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35. 재회 (4)
슈발츠마인의 저택은 여러 개가 있지만, 본가라 불리는 곳은 휘핑겐이라는 이름을 가진 숲을 낀 작은 촌락이다.
이 씨족은 숲에서 발원했다.
숲에서 나고 자라 숲의 산물을 먹고 또 그들의 시체를 숲에 돌려주는 삶을 유구한 세대를 이어 오며 거듭했다.
씨족의 운명을 바꾼 건 룸 제국에서 온 정복자지만, 그전에 이미 씨족의 구성원이 지나치게 불어나 휘핑겐 숲 하나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큰 지분을 차지했다.
숲을 나온 씨족은 부족이 되었고 부족은 제국을 만들었다.
씨족을 상징하는 짧은 창과 방패는 그 시절의 무장이다.
“다시 이 지긋지긋한 숲을 보다니 즐거우면서도 슬프네요.”
마를로네와 함께 여행을 다닌 적은 여러 번 있지만, 그녀를 마차 안에 태운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신분이 낮고 호위역인 그녀는 늘 마차의 뒤나 마부석 옆자리에 앉았으니.
하지만 지금은 그녀는 루페르트의 안내인이다.
함께 가문의 숲에서 비밀스러운 일을 처리할.
루페르트가 생각하기에 이런 일은 마를로네 쪽이 베르크 란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다 떠나서 베르크 란이라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서기 쉬운 사람은 결코 아니니.
아랫사람이라고 하나, 그는 단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짓누르는 위압감을 드러냈다.
루페르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지 그를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잘 단조되고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날 같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이번 만남에 베르크 란이라는 검은 필요가 없다.
[ 루페르트 가우저. 그 사람을 만나면 소라고둥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려 주세요. ]
그 어떤 존재보다 위에 있는 여신님이 그와 함께한다.
여러 번 회귀했지만, 여신이 직접 발 벗고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연한 일이다.
저 티그리트는 여신의 권능을 받고도 여신을 배신하고 여신을 우롱하러 들었으니.
루페르트가 리프니에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신의의 문제다.
‘분명 그 사람에게도 뭔가를 애걸하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여신님을 싫어할 수는 있어. 나도 여신님의 행동에 이상한 기분을 느꼈으니. 하지만 자신이 은혜를 애걸하던 순간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배신할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루페르트는 지금 이 순간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불타는 테타우의 궁정에서 죽음 직전에 신의 도움을 갈구하던 장면을.
사실 그때만이 아니다.
비록 호라에게 기도하긴 했지만, 몇 번이고 루페르트는 섭리를 벗어난 초자연적 존재의 도움을 바라고 또 갈구했다.
이제 두려워해야 할 쪽은 티그리트다.
‘과연 여신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군.’
한때 그는 루페르트의 우상이었다.
그가 되고 싶었던 이상의 존재였다.
더 이상은 아니다.
루페르트는 천천히 가문의 저택에 들어섰다.
입구로 통하는 드넓은 홀 중앙엔 들어오는 이를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로 방대하고 상세한 가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루페르트의 이름은 그 수많은 가지 중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가문의 나무를 보던 중 루페르트는 한 가지 의문에 잠겨 들었다.
‘내가 황위를 양보한다고 치자. 그런데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 사람이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 가문의 구성원 전체는 이 가문의 나무에 적혀 있는데.’
오래전에 가문을 떠났던 그의 조부인 헤르베르트 가우저와 그 자손의 이름마저 적힌 가계의 나무는 너무나 상세하여 이 가지에 속하지 않은 바깥의 인간이 어떤 식으로 가문의 일원을 주장한다고 해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페르트는 가문의 나무를 보며 계단을 올라 그를 기다리고 있는 가문의 원로들을 방문했다.
“폐하.”
비밀스러운 출장이지만 가문의 원로들은 황제의 예방을 알고 있었다.
원로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문의 수장이자 제국의 통치자를 진심으로 반겼다.
그들의 반응을 보며 루페르트는 의아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가문의 나무를 봤을 때와 비슷한 맥락이다.
한 번 물어보았다.
“만약 내가 제위에서 내려온다면 가문에서는 어떤 자를 황제로 내세울 것인가?”
티그리트의 말만 들어 보면 이미 그는 가문을 휘어잡은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원로들이 서로를 보며 귓속말을 주고받는 동안 루페르트는 하나의 질문을 추가했다.
“가문의 나무에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자도 가문이 내세우는 황제 후보가 될 수 있는가?”
누굴 황제로 세울 것인가 대해서 원로들은 고민하고 상의했지만, 두 번째 질문은 즉답했다.
“가문의 나무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자는 우리 가문의 일원이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자는 우리 슈발츠마인의 사람이 아니기에 후보로 세울 수 없고 우리의 지지도 얻지 못할 겁니다.”
“가문의 나무를 위조할 가능성은?”
“불가능합니다.”
잠자코 있던 백발이 성성한 원로가 답했다.
루페르트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라간바르드라고 했나.’
가문의 의식, 예복, 절차 같은 가문의 법도를 관장하는 자였다.
선제후직에 오를 때 많이 맞부딪쳤기에 그 이름과 얼굴은 물론이고 성격까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적어도 예법에 있어서는 황제 앞에서도 딴지를 걸 사람이다.
그 정도로 시시콜콜한 예법에 자신을 거두고 그 틀에 맞게 살아가게끔 설계된 사람이다.
특히 그는 각도에 집착했는데, 그 집요함이 어느 정도냐면 선제후 의식을 치를 때 루페르트가 든 창을 쥐는 법 각도, 방패가 보는 방향과 각도, 시선의 각도 거의 모든 영역에서 칼날 같은 각도를 엄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 원로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가문의 구성원의 태어나면 가문에 소속된 화가가 나무 위에 새로운 가지를, 그리고 그 이름을 적습니다. 그 새로운 가지와 이름을 그리는 데 쓰이는 물감은 동방 제국에서 직수입한 진주를 갈아 만든 것으로 그 독특한 색채와 색감이 있지요. 그 물감은 우리 가문 일원이 보는 앞에서 일일이 진주를 갈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허락 없이 가문의 나무에 가짜 구성원의 이름을 그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혹 그런 짓을 저지른다고 해도 물감의 색채만으로 거짓이 탄로 날 겁니다.”
그는 한숨도 쉬지 않고 제법 긴 말을 순식간에 내뱉었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인간이 그렇게 말한다면 맞는 거겠지.’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대체 티그리트는 뭘 믿고 자신이 가문이 지지하는 후보가 될 거라고 말한 것일까.
“혹시, 그대들이 은밀히 밀고 있는 후보가 있는가?”
루페르트는 진솔하게 물어보았다.
원로들은 단호하게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우리의 황제는 오직 폐하뿐입니다.”
“새로운 후보를 생각하는 건 어디까지나 폐하의 건강이 위중하거나 혹은 불의의 사고로 붕어하신 이후일 겁니다.”
이것이 가문 구성원의 생각이다.
‘집단 세뇌라도 하는 건가.’
루페르트는 자신이 일전에 대주교를 상대로 사용한 바가 있는 하얀 벌레-황제의 멍에를 생각했다.
그런 게 여러 마리가 있다면 뭐,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진 않겠다.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원로들이 생각하는 차기 황제의 후보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베른하르트입니다. 그 친구 말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폐하를 제외하고 가문 구성원 중에 가장 뛰어난 젊은이지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봐서 안다.
유능한 사람이고 영민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티그리트가 아니다.
“가문의 숲으로 가겠다.”
이제 그 티그리트를 만날 시간이다.
루페르트는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보고 싶고 듣고 싶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스스로도 자신의 변화에 놀라움을 느꼈다.
여신이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게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다들 종교를 믿는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신을 보았다.
그 신은 소라고둥 안에 있다.
* * *
“다시 이런 곳에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저택 안에서는 죽은 쥐처럼 잠잠하던 마를로네는 숲에 들어오자마자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저, 이 숲. 정말로 싫어요. 폐하도 아시죠? 제가 여기서 폐하 조상님들처럼 생활한 거? 지네는 또 어찌나 많은지. 왜 폐하 가문의 문장에 지네가 안 그려졌는지 조금은 놀라곤 한답니다.”
평소엔 말이 적지만, 불만이 많으면 말이 많아지는 마를로네의 투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루페르트는 조용히 기억에 남은 숲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이 숲에서 처음으로 만났지. 제국 성인이라 불리는 존재와.’
이 방대하고 유서 깊은 숲은 태곳적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소수의 숲지기를 제외하면 나무꾼은커녕 그 사냥을 좋아하는 귀족들도 얼씬도 하지 않는 곳이니.
누가 감히 제국 최강의 가문인 슈발츠마인의 숲에 함부로 흙발로 침범하겠는가.
그래서 제국 성인 같은 괴물이 똬리를 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약속의 장소는 마를로네가 알고 있었다.
게슈나그 연못이라는 장소다.
“게슈나그 연못요?”
루페르트는 가문의 숲에 무지하지만, 한때 이곳에 살았던 마를로네는 숲에 대한 일화에 대해 가문의 수장인 루페르트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아, 아기를 공양하던 연못으로 알고 있어요.”
영아 살해는 과거부터 이어진 어쩔 수 없는 악습이었다.
아이는 끝없이 나오는데 먹여 살릴 길이 없으니, 작황이 좋지 않거나 기근이 예상되면 부모들은 아이를 죽여야 했다.
가난한 제국 시골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보통은 어머니가 아기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몸을 뒤척여 아이를 깔아뭉개는 사고의 형태로 위장한다.
영아 살해에 관한 재판 기록을 읽으면 대동소이한 내용이다.
예전에는 비극으로 보였지만, 황제가 된 지금은 달라 보인다.
아기와 어머니의 개인적인 비극의 문제라기보다는 제국의 땅이 태어나는 모든 생명을 다 먹여 살리기 부족하다는 암시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매년 13월에 태어나는 아기들을 예외 없이, 심지어 부족장의 아이조차 이 연못에 빠뜨려 연못 안에 사는 괴물에게 공양했다지 뭐예요.”
13월은 지금은 없어진 달이다.
룸 제국이 개량된 달력을 가지고 오면서 사라졌다.
연못에 아이를 빠뜨리는 악습도 13월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죽이는 풍습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저 형태만 달라졌을 뿐이다.
‘어쩌면 과거에 이 땅에 살던 부족과 현재의 제국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지도. 아니, 부족장의 아이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 과거가 오히려 지금보다는 수평적인 세상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루페르트는 천 년 전의 세상을 모른다.
그렇기에 티그리트라는 사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제국을 세웠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어렴풋이 읽었다.
그는 한 마리 짐승과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선 신의가 없었고 믿음도 없었고 존중도 없었다.
대의를 이야기하지만,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건 그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굶주린 야수의 행동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잘난 대의나 혹은 안배도 멀리서 보면 먹이를 먹는, 혹은 짝짓기 상대를 향해 구애하는 짐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이제 그 과거의 황제가 저 너머에서 기다린다.
태곳적부터 이끼 색을 띤 연못 앞에 건장한 체구에 로브를 걸친 사내와 모래색을 닮은 피부를 가진 여성이 요염한 자태로 서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두건을 벗으며 금발의 전사가 수염 없는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루페르트를 그늘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루페르트는 그 시선을 똑바로 받으며 대답했다.
“다시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선제, 아니 선제들이여.”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