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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49화 (149/225)

149화 36. 대경기장 (3)

‘꿈에서마저 회귀를 한단 말인가.’

루페르트의 온몸이 위태로울 정도로 떨렸다.

“어이. 괜찮나?”

주변에서 걱정을 할 정도로.

아까 죽임당했던 고어인이 시커먼 치아를 드러내며 비슷한 악취가 나는 동족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 저 미네아 놈을 봐. 뭔 원반던지기? 하찮은 장난질 챔피언이라고 하더니만 역시 이런 전사들의 경기장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군. 어제는 무슨 깡으로 그렇게 노래를 불러 댄 거지?”

루페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어떻게 해야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거지?’

치열한 고민 속에서 감독관이 나타났다.

짝!

어김없이 이번에도 그는 루페르트의 뺨을 때렸다.

“넌 오늘 죽는다.”

살벌한 협박을 곁들이면서.

“…….”

옆에 있던 비달이 물었다.

“어이. 괜찮아?”

“…….”

루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다.

투창을 맞기 전만 해도 비달은 루페르트에게 이 낯선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려 주는 둘도 없는 소중한 조언자였는데, 창을 맞고 회귀한 지금은 귀찮은 소품 그 이상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어이.”

“말 걸지 말라고!”

루페르트가 고함을 질렀다.

자신도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화를 낼 이유는 충분한 것 같다.

몸통을 꿰뚫은 투창의 서늘한 감각은 지금도 발가락을 저릿하게 할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 있으니까.

“…….”

비달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뭐라도 한마디 할 것 같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감독관들이 노예들에게 바깥으로 나오라고 호출했다.

루페르트는 순순히 그들의 명을 따라 다시금 경기장에 섰다.

오줌이 흘러내리는 게 보인다.

큰소리치던 고어인이 다시금 오줌을 지린 모양.

루페르트는 실개천처럼 경사를 타고 흘러내리는 오줌을 피하며 경기장 위에 섰다.

익숙한 장엄함, 익숙한 수많음.

대경기장의 대지가 황제의 눈앞에 펼쳐졌다.

‘대체 나는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지금 나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먼저 느껴진 건 여신에 대한 증오였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배신을 한 건 티그리트 아닌가? 왜 나를 탓하는 거지? 왜 내가, 내가 그런 배신자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지?’

수많은 분노와 증오가 루페르트의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루페르트는 병사들이 자신의 발목에 사슬을 묶고 투창을 담은 통을 갖다 놓아도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사회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경기 시작을 알릴 때였다.

집정관 포르필리우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

여신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루페르트가 알고 싶은 건 그것뿐이다.

“자! 그럼 경기를 시작합니다!”

루페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티그리트의 등장을 기다렸다.

그를 봐야 뭔가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푹!

티그리트가 나타나기도 전에 루페르트는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온 날카로운 것을 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무시당한 흑인이 매몰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다 이내 다른 투창을 집어 들고 있었다.

‘이, 이런……!!’

또 다른 격통이 루페르트를 덮쳤고, 그 열병 속에서 루페르트는 다시금 의식을 잃었다.

* * *

“…….”

다시 사슬에 묶여 있다.

‘벌써 세 번째인가.’

온몸이 아까보다 더 떨리고 있다.

창에 꿰뚫린 격통에 무슨 차이가 있겠냐마는, 적어도 루페르트가 느끼기엔 비달이 던진 창이 더 많은 고통을 주었던 것 같다.

떨어지는 각도라고 할까, 투창이 꿰뚫은 부위가 신경이 더 많은 부위를 지나간 거 같으니.

“괜찮나?”

비달이 물었을 때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공포를 담아 몸을 움츠렸다.

‘이, 인간. 이 인간이 내게 창을 던졌어…….’

기묘한 일이다.

첫 번째 경기에서는 루페르트의 둘도 없는 조력자였고 결코 그에게 창을 던질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인물이, 두 번째 경기에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루페르트의 등에 창을 던졌다.

이유는 명확하다.

두 번째 경기 전에 루페르트가 그에게 고함을 지르고 예의 없이 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나 사람 등에 저토록 쉽게 창을 던진다는 것이, 어쩌면 이 룸 제국 시대의 광기가 모든 이의 마음에 스며든 탓인지도 모른다.

루페르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격통의 잔여감을 느끼며, 비달에게 간신히 말했다.

“나, 나는 괜찮아.”

말조심해야 한다.

그가 회귀의 소품처럼 여겨진다고 해서 하찮게 대접해서는 안 된다.

이 세계에 오기 전에 루페르트는 황제였지만, 여기서는 일개 노예다.

서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비달이지?”

그의 이름을 확인한 건 단지 이름만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이 비달이, 첫 번째 시점의 그 친절한 조언자인지 알고 싶어서다.

“알면서 왜 묻는 거냐?”

“그렇지.”

가슴이 뛴다.

아니, 터질 정도로 고동치고 있다.

고통이란 그런 것이다.

채찍이 짐승을 움직이게 하는 것과 같다.

고통만큼 단순하고 명확한 울림이 어디 있을까.

회귀 전만 해도 루페르트는 폐부를 꿰뚫은 창날이 안겨다 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세 번은 안 돼. 또 그 창에 맞을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여신이 당장 여기서 그를 꺼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고통이야말로 리프니에가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신님.’

실망할 기운도 없다.

원망할 여력조차 없다.

중요한 건 여기서 어떻게든, 당장 다가올 고통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 창에 꿰뚫린다면, 그것이 내장을 찢어발기고 몸 안으로 파고드는 감각을 느낀다면 솔직하게 이제는 루페르트라고 해도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의 단순한 질문이 루페르트의 의식에 경종을 울렸다.

기다리는 건 티그리트다.

그 인간 같지 않은 괴물이 기다리고 있다.

그 괴물을 상대로 이긴다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인간으로 맨손으로 곰을 이길 수 있을까?

사자나 늑대를 이길 수 있을까?

맹견조차 어려울 것이다.

짐승을 상대해 본 자는 알 수 있다.

도구 없는 인간은 조금 더 똑똑하고 느리고 약한 한 마리 양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슴도치라는 경기에 대해 아나?”

루페르트가 비달에게 물었다.

비달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지. 그건. 허나 끔찍한 방식이고 흥행주도 좋아하지 않아.”

“흥행주?”

“우리의 주인이자 경기를 기획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지.”

“왜 고슴도치를 싫어한다는 거지?”

“우리도 재산이거든. 고슴도치는 특히 재산을 많이 잃는 경기지. 물주가 흥행주에게 어지간한 특권과 금액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좀처럼 하려 들지 않지. 하지만.”

비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갓 흥행주가 산 노예들 아닌가?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값어치가 싸.”

“그렇다는 이야기는?”

“마음대로 던질 수 있다는 소리겠지.”

“그 고슴도치는 전부 다 죽여야 끝이 나나?”

“아니?”

비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절반 정도가 남았을 때는 종료를 선언해.”

“그렇군.”

루페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에 생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 창에 꿰뚫리지 않고 살 수가 있는 방법이 있다. 아니, 티그리트를 만나지 않을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이란, 멀리서 보면 비참한 굴종이었다.

푹!

루페르트는 주저 없이 자신의 조언자인 비달에게 창을 던졌다.

몸통이 꿰뚫린 머나먼 황무지에서 온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루페르트를 노려보며 왜냐고 물으려고 하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

어쩔 수가 없다.

그가 가장 가까이 있다.

그가 배신을 할 수도 있다.

사실 배신이라고 하기도 뭐 하다.

여기 서 있는 노예들은 전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이미 한 번 루페르트에게 창을 던진 자의 선의를 믿고 마냥 믿었다고 다시 등 뒤에서 창을 맞는 우를 범할 순 없다.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다.’

순식간에 한 명을 죽인 루페르트는 또 다른 창을 집어 들고 두 번째로 가까이 있는 사내를 향해 던졌다.

기이하게도 루페르트는 투창을 던져 본 적이 처음이었지만 투창을 쥐는 법과 던지는 법,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일격에 죽일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솜씨 좋은 어부가 작살로 물고기를 한 번에 찍어 올리는 것처럼 루페르트의 작살은 그가 알지 못하는 이국적인 노예의 몸통을 꿰뚫었다.

와아아아아-!

순식간에 두 명을 죽인 루페르트를 향해 관중들이 환호를 보내왔다.

노예들의 시선이 루페르트를 향했다.

‘어쩔 거냐.’

그들의 냉담한, 차가운 시선을 보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전의를 다졌다.

‘여기서 안 싸우면 그놈이 나타난단 말이다. 그놈이…….’

떠올리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는 그 괴물.

티그리트.

그를 이 전장에 소환하지 않는 방법은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즐거움은 피와 죽음이다.

티그리트가 나타나기 전에 경기장의 절반을 죽인다면, 적어도 오늘은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프니에도 이 끔찍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그다음에 생각할 문제다.

그의 잔혹한 여신은 적어도 이 전장에선 그녀의 유일한 사도가 숱한 고통을 받아도 무시할 기세니 말이다.

슉--

루페르트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창을 던졌다.

그 창을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 정확히 노예의 목에 적중했다.

“끄르르르…….”

공교롭게도 방금 죽인 자는 루페르트와 같은 언어를 쓰는 고어인이다.

경기장을 나설 때마다 마치 매미처럼 오줌을 지리던.

와아아아아-!!

또 다른 환호가 루페르트를 감쌌다.

“저 에피크로티아 놈! 제법인데?”

“사니움 놈이야. 뭐 안다고 에피크로티아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무식한 놈이.”

“이 대머리가?!”

그런데 관중석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아까 싸우던 그 관중들이다.

루페르트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분명히 상황이 달라지고 판 자체가 바뀌는 데 큰 틀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별다른 영향이 없다는걸.

무수한 회귀를 경험한 루페르트에게 이 현상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 몇 가지 생각할 거리마저 남겼다.

‘싸울 놈들은 뭘 어떻게 해도 싸운다는 것인가.’

싸움을 말릴 방법은 있다.

아예 경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두 관중 중 하나를 여기에 못 오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의미가 있는 행동일까?

싸움박질 한 관중 중 하나가 남는다고 해도 그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시비를 건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이.

그것만으로 이 변화무쌍한 세계 전체를 통제하려 든다는 것이.

이 루페르트의 짧은 깨달음은 또 다른 형태로 루페르트에게 교훈을 주려 한다.

“저 새끼. 미네아에서 날리던 놈이야.”

“미네아 경기장의 챔피언이라더니.”

“거기서는 창과 원반을 던진다더니, 어쩌면 이 경기 자체가 흥행주가 놈을 위해 기획한 경기가 아닐까?”

“맞아. 투창 전문가이니 우리를 전부 죽이려고 판을 깔아 준 거야.”

“어제 밤새 노래를 부르며 우리를 괴롭혀 대더니.”

살아남은 노예들이 이제 루페르트와 똑같은 생의 의지를 눈동자에 빛내며 눈빛을 교환했다.

“…….”

루페르트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했다.

살아남은 스물여섯 명의 노예가 이제 루페르트를 적으로 인식한다.

“회귀의 덫.”

루페르트는 조용히 한마디를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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