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35. 재회 (3)
익명으로 쓴 한 장의 편지가 황제에게 전달됐다.
통상 익명으로 쓴 편지가 황제에게 도달되는 일은 없다.
어떤 놈이 보냈는지도 모르는 잡스러운 편지가 감히 제국의 통치자에게 간다는 것 자체가 황궁의 수많은 관리들이 일을 안 한다는 증거니까.
하지만 그 편지는 몇 번의 심각한 논의를 통해 황제에게 전달됐다.
가장 큰 이유는 편지의 화려함 때문이다.
그 편지를 감싼 봉투는 은사(銀絲)로 만들어졌다.
그 봉투의 봉인 또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순금을 끼얹어 그대로 인장을 찍어 만들었다.
단 한 번도 보기 어려운 보석과 장식이 편지의 곳곳을 장식했고, 편지 안에서는 단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이국의 매혹적인 향기가 풍겨 나왔다.
그 편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성을 살 가치가 있었다.
그렇기에 관리들은 그 편지를 보낸 자가 익명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 보낼지 말 것인지 3일 밤낮으로 토론에 토론을 거듭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토론을 거듭하는 사이 한 장의 편지가 더 도착했다.
전보다 더 사치스럽고 고급스럽게 꾸민,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치를 품은 편지가 하나가 아닌 둘이나 온 것이다.
그걸로 우편국의 관리들은 그 편지를 황제에게 보내기로 결의했고, 두 장의 편지를 황제에게 올렸다.
루페르트는 그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고 왜 이제야 보냈냐는 짧은 질타를 한 후 자신의 처소인 미궁으로 돌아갔다.
“…….”
그는 섭리를 벗어난 존재.
한낱 제국 성인인 크리오네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판국에 제국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그 사내를 그렇게 처리하는 건 너무나 안일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가야 한다.
선제의 말대로 단 한 명의 수행원만을 이끌고 가문의 숲으로 가야 한다.
보험은 있다.
여신의 소라고둥이다.
“여신님. 들립니까.”
소라고둥을 쓰다듬으며 루페르트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 그 사람이 드디어 저를 찾는군요. ]
여신은 평소답지 않게 상당히 명랑하면서도 분함이 느껴지는 어조로 이야기했다.
[ 그래요? 그러면 저를 데리고 가세요! 한번 들어 보고 싶네요. 그 사람이 날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할지를. ]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여신님.”
루페르트가 정색했다.
“여신님을 데리고 가시라는 말씀은 이 소라고둥만으로 족하다는 이야기지요?”
[ 아니요. 아래에 있는 제 인간 형상을 데리고 가 달라는 이야긴데요? ]
“여, 여신님. 그건 좀.”
[ 왜요? ]
“아니,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여신님. 제가 볼 때 선제가 여신님에게 실망을 한 게…….”
[ 아. ]
여신의 가벼운 조소가 들려왔다.
[ 겨우 고작, 그런 거 때문에 저에게 실망을 했다? 그 말인가요? ]
“제가 볼 땐 그런 거 같습니다…….”
일련의 대화를 하며 루페르트는 과거의 자신에게 칭찬했다.
‘역시, 그때 사과를 하는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대화는 이어 나갈 수 없었겠지.’
뭐랄까, 그전까지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수직적인 관계였다면 루페르트가 여신에게 감정이 상하고, 그 죄를 참회하는 과정에서 둘의 관계가 조금은 수평적인 관계로 올라온 느낌이 들었다.
지금 대화도, 잦은 상의도 그 과정의 결과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 하여간, 인간들이란 개복치와 비슷하네요. ]
“개복치요? 그게 뭡니까?”
[ 바다에 살아가는 수많은 물고기 중 하나죠. 아주 잘 죽는답니다~ ]
“그, 그런 물고기도 있었군요.”
[ 먼 남쪽 따뜻한 바다에 사는 애들이니까요. 암컷 한 마리가 제국인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알을 낳는데 그중에 살아서 어른이 되는 아이는 하나둘? 어쩌면 하나도 없을 경우도 많고요. ]
“그렇군요.”
[ 아,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니 그립네요. 그 3억 명의 아이들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며 관찰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
루페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처음 아닌가?’
실제로 처음이리라.
그의 여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문득 강한 욕구가 내면에서 솟았다.
알고 싶다.
여신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말이다.
“그,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 아, 전부 다 살렸어요. ]
“3억 마리 전체를 말입니까?”
[ 저한테는 아무런 일이 아니지만, 그 결과 바다의 생물 전체가 죽어 버릴 정도의 위기가 찾아왔답니다. 아니, 제가 살린 개복치들이 해파리를 모조리 먹어 치우니 다른 물고기들이 굶어 죽고, 그 물고기들이 굶어 죽으니 그 물고기를 잡아먹는 다른 물고기들이 굶어 죽고, 악순환의 연속이었죠. ]
여신이 신나서 떠든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왜, 목에 찬 소라고둥이 발랄한 이야기와 함께 끝없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 어쩌긴 어째요. 제가 이름을 붙인 3억 마리의 개복치 중 암수 두 마리만 남겨 놓고 모두 죽였죠. ]
“……아.”
[ 저 균형의 여신이잖아요? ]
소라고둥이 의기양양하게 삐죽거렸다.
“……인정합니다.”
[ 아무튼, 당신이 인간 형태를 원하지 않으니 이 모습 그대로 데려가 주세요. 저도 보고 싶네요. 그 인간이 저에게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지. 당신이 저의 사도인 걸 알면서도 당당하게 부르는 그 용기의 실체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
여신이 의욕을 드러내고 있다.
이보다 더 큰 호재가 어디 있겠는가.
‘여신님이 진심으로 도와준다면, 사실 그 황제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겠지.’
신은 신이다.
여신의 한마디에 루페르트는 그간의 모든 고민이 가볍게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플루트가 있다면 불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축구는 해도 플루트까지는 불지 않는 것이 루페르트가 황제로서 지키는 나름의 선이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수행원을 누구로 할 것인지.
처음 생각한 건 역시 베르크 란이었다.
황제의 챔피언으로 임명한 것도 그 때문.
하지만 이제는 여신님이 옆에서 지켜본다.
티그리트, 선제에 대한 실망과 분노도 루페르트가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티그리트를 만날 때 데리고 갈 수행원으로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선택했다.
명백히 약한 자를 골랐다는 건, 그 자체로 티그리트에 대한 도전과 자신감의 표현이다.
‘당신이 제국을 세우고 제국을 이끌어 나갔다고 하지만, 현재의 황제는 나다.’
당당히 서서 마주하리라.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리라.
혹 그가 용서받지 못할 발언을 한다면 벌 또한 줄 것이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수많은 감정이 내면에서 뒤엉키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선제와의 재회를 준비했다.
때는 제국력 992년. 루페르트가 치세에 오른 지 이제 3년 차를 바라보는 겨울의 일이었다.
* * *
새로운 황제가 찬사를 받으며 치세 초반기를 단단하게 다지고 있을 때 제국의 한구석에서는 죽어 가던 사내가 눈을 떴다.
“루페르트 가우저!!!!”
그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였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인생은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선제후라고 하나 날 때부터 그의 가문은 슈발츠마인이라는 강력한 가문에 눌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쭉정이 가문밖에 되지 않았다.
끝없이 빈발하는 역병과 백성의 저항은 안 그래도 죽어 가는 가문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매년 제국의 밤 행사에 동료 선제후들과 어울릴 때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과 가문을 은근히 괄시하는 돈 많은 친척들을.
그는 그러나 동료 선제후들을 원망할 정도로 근시안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쇠락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려 했다.
그가 발견한 원인은 슈발츠마인 가문이다.
정확히는 제국의 황위를 수백 년간 독점한 탐욕스러운 씨족 집단.
그들이 렌타이어마르크에 길고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제 때가 왔다.
유능한 황제가 쓰러지고, 족보 없는 놈이 황위에 올랐다.
음모를 준비했고, 그 음모가 통하지 않았을 경우에 대비해 동란을 준비했다.
일차적인 목적은 렌타이어마르크의 부흥이지만, 그게 실패할 경우 그는 제국이 멸망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본심은 제국의 멸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대담한 모험은 비참한 패배로 끝났다.
선제후 가문이라는 타이틀은 지켰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렌타이어마르크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걸.
그가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그는 자신이 죽음을 불과 몇 시간밖에 앞두지 않았다는 불유쾌한 사실마저 알게 되었다.
창문 너머에서는 때 이른 웅성거림이 일고 있었다.
“무슨 소란이냐?”
최후의 힘을 쥐어짜 내 선제후가 시종들에게 물었다.
“망자의 목동입니다. 그들이 별궁에 가까이 와서 병사들과 시비를 빚는 모양입니다.”
시종 하나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망자의 목동? 아.”
시체를 일으켜 세워 매장지로 인도하는 인간들의 존재를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도 알고 있다.
루페르트처럼 그 또한 그 불쾌한 집단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것들이 자신의 영지에 있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녀처럼 탄압을 한 건 아니지만, 그는 적어도 그것들이 자신의 눈에 띄지 않게끔 하라고 주변에 명했었다.
그 추악한 자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다니.
여기가 선제후 궁전이 아닌, 변경의 요양지라고 해도 있어서는 안 될 처사다.
즉각 명했다.
두 번 다시 여기서 일자리를 구하고 싶지 않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꺼지라고.
일할 권리를 박탈하겠다는 으름장을 곁들이라고 명했다.
망자의 목동에게 다녀온 병사가 황급히 보고했다.
“아무래도 좋다고 합니다.”
“뭐?”
“그들은 렌타이어마르크를 떠난다고 하더군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자들이 떠난다고?”
“네. 그렇습니다. 노르드마르크로 간다고 하더군요.”
그 짧은 대담에서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깨달은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저런 밑바닥의 인간조차 자신의 땅을 떠난다는 음울한 사실.
그리고 하나는 저 죽음을 찾는 자가 다른 땅으로 향한다는 유쾌한 사실이다.
‘그래, 이제 멸망의 불씨는 노르드마르크로 뻗어 나간다는 건가.’
자신을 은근히 깔보던 게오르크 아르님의 얼굴이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망자의 목동이 일자리를 구했다는 건 그보다 많은 죽음이 있다는 이야기.
덕분에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웃으면서 두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향년 52세.
세 번이나 황제를 배신한 자의 마지막 유언은 “지옥”이라는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지옥을 보지 못했다.
그가 죽어 가는 날, 렌타이어마르크 동쪽 경계엔 한 무리의 기마 집단이 깎아지른 고개 위에 서서 음산한 산야를 염탐했다.
그 우두머리는 반백의 머리에 늑대의 가죽을 걸치고, 뾰족 솟은 동방 제국식 투구를 쓴 잔혹한 호걸이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뭐라고 했나?”
그 사내가 말했다.
그는 공작이며 군주이며 잔인한 마적 떼의 대장이기도 하다.
“이 땅의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여자들을 겁탈하고 사람을 죽이라고?”
비스투라.
드라쿨레아 공국의 공작이자 군주.
그는 이미 두 눈으로 지옥을 본 사람이다.
동방 제국의 군대가 자신의 고향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며 아녀자를 겁탈하고 아이를 말발굽으로 짓밟는 걸 보았다.
거기에서 그가 얻은 교훈은 대단치 않았다.
깨달음도 참회도 후회도 없었다.
비스투라가 그 참상에서 보고 배운 건 그들이 저지른 것과 똑같은 악업의 방식이다.
더 잔인하고 더 참혹한.
“아니, 나는 이 땅에 두 발로 서 있는 것이 없도록 하겠다.”
그와 그의 전사들은 동방 제국보다 더 잘해 낼 자신이 있었다.
올 것이 왔다.
선제의 부름이다.
과거의 황제가 현재의 황제를 부르고 있다.
두 장의 편지 전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 가문의 숲, 게슈나그 연못 앞에서 단 한 명의 수행원만을 거느리고 만나세.
그대의 벗 - 안드리아의 루돌프가 ]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무시할 수도 있다.
아니면 미리 군대를 보내 선제를 잡을 계획을 획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