찬을 내지르며 자신 몫의 투창을 들었다.
겁에 질린 두 노예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한 놈은 투창을 든 채 싸울 뜻을 내비치지만, 다른 놈은 아무것도 들지 않고 대신 자세를 낮춘 채 호시탐탐 피하려고만 시도한다.
“비달.”
루페르트가 말했다.
“왼쪽을 맡아 줘.”
“오른쪽 놈은 피할 생각만 하는 거 같은데?”
이에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나에게서 달아날 순 없지.”
두 개의 창이 허공을 갈랐다.
푹! 푹!
그 창은 정확히 원하는 목적의 몸통에 박혔다.
어째서인지 루페르트는 사람을 죽일 때 몸이 찌르르 울리는 전율과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이고 기뻐하다니.’
이 육체의 성능은 루페르트 본인보다 곱절은 뛰어나다.
하지만 이 육체에 깃들었던 영혼은 그다지 바른 모양새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죽일 때마다 찾아드는 흥분 중에 성적인 흥분조차 뒤섞인 걸 보면 말이다.
터무니없게도 루페르트는 다리 사이에서 뭔가가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변태 아닌가. 이놈.’
한번 얼굴을 보고 싶긴 하다.
실제로 그 얼굴을 볼 수 있을 거 같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는 걸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