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34화 (134/225)

134화 34. 족쇄 (2)

“금서에 손을 댄 모양입니다.”

죽은 마법사의 장례식은 조촐했다.

처음으로 피리스의 가족을 보았다.

전쟁으로 무릎을 다친 전직 병사 출신의 절름발이와 계모, 머리 색이 같은 창백한 피부에 주근깨가 가득한 아이들.

루페르트는 줄줄이 선 지저분하고 초라한 빨간 머리 아이들을 보고 사람보다는 짐승의 모임 같다고 생각했다.

신분의 차가 너무나도 나기에 루페르트는 그들을 멀리서만 보기만 했다.

병사들이 그들을 몰아낸 후 루페르트는 비로소 죽은 마법사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

피리스는 차가운 관 안에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누워 있었다.

교차한 양손 아래엔 그녀가 생전에 탐독하던 마법 서적이 놓여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책의 저자는 그녀의 스승이었다.

루페르트가 선물한 바로 그 책이다.

짙은 한숨을 내쉬며 루페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피리스.’

처음엔 그녀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죽음의 강을 건넌 그녀의 모습을 보자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저 안타까움과 애도만이 루페르트의 빈자리를 채웠다.

‘회귀를 해야 하나.’

“드문 일이 아니지요. 벽을 느낀 탐구자가 어두운 길에 손을 뻗치는 건.”

안치실엔 피리스의 스승 헬브라이트 베틀렌도 함께 있었다.

굳이 그가 참석할 필요는 없지만, 황제가 오기에 직접 마중 나와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안타깝게도 어두운 지식을 이겨 낼 정도의 정신력이 없었고, 결국 그것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지요.”

루페르트는 한동안 피리스를 보다 헬브라이트 베틀렌을 응시했다.

“재능은 있던가요?”

“있었습니다. 상당한 재능이 있었지요.”

눈먼 자라는 이명과 달리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그 벽만 넘었더라도……!!”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마법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만고만한 재능밖에 없는 아이였다.’

그는 황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가 본 피리스의 재능은 자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위험으로 가득 찬 샛길로 인도했다.

죽음으로 향하는 선택지를 고른 건 피리스 본인이지만 그 선택지를 그녀 앞에 놓은 건 헬브라이트 베틀렌 본인이다.

‘어쩔 수가 없지. 그녀가 죽어서 그나마 황제와 접점을 만들게 됐으니, 재능 없는 아이를 제자로 둔 보람은 있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법사는 슬픔을 억누르는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학생들이 어둠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수백 년 전부터 해 왔습니다. 어둠의 힘이 몸을 침식하기 전에 빠르게 정화할 수 있는 마법의 묘약을 제때 구비했다면 그녀가 죽을 일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약은 너무나도 값비싼 재료를 요구합니다. 돈. 그놈의 돈 때문에 안타까운 제자가 죽어 버린 겁니다.”

“그 부분은 돌아가서 상의하겠소.”

“폐하께서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신다면 그것만으로 무한한 영광입니다!”

루페르트는 대학을 나섰다.

대학의 어두운 종탑에서는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종이 울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회귀를 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루페르트에게 수치심을 안겨다 주었다.

자신에 대한 혐오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피리스는 루페르트의 시작을 장식한 인물이다.

그녀 또한 루페르트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녀를 변하게 함으로 루페르트는 여신의 권능의 힘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러니까 피리스는 루페르트에게 있어 첫 단추이자 시발점이었다.

그러니까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저런 식으로 죽게 내버려 둔다는 건 그녀를 잃는다는 슬픔 이상으로 루페르트의 마음을 강하게 짓눌렀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상담을 하고 싶다.

여신은 거부할 것이다.

그녀는 특정 개인을 살리기 위해 회귀의 권능을 사용하는 데 늘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면 달리 누가 있는가.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엉뚱하고 무례하며 적대적이지만 솔직하고 무언가 본질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가진 소녀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를로네.’

그녀에게 묻는다면 뭔가 대답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과 달리 그녀는 루페르트를 떠나지 않았다.

* * *

“이 도기로 말할 것 같으면 동방 제국 너머 산과 사막 안개의 정글 뒤에 자리 잡은 위대한 나라에서 온 물건이오. 보시오. 이 아름다운 광택을.”

테타우의 시장을 지배하는 건 굵직한 상회와 큰 점포를 가진 상인이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건 먼 곳에서 온 이국적인 상품을 가지고 온 뜨내기 상인들이다.

마를로네는 시장 구경 하는 걸 좋아했다.

붉은 명찰을 단 시절엔 몰래 명찰을 떼고 시장에 놀러 가 상품과 상인들을 구경한 적도 있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워낙 많은 거리와 도시를 거쳐 온지라 그녀는 어린 나이지만 나름의 안목이 생겼다.

다른 곳에서 본 사기꾼은 또 다른 곳에서 같은 사기를 친다는 것이다.

지금 동방에서 온 자기를 파는 장사치도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슈토른? 라이베르트? 잉겔하임? 아.’

마를로네가 피식 웃었다.

‘폰데니어에서 봤었지. 저지대 연방에 있는.’

5성급 요새 도시였다.

계량과 수치화를 좋아하는 저지대인들은 그들의 도시를 둘러싼 방벽을 별의 숫자를 붙여 급을 구분했는데 1성급이 가장 낮은 단계의 요새이고 5성급이 가장 강력한 요새다.

100년 전만 해도 저지대 연방의 5성급 요새는 하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무려 12개나 되고 그에 준하는 4성급 도시만 30개에 달한다.

지역의 거의 모든 도시를 완벽하게 요새화한 것이다.

이 밑바탕엔 저지대 연방의 막강한 자금력이 뒷받침된 게 틀림없다.

직접 봐서 안다.

제국의 시장보다 저지대의 시장이 보다 활기차고 사람들이 쉽게 지갑을 여는걸.

제국 사람들은 좋은 옷을 입고 점잖을 떠는 걸 즐기지만 실제로 돈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겉만 화려하지, 실속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좋은 술은 좋은 잔에 따라야 합니다. 좋은 잔은 나쁜 술조차 괜찮은 술로 만들어 주는 마력이 있지요.”

그 말을 들으며 마를로네는 저지대에서 보았던 일화를 떠올렸다.

저 상인의 도기는 동방 제국에서 만든 모조품이고 뜨거운 물이 닿으면 염료가 녹아 이상하게 변해 버렸다.

그래서 그 물건을 비싼 돈을 주고 산 사람들이 시장에서 상인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댔었다.

곧 멱살이 붙잡힐 상인을 지나치며 마를로네는 지갑을 열어 안에 든 동전들을 살폈다.

‘과자나 사 들고 갈까.’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제빵 거리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사내를 발견했다.

초로의 사내, 혹은 노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습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꿈틀거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구체적인 하나의 상을 제시하지 않았다.

마치 마술과 같은 그 모습에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그 사내를 다시 보았다.

“어라?”

노인의 모습은 간데없고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이 은은하게 웃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페하……?”

호위 하나 없이 저잣거리에 나온 황제를 보고 그녀는 적잖이 놀랐지만 이내 루페르트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하는 소리를 내며 뒷골목을 가리켰다.

‘무슨 일이지?’

터무니없는 사건에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순순히 루페르트를 따라갔다.

어두운 골목.

쥐들이 뛰어다니는 그림자 안에서 루페르트와 마를로네는 대면했다.

마를로네는 골목 밖의 밝은 거리와 뒷골목의 어둠의 선명한 대비에 꽤 강한 인상을 받으며 눈을 껌뻑거렸다.

“폐하. 여긴 어쩐 일로?”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상담요? 저한테요? 저처럼 무식하고 못 배운 사람한테…….”

“그런 말은 지겔슈타트한테나 하고.”

“아, 네.”

마를로네의 삐딱하면서도 도전적인 태도는 처음엔 제법 맵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무슨 말을 해도 고개 숙이고 거스르려 들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운 법이니.

그런데 막상 그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마음마저 숙이는 건 아니다.

일부는 고개만 숙일 뿐, 고개를 쳐들고 이야기하는 사람보다 더 강한 자아로 무장하고 황제의 흠을 잡으려 든다. 그러니까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 황제의 흠을 잡기 위해 벌겋게 충혈된 눈을 감추려 드는 것이다.

반면 마를로네는 솔직하고, 선제로부터 이어진 가문의 원한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고귀한 사람들보다 훨씬 명예로웠다.

“만약에 말이야.”

루페르트가 건물과 건물 위에 펼쳐진 덧없이 푸른 하늘을 슬픈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주 큰 일을 하나 했어. 두 번 다시는 하기 싫은 그런 일들 있지?”

“렌타이어마르크, 붉은 산맥, 슈발츠마인의 숲, 리히트 보덴 같은 일요?”

“네 번이나 했구만.”

마를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일을 했다고 치자고. 그런데 소중한 사람이 죽었어.”

“네.”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치자고. 그런데 네가 말한 그런 끔찍한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말이야.”

“어려운 이야기네요. 저만해도 특히 리히트 보덴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거든요.”

“왜 그렇지?”

루페르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리히트 보덴의 여정이 그나마 다른 여정보다는 쉬운 편이었다.

“모르겠어요. 일단 춥고, 배가 싫고, 그 버려진 마을 분위기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전 바다가 싫거든요.”

“바다가?”

“부르봉의 바다는 잔잔하고 밝은 에메랄드빛이라 좋아하지만, 제국의 바다는 거칠고 어두워서 싫어요. 물고기는 거기가 더 많이 잡힌다고 하지만 제가 어부는 아니잖아요?”

마를로네의 말에 루페르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긴 이야기인가요?”

“아니, 그냥. 뭐랄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는 것 자체가 재밌다고 해야 할까.”

“안 바쁘세요?”

마를로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다른 사람이 있다면 눈치를 봤겠지만 여기서는 단둘뿐이니.

“그보다 답은?”

루페르트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마를로네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곧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 소중한 사람이 할아버지라면 리히트 보덴도 다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라면?”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응.”

“리히트 보덴까지는 못 가겠지만 슈발츠마인 숲 정도라면 다시 갈 수 있을 거 같네요.”

“슈발츠마인은 앞서 말한 네 가지 사례 중 어느 정도지?”

“그나마 제일 쉬웠던 일이죠.”

“그, 그렇군. 고맙네.”

“별말씀을요.”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가슴이 후련해졌다.

누군가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마음의 망설임이 사라진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과거엔 경험하지 못했다.

꼭두각시 황제 시절엔 말벗조차 하나 없었으니.

심지어 내연관계의 여인들조차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들은 루페르트를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다.

“고마워.”

루페르트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게 그리 고마운 일인가요?”

마를로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처음엔 머리가 꽃밭인 거 빼면 멀쩡했던 거 같은데, 점점 이상해지는 느낌이야.’

속마음을 꽁꽁 감춘 채 말이다.

“너의 할아버지.”

“네.”

“언젠가 장군으로 만들어 줄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바지?”

“더할 나위 없죠.”

마를로네가 공손하게 스커트를 살짝 올리며 예를 표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루페르트가 불쑥 물었다.

“결혼은 안 할 거냐?”

열아홉 정도 됐을 거다.

시골로 치면 혼기가 꽉 찬 나이고 귀족이라고 해도 슬슬 배우자를 찾아 헤매야 할 나이다.

결혼이라는 말을 듣자 마를로네가 갑자기 정색했다.

“결혼요?”

곧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글쎄요. 제가 좀 예쁘긴 한데 재산이 별로 없거든요. 평민이 귀족한테 시집을 가려면 막대한 지참금이 필요한데 그게 없단 말이죠? 왜 제가 지참금을 이야기를 하냐면요, 제가 어릴 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요. 서러움도 많이 겪었죠? 그래서 제가 아이를 낳는다면 귀천상혼이라고 손가락질받아도 제 아이는 저처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말이 많아지는 마를로네를 보며 루페르트는 기분 좋게 소라고둥을 들어 올렸다.

‘그래. 해 버리자.’

한 사람의 생명이 수고로움보다 값질 수 있을까.

보지 못했던 마를로네의 사람다운 일면을 보며 루페르트는 궁금해했다.

피리스라는 그의 첫 번째 변화에게 다시 생명이 주어지고 만개한다면 그녀는 루페르트에게 무슨 말을 해 줄지.

바다의 냄새가 루페르트의 의식을 덮쳐 왔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복도가 황제 앞에 펼쳐졌다.

“루페르트 가우저.”

불만이 섞인 여신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지만 루페르트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 목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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