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35. 재회 (2)
한때 루페르트 가우저라 불리던 새로운 황제를 두고 세간에서 많은 의혹의 눈초리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슈발츠마인 가문이라고 하나 그는 제대로 된 가문의 구성원도 아니니.
출신과 배경을 누구보다 따지는 제국인들은 황제의 유년기의 행적이 거짓말처럼 삭제된 부분에 관해서도 은밀하게 흉을 보곤 했다.
“대체 누구한테 교육을 받고 어디서 자란 것이지?”
최근 유행하는 권세 높은 가문의 아이가 자라는 방식은 이렇다.
먼저, 제국에서도 전통 있고 격조 높은 지역이라 평가받는 디터팔츠의 중산층 이상 가문에서 자란 유모 아래서 걸음마와 말을 익힌다.
디터팔츠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외국의 억양이 크게 침범한 트라이아나, 촌스럽고 낙후된 이미지를 가진 렌타이어마르크 출신만 아니면 크게 상관은 없다.
아이가 걷기 시작할 무렵엔 노르드마르크 출신 가정 교사에게 검을 비롯한 무기를 쓰는 법을 배우며 고어문트 출신의 말벗을 할당받는다.
그런데 새로운 황제는 그런 유년기의 행적이 불분명했다.
목동을 비롯한 갖가지 천박한 일을 했다는 정도는 알려졌지만, 나머지는 오리무중.
말벗은커녕 어릴 때 같이 자란 친구도 없다.
분명 시골에서 황제가 날 정도면 저를 황제의 소꿉친구라 칭하는 인간이 나타날 법인데도 말이다.
심지어 그의 부모라는 작자를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분명 슈발츠마인 가문에 붙은 가문의 나무엔 그 이름이 적혀 있지만, 정작 실제로 만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해괴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다른 나라라면 모를까 남을 흉보고 헐뜯고 뒷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제국인들이 그 중대한 하자를 놓칠 리가 없다.
특히 극성스러운 호사가들은 조심스레 말하곤 한다.
황제 루페르트는 어쩌면 철혈대제의 사생아가 아닐까 하는.
그런 음습한 평가와 달리 새로운 황제 루페르트의 치세는 최초의 동란을 제외하면 평온하고 온건했다.
궁전 바깥에서 흉을 보는 사람들은 황제의 출신을 두고 욕을 하지만 실제로 황제를 만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
새로운 황제는 젊지만 늙은이와 같은 노회함이 있고, 결단이 빠르다고.
그가 유능한 황제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저 철혈대제라 불리던 클라우데 2세를 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충분히 풍요로운 시대를 이끈 황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폐하. 밤이 깊었습니다. 공무도 중요하지만, 폐하의 건강은 공무보다 더 중요한 제국의 보물입니다.”
그 황제는 궁전 안에서는 근면 성실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모두가 은밀하게 손가락질하는 공놀이 시간을 제외하면 황제는 술도 마시지 않았고 과식하지도 않았다.
사냥 같은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일도 없었고 음악과 춤도 멀리했다.
여자를 멀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
그는 어떤 의미로 진정한 수도승-황제였다.
“…….”
루페르트는 강한 피로를 느끼며 눈가를 마사지하듯 꾹꾹 손으로 눌렀다.
피로가 쌓였다.
확실히 황제의 업무는 선제후 시절보다 곱절은 많았다.
저마다 읍소하고 중재를 바라는 문서가 대다수를 이뤘지만, 어떤 문서는 교묘하게 진의를 숨기고 황제의 실수를 유도하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중신들이 일을 돕는다고 해도 결국 서명을 하고 책임을 지는 건 루페르트 본인이다.
매일의 격무는 황제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매번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긍정적인 신호도 몇 개 있었다.
골트문트의 변화다.
내심 대립각을 세우던 그는 루페르트가 울피아나를 찾아간 이후엔 조금씩이지만 우호적인 태도로 손을 내밀기도 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아직 완전히 내 사람이라고 믿을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적이 아니라는 걸 정도는 분간할 정도가 됐다.
고무적인 일이다.
골트문트가 없다면 레벤호스트 하나에만 전념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 레벤호스트도 최근 들어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마르틴 보엠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세계 전역에 끝도 없이 보내던 사절이 싹 끊겼다.
이는 루페르트가 심어 둔 제국 첩자들이 보고한 사안으로 레벤호스트가 더 이상 외교적인 수단으로 동료를 늘리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걸 시사했다.
물론 테타우의 호사가 사이에선 여전히 레벤호스트가 사람들을 보내 각국의 왕과 군주를 떠본다는 이야기가 속출하지만, 왕이나 군주에게 보낼 사람은 정해져 있다.
군주 정도 되면 보내는 사람도 격식을 갖춰야 한다.
최소 귀족이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상대방 군주가 대외적으로 신뢰한다고 알려진 인물이어야 한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찮은 인간을 보내는 건 그 군주에 대한 모독이다.
상대방이 우습게 보이니 그에 걸맞은 인간을 보낸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벤호스트가 최근에 조용해진 건 루페르트도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또 다른 첩자가 이상하고 은밀한 이야기를 전했다.
“선제후의 궁전에 알 수 없는 사내가 드나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근은 중신들의 회의에까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군요. 기이한 건 그 사람이 분명 존재는 하는데,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첩자들은 그 의문의 사내를 안개로 비유했다.
요하네스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고 오토 브라에는 첩자를 꾸짖어 밖으로 내보냈지만, 정작 루페르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 흐릿함은 자신이 아는 어떤 사내가 가진 속성이니까.
‘클라우데 2세.’
약속했던 1년이 다가오고 있다.
* * *
클라우데 2세가 1년의 시간을 준 이후 제국 성인의 움직임은 없었다.
루페르트를 강박증으로 몰아넣던 크리오네도 그중 하나다.
이제 곧 과거의 황제와 만나게 될 것이다.
“…….”
어떻게 할 것인가.
마를로네 덕분에 사안을 마주 볼 수 있을 정도로는 성장했다.
하지만 그 섭리를 벗어난 존재를 상대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여전히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결국 최고의 전사들을 모아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전사들은 렌타이어마르크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겔슈타트는 전보다 더 쇠약해졌고, 한스 징펠만도 좀처럼 궁정에 모습을 비추는 일이 없으니.
한스 징펠만이 궁정에 출석하지 않는 가장 이유는 그의 고향에 벌어지고 있는 환란 때문이다.
노르드마르크는 내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몰락하고 있었다.
신의 회초리라 불리는 역병이 해안가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퍼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흑사병처럼 병이 퍼지는 속도보다 사람이 죽는 속도가 빨라 전염병이 멀리 퍼지진 않았지만, 해를 넘긴 이후부터 이상할 정도로 자주, 넓게 노르드마르크 곳곳의 마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근 한 달 만에 이름이 알려진 마을 열다섯 개가 지도에서 지워졌다고 한다.
늘 큰소리를 치고 남자다움을 강조하던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은 궁정에 틀어박혀 그저 그의 신에게 기도만 하고 있다고.
심지어 그 신은 호라가 아닌 사냥의 신 다르타니아라고.
‘이 역병이 강한 건 맞아. 노르드마르크의 뿌리를 뽑으려 든 것도 맞고.’
루페르트는 과거를 회상했다.
노르드마르크를 멸망하게 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역병이고 다른 하나는 빙해 약탈자라고도 불리는 북부인의 침략이다.
자세한 정황까지는 분석할 여유가 없었지만, 후자가 노르드마르크의 멸망에 더 기여했다는 게 루페르트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정반대다.
북부인이 침략을 해 오기도 전에 노르드마르크가 빈사 상태에 빠졌다.
“그 병은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하기에 역병이 퍼진 땅을 봉쇄하고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제국 의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신의 회초리라는 역병이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재앙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건 루페르트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걸리면 3일 안에 귀족도 평민도 군주도 공평하게 죽이는 역병이라는 걸.
하지만 루페르트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그에겐 이 문제를 상담할 뒷배가 있다.
“그래. 신전은 다 완성됐는가?”
루페르트는 한때 안젤리나가 머물렀던 저택 쪽으로 향했다.
저택은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다.
그 저택이 있던 자리엔 아담하지만 하얀 대리석으로 여러 개의 기둥을 박아 지은 작고 아름다운 신전이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최소 10년이 걸린다는 견적이 나왔지만 막대한 돈과 루페르트의 사비마저 털어 공기를 앞당겼고, 결국 1년이 조금 넘은 현재 개장을 앞두고 있었다.
이 신전은 그러나 단 하나를 위한 신전이다.
“안에 들어가 봐도 될까?”
“네. 부디.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머리 위에서 뭔가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신전 안은 다채로운 금붙이와 조각상, 이국에서 온 갖가지 진상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는 루페르트의 마음이다.
리히트보덴으로부터 오는 개인 자금 전체를 이 신전을 만드는 데 썼다.
역시 돈은 인간이 부릴 수 있는 최상의 마법인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꽤나 흡족한 눈으로 여신의 신전을 돌아보았다.
‘작지만 괜찮아. 이전에 내가 지은 것과는 급이 다르군. 역시 사람이란 힘이 있고 볼 일인가.’
늦어도 한 달 안엔 완성되리라.
소소한 만족감을 안고 루페르트는 그의 여신을 찾았다.
여신은 여전히 미궁 2층을 혼자 차지하고 있었다.
문이 열린 후에도 어둠만이 있는 건 전과 같았다.
“루페르트 가우저.”
어둠 속에서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신님.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
이제 과거의 앙금은 거의 다 사라진 상태다.
시간의 흐름이 감정을 희석한 부분도 있겠지만 둘의 앙금을 녹인 가장 큰 계기는 역시 솔직한 대화와 용서일 것이다.
루페르트는 그 일련의 사건에서 리프니에를 다르게 평가했다.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고 의도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본성만큼은 악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먼저 찾아와 상담을 요청할 수 있었다.
“신의 회초리라는 역병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제국 의사들도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극악한 역병이라고 하더군요.”
“그 병은 그래요. 회귀 전에 본 기억이 있네요.”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인영이 움직였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여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병은 전염되지 않아요. 당신의 의사가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전염되기엔 너무나 빠르게 사람을 죽인다고.”
“정확합니다.”
“그 병을 고의로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병을 퍼뜨린다고요……?”
“네. 공성전에 유목민이 역병에 걸린 시체를 투석기로 안으로 집어넣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겠죠?”
“그렇습니다.”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라요.”
이것이 여신의 답이었다.
역병 그 자체를 해결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현상을 해결한 방안 하나 정도는 찾은 것 같다.
루페르트는 장기간 칩거에 들어간 자신의 사냥꾼을 불렀다.
“한스 징펠만.”
“네. 폐하.”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사냥꾼의 얼굴은 나이가 들어 보였다.
고작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의 얼굴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 노화의 핵심에 렌타이어마르크의 괴물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순 없겠지만, 비단 그것만이 이 사냥꾼의 기력을 앗은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 역병을 퍼뜨리는 자가 있다는 첩보를 들었다.”
“……그렇습니까?”
사냥꾼의 두 눈에 흉흉한 살기가 떠올랐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그 역병에게 잃었다.
최고의 사냥꾼이라고 하나 역병 그 자체를 사냥하는 능력이 없기에 그는 허송세월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역병을 퍼뜨리는 자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산 것은, 살아서 대지를 걷는 것은 죽일 수 있다.
“진상을 파악하고 가급적이면 그 범인을 찾아내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제국 사냥꾼 한스 징펠만이 엄선된 사냥꾼을 이끌고 노르드마르크로 떠났다.
첫 번째 영혼 동맹이 그의 전장으로 향하는 걸 눈으로 배웅하며 루페르트는 또 다른 전사의 안부를 물었다.
“베르크 란은 완벽하게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 베르크 란이 다시 루페르트 앞에 섰다.
공손하게 예를 갖추고 있지만 당당한 자세로 초로의 전사는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부르셨습니까?”
“그대를 다시 나의 챔피언으로 삼겠다.”
베르크 란은 루페르트가 아는 모든 인간 중 가장 강한 자다.
“나를 옆에서 지켜 주길 바란다.”
황제의 말에 전사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최고의 전사가 이제 루페르트를 옆에서 수호한다.
‘선제여.’
루페르트는 속으로 그에게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 위압적인 전사를 떠올렸다.
두 황제의 재회가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