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33. 머리를 잃은 뱀 (3)
황제에겐 두 개의 군대가 있다.
하나는 제국군이고 다른 하나는 황제군이다.
바깥에서 볼 때는 제국군이나 황제군이나 커다란 차이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을 구분하지 않고 제국군이나 황제군 중 입에 붙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두 군대는 성질이 엄연히 다르다.
먼저 제국군은 황제가 제국 의회에서 제국 군주들의 합의를 얻어 제국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모집한다.
그 지휘관은 황제가 정하지만 제국 의회에 다른 의견이 있을 경우 황제는 반드시 제국 의회와 상의해야 하는데 그 군대를 운용할 제원이 제국 의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제국 의회는 한 달에 한 번 백오십만 탈러를 상한으로 하는 운영 경비를 지급한다.
기이하게도 그 경비는 룸제국식 월급이라 불렸는데, 이는 기병과 포병을 합한 비율이 보병을 넘지 않는 3만 명 내외의 군대를 한 달간 운영할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제국군은 제국 의회의 입김을 받을 수밖에 없고 제국 내부의 적을 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사적인 목적을 위해서 황제군이라는 또 다른 제국군을 모집해야 했다. 제국군과 달리 황제군은 오로지 황제의 사비로 운영되며 그러므로 황제의 뜻에 따라 다방면에서 활약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처단한 군대도 루페르트가 사비로 모집한 황제군이다.
물론 제국군을 황제군처럼 다룬 황제도 없지는 않았다.
철혈대제가 그러했다.
하지만 그처럼 제국군을 황제군처럼 운영하려면 제국 전체의 국정을 휘어잡아야만 가능할 것이다.
루페르트에겐 먼 이야기라고 할까.
루페르트는 황제군을 새로이 편성하려 했다.
한 번에 대규모 병력을 일으키는 건 구실도 없고 터무니없는 비용을 소모하기에 루페르트는 황제군의 중핵이 될 핵심 연대와 고위 장교만을 우선적으로 선발해 황제군의 토대를 닦으려 했다.
안타깝지만 내전에 참가한 분더발트 연대는 더 이상 이제 쓸 수가 없다.
제국의 명실상부한 1선급 연대건만 내전에 참여한 고참병과 장교 상당수가 군대를 그만뒀다.
특히 선제후 궁전 점령에 직접 참여한 병력의 이탈이 심했는데, 그들 대다수가 정신병을 호소했고 그중 일부는 극도의 불안증세로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러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분더발트도 은퇴했다.
그는 와병을 핑계로 한 장의 서찰을 남긴 채 루페르트의 곁을 떠났는데 루페르트가 그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황제의 첫 장군이었던 분더발트가 빠르게 황제 곁을 떠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 분더발트의 서찰의 내용은 짤막했다.
- 황제 폐하 만세! 역시에 이름을 남길 지휘관이 제 뒤를 이을 겁니다.
“분더발트. 그 사람은 고향으로 내려간 건가?”
루페르트가 서찰을 내려놓으며 중신들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베르너가 대답했다.
“조금은 안타깝군.”
장군으로서의 능력은 몰라도 군사 조직가로서 능력은 탁월했다.
지금 같은 전쟁을 준비하는 시기엔 저렴한 가격에 합리적인 비용으로 군대를 모집할 수 있는 조직가 쪽이 도움이 된다.
루페르트는 회귀 전 레벤호스트의 장군 중 한 명을 떠올렸다.
에른스트 폰 룬돌프.
룬돌프 백작을 칭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생아인 인물로, 야심이 많고 욕심이 많은 것 이외엔 전쟁 지휘관으로서는 이류에 가까운 인물이고 평판도 극도로 나빴다.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았고 지나가는 거의 모든 도시와 촌락을 황폐화하며 지나갔으니.
하지만 그는 저렴한 비용으로 매우 빠르게 군대를 조직하는 능력이 있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숫자를 보충하며 전쟁지도 한 곳에 장기말로 남은 그를 보며 골트문트는 룬돌프를 시궁쥐 같은 놈이라고 부르며 경멸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룬돌프라면 저렴한 병력에 군대를 모아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는 써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룬돌프의 유일한 장점은 어떤 패배를 당했건 간에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고 전쟁 지도 한 구석에 장기말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 그에겐 아무런 장점이 없고 단점만이 있다.
그 단점은 상술한 바와 같다.
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 융커스 베샤문트가 나타나기 전에 가장 재앙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병사들은 가축을 보이는 대로 죽이고 여자를 겁탈하고 반항하는 자는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
그들은 쟁기 대신 칼로 땅을 갈았다.
남은 건 버려진 여자와 아이, 불탄 폐허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역병이 남은 모든 걸 삼켜 버렸다.
“적당한 사람을 뽑아 군대를 조련하고 조직하도록 하게. 관직이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는 인물이 좋겠군.”
‘지금 중요한 건 돈이겠지.’
전쟁에 대비한다는 건 곧 군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군대는 돈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평민을 채찍과 철권으로 휘몰아 전장에 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압도적인 숫자로 전장을 가득 채우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짚으로 쌓은 벽이다.
무질서하고 무지해 전장에서 의미 있는 기동이라는 게 불가능하고, 총성 한 번에 왕겨처럼 흩어지기 일쑤다.
쓸데없이 많은 병사가 얼마나 많은 식량을 무의미하게 소모하는지, 군대의 규모가 클수록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역병이 얼마나 지독한지, 군대를 운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다.
전쟁은 오직 잘 훈련된 용병만이 수행할 수 있다.
그들을 움직이는 건 종교나 출신보다는 계약이다.
계약은 돈을 필요로 한다.
소수의 예외가 있다지만 그 소수를 일반화하는 건 정신병자가 할 발상이다.
전쟁은 돈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그 골트문트마저도 전쟁에서 이기지 못해 파산하고 말았다.
고어문트에 터 잡은 저 막강한 아이젠쉴트 상회조차 골트문트의 채무 불이행으로 휘청거렸고, 결국 도산의 길을 걸었다.
그에 비하면 루페르트는 대단히 유리한 고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돈을 복사할 수 있지.’
여신의 금고는 회귀에 영향받지 않고 재물을 보관할 수 있다.
본격적인 실험은 해 본 적은 없지만 루페르트는 자신의 무기 중 하나를 잊은 적이 없었다.
만약 황제의 군자금 1년 치를 여신의 금고에 보관하고 회귀한다고 해 보자.
그 군자금을 그대로 획득한 채 루페르트는 자신의 곳간에 아직 쓰지 않은 군자금이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걸 다시 여신의 금고에 넣는다.
3년 치의 군자금이 생긴다.
계속해서 회귀를 반복한다면 루페르트는 골트문트 따위는 황금으로 묻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를 가지게 된다.
여신에게 그 일부를 떼어 줄 수 있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늘 하던 생각이지만 아직 말할 기회가 없었다.
이제는 그 권능을 시험해 볼 때다.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나요?”
여신의 방.
리프니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루페르트를 노려보았다.
“제가 당신의 부를 보관해 줄 수 있는 건 맞지만 여신의 권능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아니, 여신님. 저는 그저.”
“그건 너무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루페르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지? 난 분명 여신님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일어난 상황은 정반대다.
뒤로는 무슨 짓을 했든 앞으로는 온화한 미소만 보여 주던 여신이 정색하고 있었다.
곧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저의 권능을 사용해서 당신의 군자금을 불리는 것도 어떻게 보면 방법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말이죠. 루페르트 가우저. 저는 그런 게 싫네요. 어디까지나 당신이 어려울 때, 당신이 필요할 때 간절하게 동원할 수 있는 그런 자금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멋없이 회귀를 반복하며 저를 고생시키며 돈을 복사한다는 발상이……. 좀 안일한 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여신님!”
“죄송하면 제 신전부터 빨리 완성해 주세요.”
루페르트는 황급히 사죄를 하며 여신의 방을 빠져나갔다.
‘그랬었지. 회귀는 그 자체로 여신님의 심력을 소모하는 것이었지.’
내심 준비했던 나름의 필승 전략이 무위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솔직히 루페르트도 너무 날로 먹는 게 아닐까 의구심을 가지던 전략이긴 했다.
‘어쩔 수 없지.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재정의 우위는 내게 있으니.’
루페르트의 가장 큰 수입은 슈발츠마인과 카렐리아 등 직할지에서 들어오는 수입이다.
그것만으로 루페르트는 다른 선제후, 외국의 군주들을 가볍게 압도한다.
그다음으로 제국의 군주들이 바치는 세금이 뒤를 차지한다.
무역으로 얻는 관세도 세금에 비할 바 아니지만, 대단히 큰 금원이다.
게다가 루페르트에겐 리히트 보덴이라는 또 다른 보물창고가 있다.
세금에 비하면 크지 않은 돈이지만 온전히 루페르트의 개인적 수입이라는 점에서, 제국 회계 관리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다.
“트라이아 선제후 레벤호스트의 수입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황제 폐하에 비하면 5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요하네스가 루페르트에게 잠재적인 적 레벤호스트와 루페르트 간의 격차에 관해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했다.
“그 정도 차이가 난다고?”
“그렇습니다. 선제께서 트라이아 선제후의 수입이 높은 지역을 빼앗고 트라이아 선제후의 수입 기반이던 부르봉 왕국 간의 무역로를 고사시켰기 때문이지요. 트라이아 선제후령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은 황금이 나오는 티롤 광산이라는 곳인데 선제 시절에 그 광산엔 해로운 공기가 발생해 더 이상 채굴을 할 수 없게 되었고 트라이아 선제후령의 경제력은 급격히 저하됐습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트라이아 선제후령이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던 레벤호스트 땅의 실체를 조목조목 눈으로 확인했다.
‘이것이 트라이아인가.’
레벤호스트의 화려한 이미지에 가려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제국을 둘러싼 강대국 하나와 맞설 수 있다는 선제후령의 실체는 생각 이상으로 빈약했다.
‘용병업과 약간의 무역, 농사로 수입을 올리고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특산물은 이제는 폐광이 된 금 이외에는 내세울 것도 없고 공장도 변변치 않다. 설상가상으로 돈을 벌어다 주는 도시의 수는 적고 제대로 된 상회도 없다. 그나마 부르봉에서 피난 온 신교도들이 체면을 세울 정도의 세금을 바치고 있어. 하지만 선제후를 떠받드는 하위 가문이 상당한 경제력을 쥐고 있어 선제후령 전체를 떠받드는 모양새군.’
슈발츠마인이 한 마리의 사자가 호령하고 나머지 하등한 것들이 뒤를 따르는 모양새라면 트라이아는 무리를 이끄는 늑대다.
물론 레벤호스트도 믿는 구석이 있다.
그는 영지 내에서 대단히 인기가 많은 군주이고 그의 휘하엔 용맹한 백성들이 있다.
부르봉 왕국과 저지대 연맹을 이웃에 둔 트라이아는 예전부터 용병업으로 많은 수익을 올렸다. 게다가 트라이아엔 부르봉 왕국에서 피난 온 신교도가 많다.
아직 영지에 완전히 정착한 건 아니지만 그들 일부는 수완 좋은 상인이고, 부르봉 내전에서 경험을 쌓은 병사와 하급 지휘관이 충분하다.
자금만 받쳐 준다면 레벤호스트도 큰 도박을 노릴 수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레벤호스트의 가장 큰 재산은 역시 동맹일 것이다.
사적인 이익이나 욕심이 아닌, 신교라는 영혼과 믿음으로 엮은 동맹이 말이다.
당장 그는 앙쥬 왕국의 사위다.
여차하면 앙쥬 왕국 국왕이 바다를 건너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는 소리다.
레벤호스트의 머리라 할 수 있는 마르틴 보엠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죽기 전까지 제국과 외국을 오가며 한 명이라도 많은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레벤호스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르틴 보엠만큼 거기에 목숨을 걸진 않을 것이다.
그는 몸이지 머리가 아니니까.
“레벤호스트의 동맹을 무너뜨려라. 특히 그의 사절이 다녀간 외국을 중심으로.”
루페르트는 지도를 노려보며 그만의 그림을 그렸다.
꼭두각시 시절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기만 했던 제국과 그 너머의 나라들.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지.
루페르트의 시선은 크게 두 나라로 가 있었다.
부르봉 왕국과 스베아 왕국이다.
마르틴 보엠은 두 나라에 다녀왔다.
“오토.”
루페르트가 중신의 이름을 불렀다.
“네. 페하.”
“레벤호스트의 사슬을 끊으려 한다. 할 수 있겠나?”
오토 브라에는 어렵지 않게 황제의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 지었다.
“제 눈에 그 사슬은 꽤 녹이 슬어 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