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34. 족쇄 (4)
얼어붙은 빙해를 보다 보면 마음도 덩달아 삭막해진다.
리히트 보덴의 총독 아서 픽튼은 앙쥬 왕국 남부 출신이었다.
섬나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초록색의 낙원이 그의 고향이었다.
날씨는 전체적으로 온화했다.
그놈의 빌어먹을 비만 덜 온다면 말이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는 날엔 그는 볼 수 있었다.
선명한 초록색, 하늘색, 그리고 흰색의 대비를.
더러는 푸른색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주변의 사물을 투영하기에 구름이 머리 위에 있을 때만 진면목을 드러내곤 했다.
아서 픽튼은 그러한 변화무쌍한 강줄기 옆에서 노곤한 몸을 이끌고 휴식하는 걸 낙으로 삼았다.
가난하고 비루했던 시절.
그래도 그때는 마음에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스크라엘링 경보! 스크라엘링 경보!”
땡- 땡- 땡- 땡-
경박한 종소리가 괴물의 습격을 알린다.
아서 픽튼은 한 시대 전의 대형 화승총을 한 손으로 들고 가 얼음과 벽돌로 만든 바위 위에 서서 몰려오는 괴물들을 노려보았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
“그러게 말이야.”
예전에는 없던 사람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다.
확실히 돈이라는 물건은 사람을 유혹하는 특유의 향내가 있나 보다.
이 궁벽한 곳에 저토록 노련하고 잔인한 전사들이 앞다투어 오는 걸 보면.
비록 무식하고 사려가 없고 행동조차 충동에 가득 차 있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이런 궁벽한 환경에서 그들의 단순성은 도움이 됐다.
탕! 탕! 탕!
“죽여! 죽여! 죽여!”
스크라엘링들이 성벽 아래서 파도처럼 부딪쳐 오지만 숙달된 개척민의 총과 창 앞에 무수한 시체만을 남기고 달아났다.
스크라엘링이 썰물처럼 물러간 후 새로 온 개척민들이 주위를 돌며 살아남은 괴물을 찾는다.
거구의 개척민 하나가 숨이 붙은 스크라엘링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어이. 이걸 보라고.”
그가 발견한 건 괴물이 아니었다.
“이건……?”
사람이다.
끔찍한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그 아래 자리 잡은 건 이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정도의 여성의 얼굴이다.
비록 그 피부색과 얼굴의 형태는 제국인 혹은 그 주변 사람과 이질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여성이 인간이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극동인인가?”
먼 바다까지 항해를 와 본 적이 있는 개척민이 소녀를 보며 물었다.
“극동인 같아. 이렇게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는 극동인만이 가진 속성이지. 그들은 호라를 알지 못하는 지역에 태어난 원죄를 타고났거든.”
그 소녀를 총독 앞에 대령하였다.
피골이 상접한 깡마른 여성은 마치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며 맹렬하게 발악했다.
리히트 보덴에 새롭게 부임한 젊은 주교가 주위를 둘러보며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이 괴물을 물에 빠뜨려 봅시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가운데 존경받는 젊은 신부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스크라엘링은 물에 빠지면 해표(海豹)처럼 깊게 가라앉는 성질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건 전투 중에 저와 여러분이 목격한 바입니다. 저 인간 모습을 한 게 인간이라면 떠오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가라앉을 겁니다.”
리히트 보덴에서 젊은 주교의 말은 총독의 권위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 인기는 지금 시점엔 총독보다 높았다.
책임을 지지 않는 위치에서 대체로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준다는 것이 이 궁벽한 곳에 오직 돈만을 보고 온 사람들에겐 얼어붙어 가는 마음에 주는 유일한 온기니까.
주교가 의견을 내자 사람들을 앞다투어 여성에게 달려들었다.
당장 저 반쯤 얼어붙은 바다에 빠뜨릴 기세다.
“잠깐.”
굵직한 음성이 차가운 회의장의 공기를 갈랐다.
총독의 목소리다.
여성을 포박한 개척민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아서 픽튼은 너무 말라 뼈로 이루어진 생물처럼 보이는 여성을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내려보다 주위에 일렀다.
“이 여자를 가둬 두어라.”
딱히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었다.
완고하고 고집불통의 개척자였다.
심지어 수많은 개척민을 죽게 했다.
그럼에도 그가 괴물 틈바구니에서 발견한 인간을 살려 둔 건 일종의 의무감 때문이었다.
대체 스크라엘링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신비를 탐구하기 좋아한다던 마법대학에서도 포기한 주제다.
리히트 보덴이 너무 멀고 춥기 때문이다.
이제 아서 픽튼은 대단한 재산가다.
사는 곳은 거지 같지만 당장 대륙에 가면 하찮은 귀족의 땅덩어리 몇 개 정도는 가볍게 살 돈을 모았다.
굳이 땅을 사지 않더라도 도시에 거주하며 돈놀이만 하더라도 돈 없는 귀족들이 먼저 친하게 지내러 올 정도로.
지금 사는 것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는 여기서 뼈를 묻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대로 죽는다는 것이 뭔가 아쉬웠다.
황제의 가신에 일개 농부에서 한 지역의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늘그막에 자식도 가지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운명이다.
아내 비슷한 여자는 있다.
남편을 잃고 거리를 떠돌며 비참한 삶을 살다 이곳에서 아서 픽튼을 만난 여성이 있다.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사실상 부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녀가 아이를 잉태한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 것인가.
아서 픽튼은 조바심을 느꼈다.
이미 충분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으레 빠져드는 더 높은 곳을 올려다보는 질병이 그를 덮친 것이다.
검은 눈으로 빤히 이쪽을 보는 스크라엘링 여성은 점점 지쳐가던 아서 픽튼에게 새로운 번득임을 주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번 기회에 스크라엘링의 실체를 밝히는 거야. 놈들의 실체를 밝히면 놈들을 소탕할 방법도 나오겠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아서 픽튼은 저 여성이야말로 정체기에 빠진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 스크라엘링 암컷을 지켜보겠다. 죽이지 마라. 놈은 우리의 적이니. 적을 알면 놈들을 더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여론은 좋지 않았다.
개척민들은 젊은 주교의 말대로 저 불길한 소녀를 당장 죽이는 게 좋겠다고 술렁거렸다.
그런데 이번 선택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가 맞는 모양이다.
본국에서 도착한 배엔 무려 황제의 서신이 실려 있었다.
“폐하는 총독께서 본국으로 귀환해 안락한 여생을 누리시길 바란다고 합니다. 총독에 걸맞은 직과 작위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래 봐야 남작이겠지.”
아서 픽튼이 말했다.
“제국의 남작이라. 영광스러운 자리인 건 맞아. 후대는 더 높은 곳을 오를 수도 있는 게 맞고.”
아서 픽튼이 편지를 고이 속주머니에 넣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걸로는 내가 이런 곳에서 평생을 바친 수고를 보상해 주지 못해.”
아서 픽튼의 눈은 자신에게 기회를 가져다줄 기묘한 소녀를 향했다.
“이 괴물의 정체를 밝히고 내 리히트 보덴이라는 영지를 불멸로 만들겠다.”
그것이 총독의 속내다.
그 여성은 기묘한 열망에 사로잡힌 총독을 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 여성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들리는 의견이 있었다.
“아 글쎄. 그 녀석이 르흐르네이. 르흐르네이라는 말을 반복하지 뭔가요? 그것도 아주 질겁을 하는 표정으로 말이죠.”
“나는 르리크리웨라고 들었는데. 더러운 걸 말한다는 의견에 동의해.”
“리푸니에 아니었어? 난 그렇게 들었는데?”
그 정확한 발음이 무엇이든 간에 스크라엘링이 극도로 혐오하는 존재가 있었다.
그것의 발음은 어째서인지 리프니에와 유사했다.
* * *
악마학은 호라 교단과 마법대학에서 동시에 연구하는 학문이다.
역사가 기록되지 않은 시설을 포함해 셀 수 없는 문명을 멸했다는 악마의 구전은 비단 룸 제국 만이 아닌 세계 전역에서 기록되고 있는 바다.
카스무어인이 발견한 “신대륙”의 끔찍한 풍경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악마의 존재는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른바 배웠다는 학자들은 신대륙의 파멸이 과도한 화산 활동과 끔찍한 역병, 화산 활동으로 인한 기후의 변화가 원인이라고 지목하고 있지만 한 대륙이 전부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땅으로 변한 건 악마, 혹은 신적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자그마한 벌레와 짐승들이 불타 버린 대지에서 발견되긴 했다.
아무튼, 그 카스무어인의 발견이 소외받던 악마학이라는 학문을 꽤 주목받게 한 건 사실이다.
삼각의 마법사 예나 카스트룸 교수는 마법의 재능은 그리 특출나지 않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한물간 학문을 취급받던 악마학에서 흥미를 느끼고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인물이다.
40대 중반의 안경을 끼고 예쁘다기보다는 똘똘하게 생긴 관상의 그녀는 최근 자신을 찾아온 한 어린 마법사에게 강한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네이?”
그 어린 마법사의 이름은 피리스였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젊은 마법사.
재능은 평균 이상이다.
나이 스물 즈음에 삼각의 진리를 깨우친 걸 보면.
하지만 많은 “재능 있는” 학생들이 삼각에 머물러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일반 마법사로 평생을 보낸다.
예나가 교수를 달았던 건 그녀가 악마학이라는 소외당하던 학문에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 예나조차 삼각의 마법사는 열여섯 살에 달았다.
피리스의 재능이 적어도 대학 내에서는 아주 특출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둠의 지식을 기웃거리는 것이.
“네이. 그런 악마도 있었지. 하지만 그 악마의 이름은 여러 개란다.”
“그런가요?”
“어떤 악마는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그 이름 중엔 한때 숭배받던 신의 이름이었던 것도 있어.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네이라는 이름을 쓰는 악마는 악마의 이름밖에 갖지 못했지.”
예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경고를 할 필요가 있다고.
그녀가 젊은 마법사를 노려보며 힘주어 말했다.
“세 개, 혹은 그보다 많은 이름을 가진 악마가 있단다. 그것에겐 접근하면 안 돼. 여느 악마처럼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되는 존재지만, 그 여러 이름을 쓰는 악마는 무수한 사람과 왕국을 파멸한 원흉이란다.”
“그렇군요.”
피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냥 조금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불멸의 속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내가 알고 있는 건 없단다. 네이에 관한 것은 나조차도 감히 열람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그렇군요. 악마학 최고 권위자인 교수님조차 모른다면 이 세상에 그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겠죠.”
피리스가 물러났다.
예나는 떠나가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몇 명이나 보았다.
재능의 벽을 느끼고 어둠의 지식을 파헤치고, 그렇게 알게 된 어둠의 지식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에게 상담을 신청한 제자들을.
일부는 뻔뻔하게 또 일부는 집요하게 악마의 유혹을 이겨 낼 방법을 찾았지만 예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방법을 알고 있다면 내가 왜 여기 있겠냐고.
다른 오각의 마법사처럼 멋지고 위풍당당한 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 수많은 죽음을 본 예나의 눈에 피리스는 여느 학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곧 죽겠네. 안타깝게도.’
물가에서 노는 아이를 돌본다는 건, 얼마나 위험한 족쇄인가.
한 익명의 하녀의 말을 떠올리며 예나는 무심한 얼굴로 다른 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