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33. 머리를 잃은 뱀 (2)
“…….”
베르크 란은 오른손을 움직여 보았다.
제대로 움직인다.
힘도 들어간다.
오랫동안 전장에서 쓰던 대검 한 자루를 쥐었다.
부우웅--
가장 건장한 전사조차 두 손으로 잡고 휘둘러야 할 대검이 오직 한 손의 힘으로 바람을 가르고 신들린 듯 춤을 췄다.
“후우.”
가벼운 검무를 끝내고 베르크 란은 두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감으면 그는 전장으로 돌아간다.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아우성,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 포성, 일제사격, 화약과 북소리, 시체와 피, 휘날리는 군기와 벌판을 까맣게 뒤덮는 기병대가 지축을 흔드는 소리, 숲처럼 움직이는 장창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죽어 간 전우들이다.
너무나 많은 동료들이 죽었다.
그들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은 도펠죌트너였다.
고향에서 쫓겨나듯 도망쳐 나와 제국군에 입대한 베르크 란이 도펠죌트너의 길을 선택한 건 순전히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배의 봉급을 준다네. 그것도 단 한 번도 밀리지 않고! 우선적으로!”
전장에서 봉급이 밀리는 일은 대단히 잦았다.
연대장과 장교의 주 임무는 전쟁 지휘가 아니라 지루한 공성 중 봉급이 밀렸을 때 성난 병사를 설득하는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당시의 제국은 돈이 없었다.
병사들이 그럼에도 자리를 지키는 건 약탈에 대한 희망도 희망이겠지만 달리 할 일이 없어서다.
베르크 란도 그런 인간 중 하나였다.
고향에 돌아가 봐야 냄새나는 농촌에서 돼지나 치고 끝나지 않는 밭일이나 하다 비참하게, 그의 부친처럼 늙기도 전에 노쇠해서 다 타 버린 양초처럼 소멸할 것이다.
그런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 전장에 온 그에게 돈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돈이 있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고 그가 원하는 땅과 집을 살 수 있으며 편안한 노후 또한 보장되니까.
그렇게 해서 그는 도펠죌트너에 지원했다.
두건을 쓴 미지의 사내가 그를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사내가 말했다.
“자네는 큰 사람이 되고 싶나? 작은 사람이 되고 싶나?”
“이왕이면 큰 사람이 되고 싶소. 평생 작게 살았으니.”
어눌한 제국어로 베르크 란은 호기롭게 말했다.
“두 개의 잔이 있어. 둘 다 마시면 그대를 도펠죌트너라는 선택받은 황제 폐하의 병사로 만들어 줄 걸세. 하지만 한계가 다르지.”
“한계? 그게 뭐요?”
“클 수 있는 그릇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야.”
“호오. 계속해 보시오.”
“하나는 죽을 위험이 대단히 높지만 그대를 누구보다 강한 병사, 심지어 황제의 챔피언마저도 노릴 수 있는 강자로 만들어 주겠지만 그대의 목숨을 뺏을 수도 있어. 나머지 하나는 뭐, 그대를 봉급을 두 배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지. 하지만 그것도 죽을 확률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
베르크 란이 퉁명스레 물었다.
“내 듣자 하니 그 약을 마신 사람 중 절반이 죽어 나갔다던데.”
“절반보다 더 되지. 그러니 봉급을 두 배나 받는 것이겠지?”
“첫 번째 잔은 죽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오?”
“백 명 중 하나. 아니 어쩌면 천 명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지.”
“그걸 주시오.”
“호오?”
“내가 볼 땐 전장에서 죽으나 이걸 마시고 죽으나 크게 다를 거 같지 않으니.”
그렇게 해서 도펠죌트너가 되었다.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건 단 하나의 울림.
한 명이 아닌 무수한 사람들이 외치는 하나의 이름이었다.
미르미도스.
그 이름은 이제는 숭배가 금지된 전쟁의 신의 이름이다.
왜 그 이름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기억나는지 베르크 란은 잘 알지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이름이 자신에게 힘을 준 건 사실이다.
무수한 강자를 꺾었고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비참하게 당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승리를 거뒀다.
‘은 가면.’
하지만 지금 그가 떠올리는 건 은 가면 따위가 아니다.
눈을 감으면 언제나 생각난다.
그의 옆에서 함께 싸우던 전우들이.
도펠죌트너라 불리는, 하나의 비밀을 공유한 공범들이.
그들은 명예를 잃고 지붕조차 없는 걸인이 되었다.
그들의 명예를 살려 줘야 한다.
그들에게 지붕을 돌려줘야 한다.
그것이 황제의 챔피언이었던, 그리고 봉급을 두 배 받는 자들의 우두머리였던 베르크 란이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는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다.
심지어 저 사랑하는 손녀마저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할아버지.”
마를로네가 여정에서 돌아왔다.
베르크 란은 자신의 손녀를 새삼스레 가만히 관찰했다.
확실히 전보다 키가 컸다.
얼굴도 훨씬 여성의 티가 났다.
그러나 그 얼굴은 불쾌한 추억을 떠올렸다.
가세가 기울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 야속한 며느리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그 빌어먹을 년.’
아들이 사라진 것도 그 여자 때문이다.
그 여자의 마음을 돌리겠다고 집을 떠난 뒤 영원히 사라졌다.
그걸로 베르크 란의 모든 건 무너졌다.
지위도 가족도 명예도 모든 것도.
남은 건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쌍둥이들이다.
사내아이는 죽었다.
기이한 일이다.
보다 신경을 쓴 건 사내아이 쪽이었는데.
계집아이가 기어코 아득바득 동냥한 젖을 물고 빨며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했다.
“그래. 마리. 수고했다.”
“할아버지.”
손녀가 빤히 쳐다본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부상을 입진 않았다.
모친을 닮아 운은 기막히게 타고났기에 크게 걱정한 일은 없었다.
건강한 몸은 자신을 닮아 잔병치레 하나 없었고.
“무슨 일이냐?”
“안드리아의 루돌프라는 사람 기억나?”
“음. 보자. 아, 그런 사람도 있었지. 황제의 조언자였던.”
“그 사람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적 있었어?”
“아니. 그런 적은 없다. 애당초 그는 황제의 사람이지 우리와는 아무 접점도 없는 자이니.”
“그 사람, 분명 어디서 만난 적이 있단 말이야.”
마를로네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꺼내 베르크 란에게 보였다.
따개비 흔적이 있는 오래된 소라고둥의 껍데기 같은 것이 목걸이에 달려 있었다.
“받은 적도 산 적도 없는 목걸이가 갑자기 내 목에 걸려 있질 않나. 이상한 일투성이야.”
“너는 술을 안 마시니 술 먹고 훔친 건 아닐 테고. 음. 보자, 그래. 아마 도펠죌트너 특유의 광증이 도진 거겠지.”
“난 광증 같은 거 안 걸리는데.”
“사람마다 다르지. 때에 따라 다르고. 게다가 너는 그 거신이라는 걸 직접 봤다면서? 수많은 사람이 보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그런 괴물을 말이야.”
“그것도 그렇네. 나는 며칠 악몽을 꾸는 걸로 끝났지만, 그 재수 없는 마법사는 아직도 앓아누워 있을 정도니. 그 한스 아저씨도 마음고생 심한 거 같았고.”
한스 징펠만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자 마를로네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흐릿한 장면이 꿈에서 본 것처럼 떠올랐다.
그의 도제가 자신을 꼬드겼고 그 말에 따라 한스 징펠만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리는 장면이.
왜 그런지는 자신도 알 수 없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었다.
‘역시 그 괴물을 본 영향이 뒤늦게 미친 걸까. 정말이지, 미쳐 버린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야.’
“쉬어라. 마리. 고생 많았다. 다음에는 내가 가지.”
베르크 란이 이제 완벽하게 치료된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마를로네는 조부의 억센 손을 가만히 보다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다음이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마르틴 보엠이 죽었을 때 세상은 조용했다.
소수만이 애도했고, 나머지는 그의 죽음 자체에 무관심했다.
세상이 그의 죽음을 그냥 넘기려는 것 같았다.
자세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전쟁이라는 불길은 조용한 장작에서는 타오르지 않는다는 게 마를로네의 생각이다.
적어도 당분간 제국은 조용하지 않을까?
그건 비단 마를로네가 흐릿한 기억 너머로 매몰차게 자신과 조부를 버리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리고 하는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속이 메슥거려.”
죽음 그 자체로 이루어진 사람도 있었다.
* * *
마르틴 보엠의 죽음은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군주들은 무관심했고 레벤호스트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그런 작은 인간의 죽음보다 수십 배는 더 중요한 일이 제국 국경 서쪽에서 일어났다.
저지대 연방이 내전을 일으킨 것이다.
저지대 연방은 하나의 나라라기보다는 수십 개에 달하는 도시들의 느슨한 연합이다.
그 형태는 마치 작은 제국을 연상하게 하는데 실제로 저지대 연방엔 황제직에 해당하는 연방 회의 의장이라는 직책이 있다.
저지대의 연방 의장은 제국 의전에 따르면 왕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타국의 왕과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
그 연방 의장 바뤼흐가 최근 죽었다.
마르틴 보엠과 달리 일흔의 바뤼흐는 침대 위에서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비록 평안한 죽음 너머엔 해묵은 전쟁과 갈등의 불씨가 터지기 직전까지 팽창해 있었다.
바뤼흐는 지난 시대에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가 올려놓은 사람이다.
제국의 봉신인 저지대 연방이 신교를 이유로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자 철혈대제는 도펠죌트너를 앞세워 저지대 연방이 자랑하는 강력한 요새를 잇달아 점령하고, 저지대 전체를 삼킬 듯이 약진했다.
결국 혼비백산한 저지대 연방은 반항적인 의장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고 대신 순종적인 바뤼흐를 내세웠다.
그의 치세 동안에 저지대 연방은 평온했고 상업 또한 번영했지만, 상처 입은 저지대 연방인의 자존심은 봉합되지 않았다.
저지대 연방 남부 도시 일부를 제국의 동맹국 카스무어 왕국이 지배하는 상태가 저지대 연방인의 해묵은 분노의 원인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지대 연방을 자극한 건 돈이다.
제국의 상인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거대한 위협자로 부상했다.
아이젠쉴트, 야스푸거 같은 거대한 정치 상회는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그들은 주로 제국 국내 거래에 집중했지, 저지대 연방의 ‘밥그릇’을 건드리진 않았다.
하지만 최근 융성한 하스 상회를 필두로 제국 신흥 상인 세력은 해상 무역에 손을 뻗어 저지대인의 밥줄이라 할 수 있는 청어와 목재, 철광석 무역의 지분을 야금야금 뺏어갔다.
저지대 연방인들의 바다라 칭하던 빙해엔 이제 제국의 선박이 더 많이 돌아다녔다.
도시엔 실업자가 넘쳐나고 실업자가 강도나 혹은 전쟁 용병이 되어 도시 간의 분쟁을 부추겼다.
야스퍼 얀 반 하일데브론.
향후 야스퍼라는 이름으로만 불리게 될 새로운 의장은 전임자와 달리 강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의장에 오르자마자 카스무어 왕국에 그들이 점거한 도시의 반환을 요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전쟁의 불씨는 제국이 아닌, 제국의 서쪽을 태우려 하고 있었다.
카스무어 왕국은 군대를 북쪽으로 보내는 한편, 제국 남부 붉은 산맥의 고갯길을 통해 군자금을 남부 저지대로 실어 날랐다.
이런 상황에서 레벤호스트 가신 하나의 죽음은 쉽게 잊혔다.
누구나 마르틴 보엠이라는 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벤호스트는 자신의 스승이자 그의 또 다른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스승의 죽음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저지대 연방을 은밀하게 지원했다.
전에 비축한 총과 전쟁 물자가 식량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저지대 연방의 국경 안으로 들어갔다.
루페르트는 조용히 그 모습을 관망할 뿐이다.
“저지대 연방의 내전이라. 그런 일도 있었지.”
하지만 그들의 전쟁은 그들의 국경 내에서만 이루어지리라.
미래를 아는 루페르트는 과감하게 중신들에게 말했다.
“당분간은 내정에 집중할 것이다.”
아직 레벤호스트와의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저지대 연방에 역량을 소모할 때 루페르트는 이미 우월한 자리를 더 공고하게 다질 것이다.
‘감히 도전조차 꿈꾸지 못할 정도의 차이를 보여 주지. 레벤호스트.’
뱀은 머리를 잃었다.
머리를 잃은 뱀이 구렁텅이로 꿈틀거리며 빠지는 광경이 황제의 눈앞에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