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35화 (135/225)

135화 34. 족쇄 (3)

시간의 책갈피에 저장한 시간대는 마르틴 보엠이 죽은 직후였다.

하나의 굵직한 과제를 처리할 때마다 루페르트는 시간을 저장하곤 했다.

꽤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

실제 회귀를 통해 거슬러 올라간 시간은 한 달 남짓이지만, 그 한 달 안엔 수년 분의 밀도로 가득 차 있었으니.

복수심에 가득 찬 레벤호스트가 공격적으로 동맹과 우호 세력을 늘리려고 할 때였고, 이에 맞서 루페르트도 치열한 정치 공작으로 맞서던 때였다.

“노동이군.”

창밖에 내다보이는 회랑에서 인부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작업을 하는 걸 보며 루페르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저들이 반복하는 육체노동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

구역질이 밀려온다.

다시 같은 짓거리를 반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엇보다 그 여자 울피아나를 만난다는 생각에.

만나야 한다.

만나야만 한다.

저 모호한 골트문트에게 은혜를 입힐 유일한, 천재일우의 기회다.

루페르트의 마음이 부서지는 것과 별개로 골트문트를 이쪽으로 끌어들인다는 건 루페르트가 원하는 제국의 존속에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안 그래도 신교과 구교로 분리된 이 나라에서 막강한 구교 선제후를 끌어들인다는 건 힘의 균형이 루페르트 쪽으로 완벽하게 기운다는 뜻이니까.

그로 인해 신교 선제후들이 받을 불만도 고려해야겠지만, 힘이라는 건 일단 쥐고 있는 쪽이 좋다는 건 두말할 여지가 없다.

‘어쩔 수 없다. 내가 각오한 일이다. 마를로네와 한스 징펠만이 돌아오기 전에 빠르게 처리해야겠어.’

물론 이번 회귀의 목적은 잊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시종을 불러 목적지를 이야기했다.

“대학에 가겠다.”

루페르트가 덧붙였다.

“오각의 마법사, 헬브라이트 베틀렌에게 전갈을 보내라. 그와 상의할 이야기가 있다고.”

* * *

여느 오각의 마법사처럼 눈먼 자 헬브라이트 베틀렌도 천둥 같은 영웅담과 이교의 신화 같은 은밀한 이야기를 가진 기이한 인물이었다.

동료 마법사처럼 그의 나이 또한 불명으로 어떤 이는 백 살을 넘게 살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어떤 기록을 담당하는 마법사가 발견한 바에 의하면 헬브라이트 베틀렌이라는 이름은 300년 전, 먼지와 곰팡이로 얼룩진 학생 명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부르봉과의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단지 손가락 하나를 흔드는 것만으로 부르봉이 자랑하는 괴물 기병대-장다름이 철혈대제의 본대를 급습하려는 걸 좌절시켰다고 한다.

병사들은 헬브라이트 베틀렌이 햇볕이 쨍쨍한 늦가을의 뜨겁고 건조한 땅 위에 안개를 만들어 냈고, 안개 속에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괴물을 불러내어 부르봉의 기병대를 도륙하여 달아나게 만들었다고 전한다.

물론 그가 마법을 펼치는 동안 적의 마법사는 모든 마력을 빼앗긴 채 손가락만 빨았다고.

그 마법사를 개인적으로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루페르트가 생각하는 오각의 마법사는 만일의 사태, 그러니까 제국이 외세의 침공을 받고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나 비로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제국 수호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일반적인 제국 마법사의 인상이다.

오각의 마법사는 인지를 넘어선 지혜를 다루고 그걸 추구하는 사람들인 만큼 마치 수도승처럼 세속과 멀리 떨어져 있고 신비로움 속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귀 전만 해도 그러한 이미지는 잘 유지됐다.

그들은 신비 속에 있었고 신비를 간직한 채 죽거나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그들은 조금은 달랐다.

짖는 자 프리츠 에센바하와 함께 할 때 처음으로 자각했다.

이 오각의 마법사들이 이상할 정도로 연을 만들려고 하고 황제인 자신의 눈치를 본다는 걸.

물론 겉으로는 신비를 의무로 하는 자다운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들이 잠깐잠깐 드러내는 속내는 적어도 루페르트가 아주 잘 아는 지겔슈타트보다 훨씬 세속적이었다.

헬브라이트 베틀렌도 비슷했다.

그는 제자의 시신 앞에서 돈 이야기를 꺼냈다.

사고를 막기 위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원하는 게 제국의 재원이라는 걸 못 알아들을 정도로 루페르트는 멍청하지 않다.

헬브라이트 베틀렌을 만나기 전에 루페르트는 먼저 대학에 있는 자신의 영혼 동맹, 지겔슈타트를 찾았다.

여전히 렌타이어마르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초췌한 얼굴로 병상에서 루페르트를 맞이했다.

원래 마른 편이었던 그의 얼굴은 마치 병자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그 처참한 모습에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지겔슈타트에게 다가가 그의 두 손을 잡아주었다.

“지겔슈타트.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괴물이 끔찍한 존재라는 건 인지했다. 내가 본 그 어떤 괴물보다도 강렬하고 어두운 힘으로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인가. 이 정도로 한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정도인가?’

마법사가 다른 인간보다 영적인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그 감수성이 그들의 힘인 마법의 재능이라고 하지만 역으로 그것이 피의 거인 같은 세계의 섭리를 벗어난 존재를 볼 땐 연약한 약점처럼 보였다.

자책감이 뒤를 이었다.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군.’

영혼 동맹이 여럿 있지만, 그 영혼 동맹 사이에서도 마음의 우열이라는 게 있다.

지겔슈타트는 최근에 포섭한 자다.

사실 그다지 원했던 인연은 아니다.

과정도 순탄하다고 말하기 어려웠고.

늘 마를로네와 틱틱 다투고, 억지로 신비감을 꾸며 내는 그를 보고 반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이제는 영혼 동맹이다.

죽을 때까지 루페르트에게 충성을 바칠 그의 진정한 신하다.

그런 지겔슈타트가 이런 지경이 되도록 알지 못했다는 점이 루페르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만이 아니다.

저 빙해 너머엔 또 다른 영혼 동맹 아서 픽튼이 지금도 불철주야 혹한과 맞서며 루페르트의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뼈와 힘줄을 혹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도 선물과 더불어 위로의 편지를 보내야겠어. 아니, 이곳으로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여. 후임자를 맡기고 그를 내 곁에 두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루페르트는 지겔슈타트를 위로했다.

“당신은 나의 기둥이고 나의 방패요. 그대가 아니면 누가 나를 지켜 주겠나?”

“폐하.”

“쾌차하시오. 그 괴물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 괴물이 끔찍한 존재라는 건 동의하지만 나는 당신의 정신이 그 괴물보다 강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소.”

“……폐하의 말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의사와 요리사를 보내 드리리다.”

“요리사는 괜찮습니다.”

“아니, 요리사가 더 중요한 거 같은데?”

“제가 음식을 가립니다.”

지겔슈타트가 퀭한 눈에 고집을 드러냈다.

‘적당히 가려야지.’

아무래도 좋다.

고목 껍질 같던 지겔슈타트의 몸에 활기가 돌아왔다.

황제의 격려란 그런 것이다.

마법의 힘도, 성스러운 가호도 없지만, 황제라는 지위 그 자체가 마술적인 힘을 발휘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거나 혹은 살릴 수도 있다.

지겔슈타트는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

“헬브라이트 베틀렌 님 말입니까?”

“그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듣고 싶군. 솔직하게 말해 주게.”

이에 지겔슈타트는 병약한 와중에도 마법의 기운을 드러내 사방을 살피고는 조심스레 루페르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은 자신의 탑을 증축하고 싶어 합니다.”

“탑을 증축?”

“오각의 마법사는 저마다 성채처럼 우뚝 선 대학의 각 모서리에 자리 잡은 커다란 탑을 가지고 있지요. 워낙 튼튼하게 지어진 물건이라 무너질 일은 없지만 최근 오각의 마법사들은 그들의 탑이 지나치게 전에 오래 지어졌고 비좁고 새로운 유행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며 탑을 개선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 건축 비용이라는 게 그리 만만하지 않지요. 단지 벽돌로 건물을 쌓는 것만이 아닌, 갖가지 마법적인 가호와 수호석을 필요로 하니까요.”

“얼마나 들지?”

“상당한 비용을 필요로 합니다. 테타우 대성당을 증축하는 것에 비견될 정도로.”

“다섯 명이 그런 비용을 요구한다면 제국은 휘청하겠군.”

“모든 오각의 마법사가 제국에 손을 벌리진 않을 겁니다. 오각의 마법사 중엔 이른바 돈이 되는 마법을 익히신 분도 있으니까요.”

“돈이 되는 마법?”

“마법의 비약이나 혹은 하찮은 금속을 가치 있는 금속으로 만든다거나.”

“연금술 말인가.”

“금 그 자체는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만 그보다 못한 금속으로 성질을 바꿀 수는 있다고 합니다. 가령 저지대에서는 튼튼한 방벽을 필요로 하지요. 마법의 가호로 단단하게 만든 모래를 섞으면 그 요새는 어떤 포격에도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방어력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5성급 요새는 그러한 마법적인 가호가 깃든 방벽을 가지고 있지요. 아마 그건 우리 탑의 마법사들의 작품이 아닐는지…….”

“그렇군.”

처음 알았다.

오각의 마법사라는 존재가 나름대로 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거기다 일부 오각의 마법사가 세상의 인식과 달리 사업 비슷한 걸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루페르트는 피리스의 스승 헬브라이트 베틀렌과 재회했다.

“오, 황제 폐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청수한 중후함과 이지적인 눈동자를 가진 중년 사내가 땅을 짚고 선 긴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오각의 마법사는 황제 앞에서도 고개나 허리를 숙이지 않고, 황제를 대리하는 장군이 원수봉을 흔들어 예를 표하는 것처럼 지팡이만을 흔들어 예를 표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눈먼 자 헬브라이트 베틀렌도 그러한 고대로부터 이어진 법도에 따라 예를 표했다.

루페르트는 가볍게 손을 들어 마법사의 예에 답한 후 서둘러 본론으로 넘어갔다.

“피리스는 잘 있는가.”

“아, 피리스 홀리바레스 말이군요. 저의 새로운 제자는 아름다우면서도 불꽃 같은 영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눈은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지만 빠르게 삼각의 마법사로 진급할 정도로 반짝이는 재능으로 넘치고 거기다 뜨거운 열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정도 향상심은 최근 30년 동안 결코 보지 못한 것입니다.”

‘지겔슈타트 덕분인가. 사람이 달라 보이는군.’

이제 오각의 마법사는 신비스럽다기보다는 경박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여느 정치판에서 흔히 보는 귀족이나 군주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심드렁한 마음을 꾸며 낸 표정으로 가리며 이야기를 듣던 루페르트는 기회를 봐서 본론으로 넘어갔다.

“마법을 익히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건가?”

이에 아주 잠깐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루페르트는 그 짧은 변화에서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설마?’

피리스의 죽음이 의도된 것인가.

아니면 이 시점에서 예상되고 있기라도 한 건가.

갖가지 추측이 찰나 속에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마법의 힘이라는 건 대단히 위험합니다. 특히 재능 없는 자가 재능 있는 자의 영역을 시기에 무리하게 지식의 외연을 확장하려 할 때 그 마법사는 대단한 위험에 노출되지요.”

“지식의 외연을 무리하게 확장한다라는 게 무슨 뜻이지?”

황제의 물음에 마법사가 답했다.

“어둠의 지식을 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여기 어딘가 있을, 살아서 그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을 아름다운 여인을 생각했다.

‘피리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