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33. 머리를 잃은 뱀 (4)
제국의 서쪽 국경에 자리 잡은 강국 부르봉 왕국엔 최근 새로운 왕이 즉위했다.
그 왕, 앙리 5세는 열다섯 정도 됐는데 주변에서 평가한 왕의 인물됨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흥분하기 쉬운 성격, 사려의 부족함, 무기력함, 잦은 싫증, 소화 불량 등 그다지 왕에 어울리는 재목은 아니라는 평가다.
심지어 그는 벌써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내 주변의 성직자와 친지를 긴장케 했다.
호라교는 구교든 신교든 불문하고 동성애를 악마의 꾐에 넘어간 악덕으로 치부하고 엄벌에 처한다. 개인적으로 후사를 얻을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반역자에겐 좋은 구실이다.
불안한 소년 왕을 대신해 부르봉 왕국의 기틀을 다지고 있는 것은 뱅상 페리에라고 알려진 고위 성직자다.
그도 소년왕처럼 성격에 결함이 많았다.
작은 원한을 담아 두었다가 반드시 복수하는 아량 좁음, 사적인 영역에 대한 병적인 결벽, 호오가 뚜렷한 성격, 타인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소심함, 알아듣기 어렵고 모호한 목소리.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는 인내심과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자칫 나락으로 갈 뻔한 부르봉 왕국의 기틀을 단단하게 다지고 있다는 평가다.
마르틴 보엠이라는 신교 목사를 직접 상대한 것도 뱅상 페리에다.
주교 출신인 그가 신교 목사 나부랭이를 상대했다는 것 자체가 상궤를 벗어난 일이지만 소문에 의하면 신교 목사와 구교 주교의 대담은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됐다고 한다.
루페르트가 중용하는 세 명의 중신 중 하나, 오토 브라에가 그를 찾아간 건 그 대담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저는 단지 왕국과 이웃한 선제후령이 총애한다는 사람이라기에 손님으로 맞이한 것뿐입니다. 그가 신교를 믿건 아니면 다른 요사스러운 종교를 믿건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지요. 저는 부르봉 왕의 신하로 그를 맞이했고 그 또한 트라이아 선제후의 신하로 찾아온 것이니까요.”
오토 브라에는 뱅상 페리에의 심중을 파악하려 애를 썼지만, 주교는 자신의 마음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그다지 영양가가 없는 무던한 이야기가 흘러간 후 오토 브라에는 이 노회한 주교에게서 얻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오토 브라에가 이번에 얻은 소득은 뱅상 페리에가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불유쾌한 발견이 전부였다.
하지만 오토 브라에는 뱅상 페리에가 입을 다물 가능성에 대비해 또 다른 한 수를 준비했다.
그것은 바로 오토 브라에가 동행한 그의 수행원들이다.
자신이 직접 선발하고 훈련한 수행원들은 저잣거리 밑바닥에서부터 궁정의 그늘까지 폭넓은 영역에 걸쳐 왕국에 감도는 여러 상황과 정보를 신속하게 수집했다.
그 결과는 루페르트에겐 우호적이었다.
“당장 부르봉 왕국은 전쟁에 뛰어들 여력이 없습니다. 애당초 구교를 믿는 부르봉 왕국이 레벤호스트를 지원한다는 건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무엇보다 왕국은 지난 신교도 반란으로 인한 상처를 수습하는 것만으로 벅찬 상태입니다. 앙리 5세가 실권을 쥐고 있다면 모를까, 지금 왕국을 쥐고 흔드는 건 뱅상 페리에입니다. 그 음습한 자가 그렇게 막무가내인 정책을 밀어붙일 것 같진 않습니다.”
루페르트는 오토 브라에의 보고서를 읽고 만족을 드러냈다.
“부르봉 왕국은 레벤호스트를 돕지 않겠군.”
“그 녹슨 사슬은 제대로 묶이지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것만으로 절반의 걱정은 덜었다.
제국과 국경을 접한 부르봉 왕국이 전쟁에 뛰어든다는 건 전쟁의 판도를 바꾸고도 남을 정도의 사건이니까.
병력의 수준과 질도 질이지만, 부르봉 왕국 정도 되는 나라가 믿음을 져버리고 전쟁을 벌인다는 건 아마 제국을 둘러싼 잠재적인 적대국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베아 왕국은 어떤가?”
“스베아 왕국은 그들의 친척인 서쪽의 북부인과 싸우느라 여력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
빙해 약탈자라고 불리는 북부인은 제국 북방을 위협하는 강대한 적이다.
병사 하나하나의 수준이 높고 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제국의 해안을 들쑤시는 그들의 파괴 행위는 저 강한 척하는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의 혼백을 쏙 빼놓을 정도였는데, 그들을 스베아 왕국이 토벌한다?
그것은 루페르트가 보기에 호재로 보였다.
‘그 강력하고 야만적인 부족을 스베아 왕이 처리해 준다면 그나마 우리 쪽엔 사정이 낫겠지. 오로지 약탈만을 목적으로 하는 야만인 대신 말이 통하는 야만인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지난 회귀 시절에 스베아 왕국은 그다지 두각을 내지 않았다.
그들보다 문제가 된 건 지금 스베아 왕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통합되지 않은 북부인 부족이다.
사실 루페르트의 눈에 스베아 왕국이라는 건 문명인의 탈을 쓴 북부인에 지나지 않지만, 야만인끼리 서로 싸워 준다면 이쪽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전개다.
개입할 수 있는 외국은 하나가 더 있다.
슈발츠마인의 서쪽, 트라이아의 서북에 걸쳐 자리 잡은 저지대 연방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전에 휩싸였고 카스무어 왕국이 철혈대제에게 불하받은 도시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그들이 제국의 내전에 개입할 여력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제국의 오랜 동맹국인 카스무어 왕국은 탁월한 해상 강국이고 제국 다음으로 강한 보병대를 지닌 나라도 명성이 자자하니까.
기타 잡다한 공국, 백국, 자유도시는 황제가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미약한 세력이다.
“선제후는 쓸 수 있는 수단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티롤 금광을 되찾는 등의 기적이 있다면 모를까, 현재의 자금력과 외교력만으로 상황을 바꾼다는 게 여의치가 않겠지요. 마르틴 보엠이 있다면 어떻게든 신교 세력을 전쟁으로 끌고 왔겠지만, 선제후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오토 브라에의 총평은 가혹했다.
“내전을 벌인다면 선제후는 모든 걸 잃을 겁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에 말이죠. 그는 돈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죠. 단순한 이치입니다.”
* * *
티롤 광산.
일개 군소 부족에 불과하던 트라이아를 공작에서 선제후로 만든 영지의 보석과도 같은 귀중한 금광이다.
룸 제국 이전, 상고시대부터 돌로 만든 곡괭이로 금을 캐왔다는 이 유서 깊은 금광은 철혈대제 시절에 죽음을 부르는 공기가 갱도에 가득 차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해로운 공기가 갱도 안에 퍼져 사람을 죽이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지만, 티롤 금광을 덮친 재앙은 규모가 달랐다.
해로운 공기가 거의 갱도 전체를 가득 채웠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갱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새어 나와 갱도는 물론 주변 농작물마저 시들게 했다.
그리하여 광산을 폐쇄했고, 어쩔 수 없이 트라이아는 광산을 기반으로 만든 제조와 무역 기반에 의지해야 했다.
옆에 부르봉 왕국을 두고 있다고 하지만 트라이아는 숲이 많고 구릉이 많은 지역이다.
제국을 가로지르는 상인들은 숲으로 이루어진 트라이아보다는 북쪽의 평평하고 완만한 평야가 펼쳐진 저지대 연방의 자유도시를 거치는 루트를 택했다.
레벤호스트는 선제후에 오른 뒤 나른 도로를 개선하고 관세를 낮추고 교역에 따르는 편의를 제공했지만, 저지대 연방 또한 비슷한 장려책을 내놓아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트라이아는 고어문트를 흉내 내지만 고어문트처럼 될 수 없다는 조롱 섞인 이야기가 고어문트의 주점에 퍼져도 레벤호스트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감히 제국의 황제이자 제국 최강의 슈발츠마인 가문에 맞서려 한다.
절대적인 열세라는 상황을 호전하기 위해 나름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법을 찾아가려 했지만 쉽지가 않다.
사람들은 레벤호스트가 믿는 신교 군주 연합이 레벤호스트가 부당하게 황제의 공격을 받지 않는 이상 레벤호스트의 싸움을 지원하지 않으리라 보았다.
명분이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실상 제위를 반납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욕심 없는 황제에게 도전한다는 건 트라이아 주민조차도 억지로 보였다.
“결국은 돈이지요.”
안드리아의 루돌프라는 자는 신비로운 자였다.
마르틴 보엠이 죽자마자 혜성처럼 나타난 그는 순식간에 레벤호스트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 루돌프는 레벤호스트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방법을 제시했다.
“잃어버린 광산을 트라이아의 품으로 돌려주려 합니다.”
“그, 그런가? 그런 게 가능한가?”
“네. 하지만 그 악령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사람 몇 명이 필요할 거 같군요.”
“사람이라고?”
“사형수나 아니면 연고가 없는 부랑배, 왕을 배신한 자들, 나라 없는 민족. 뭐, 쓸 만한 것들은 얼마든지 있겠지요. 뭐 하면 연안 갤리선에서 노 젓는 인간들을 차출해도 될 겁니다.”
“무엇을 하려 하나?”
“광산 아래에 괴물이 있습니다. 숨결 자체가 독으로 이루어진 상상할 수 없는 고대의 괴물이지요.”
루돌프의 말은 어린아이조차 믿기 어려울 정도로 유치했지만 레벤호스트는 그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자는 눈으로 보이는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법. 아니 마법과는 다른 보다 근원적인,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요술 같은 힘이라고 할까.’
레벤호스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르틴 보엠 대신 옆자리를 꿰찬 중신들이 서로를 마주 보다가 답변했다.
“신교의 대의를 위해 인간이길 포기한 자 몇 명을 버리는 건 그다지 아깝지 않은 장사로 보입니다.”
“그렇게 하게.”
레벤호스트는 흔쾌히 승낙했고, 루돌프가 보는 앞에서 중신을 불러 제물로 바칠 사람을 모을 걸 지시했다.
중신이 어떤 인간을 선발할지 묻자 레벤호스트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부르봉에서 망명 온 신교도가 좋겠군.”
“부르봉 출신 신교도 말입니까?”
중신이 아닌, 루돌프가 물었다.
“그들은 돈이 많지. 하지만 그 돈은 부정하게 벌어들인 것이야. 게다가 종교가 다르다고 하나 자신의 군주를 배신한 자다. 한 번 군주를 배신한 자가 두 번을 배신하지 못하겠나? 안 그래도 그들이 내 영지 안에서 비음 섞인 부르봉어로 제국의 언어를 오염시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벤호스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루돌프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그들을 박해한다면 부르봉 왕의 마음도 얻을 수 있겠지? 안 그런가?”
이에 루돌프는 미소로 화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마르틴 보엠이라는 머리가 없으니, 자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자신조차 모르는군.’
루돌프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루돌프의 방관 속에서 레벤호스트는 부르봉 출신 신교도에게 죄를 덮어씌워 그중 일부를 투옥하고 고문해 자백을 받아 냈다.
재산을 모두 토해 낸 그들은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갔다.
혹자는 그들이 부르봉 왕에 보내졌다고 하고 혹자는 그들이 갤리선에 끌려가 노를 젓고 있다고도 말한다.
진실을 아는 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부르봉어를 쓰는 교양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돼지처럼 줄줄이 묶인 채 티롤 광산의 밑바닥으로 끌려갔다고.
그날 밤 광산 주변의 사람들은 쉬쉬하면서도 괴담을 전했다.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야수의 울음이 광산 전체를 들썩이며 밤새 울려 퍼졌다고.
“폐하. 또 한 번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사막을 닮은 고혹적인 여인이 승리를 축하했다.
“승리라고 부르기도 과분한 것이지. 싸움조차 아니었다.”
여성이 루돌프 아래에 널브러진 집채만 한 괴물을 놀라움이 깃든 눈으로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겸손한 게 아닐까요? 샐러맨더. 신화의 괴물을 죽이셨는데.”
이에 루돌프는 감흥 없는 얼굴로 자신이 칼을 박아 넣어 죽여 버린 괴물을 응시했다.
용암의 파편을 온몸에 박아 넣은 거대한 도마뱀.
신화에서 샐러맨더라 불리는 괴물을.
“아가티아, 녀석은 저항조차 하지 않았어.”
“진짜요?”
“날 아비라고 생각했거든.”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나요?”
사막을 닮은 피부색과 사막 위에 떠오른 달처럼 맑은 눈동자를 지닌 여성이 강한 흥미를 드러냈다.
뇌쇄적인 미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루돌프가 답했다.
“알에서 깨운 것도, 인간의 피를 묻힌 수정을 먹여 키운 것도 나였으니.”
담담하게 말하는 루돌프의 얼굴엔 일말의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무감각과 무심함은 사막을 닮은 여성의 충성심의 근원이니까.
“제국은 끝나겠지요?”
그 물음에 루돌프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렇겠지.”
루돌프는 죽은 괴물을 힐끗 보고는 자리를 떠났다.
“머리를 잃은 뱀은 트라이아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