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33. 머리를 잃은 뱀 (1)
마르틴 보엠 목사가 살해당했다.
범인이 누군지는 알 수 없다.
레벤호스트는 즉각 제국 회의의 소집을 요구했다.
마르틴 보엠의 암살에 강대한 배후가 있음을 암시하며 그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암살을 교사한 자를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큰 소리로 떠들었다.
루페르트는 사방에 첩자를 풀고 선제후와 주요 군주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분기탱천한 레벤호스트와 달리 다른 선제후와 군주들에겐 이렇다 할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마르틴 보엠이란 그런 인간이다.
레벤호스트에겐 분명 스승 이상의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지만 그의 영향력은 오직 트라이아 선제후령에만 미쳤고, 선제후령의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레벤호스트라는 화려한 범선을 필요로 했다.
레벤호스트 본인이 당한 것도 아니고, 그의 핏줄이 당한 것도 아니다.
일개 목사의 죽음은 의문점이 있다고 하나 다른 군주들의 구미를 당기지 못했다.
오히려 고소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건방진 목사 놈. 레벤호스트를 등에 업고 마치 자기가 선제후인 것처럼 행동하더니.”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은 마르틴 보엠의 죽음을 듣자마자 통쾌하게 웃었다고 한다.
같은 신교 선제후인 막스 게오르크는 심지어 마르틴 보엠이라는 사람을 알지도 못했다.
몇 번이고 중신들이 설명한 뒤에야 선제후는 뒤늦게 늘 레벤호스트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깐깐한 노인을 떠올렸다.
“아, 그 산악파 신교 목사 말이지? 암살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긴 한 건가?”
레벤호스트가 피우려던 불은 장작에 불조차 붙기 어려워 보였다.
선제후들은 차례차례 제국회의의 개최에 거부, 혹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마르틴 보엠의 죽음은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루페르트의 대담한 계획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아마 다른 군주들이 레벤호스트의 분노에 동조하지 않은 건 내 순결 서약 덕분이겠지.’
레벤호스트는 머리를 잃었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어디로 향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느릿한 것 같으면서도 급박하게 흘러가는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루페르트에게 한 장의 편지가 도착했다.
만슈타인이 보낸 것이다.
“만슈타인? 그 사람이?”
범인을 아득히 초월한 통찰력의 소유자인 그는 이 혼란스러운 시국에 어떤 조언을 원하고 있을까.
루페르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알고 편지를 개봉했다.
“……음?”
아무 내용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용건이 하나 있긴 했다.
-평생의 반려자를 발견했으나 제 신분의 모자람과 별 볼 일 없는 재산으로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건 폐하를 향한 충성과 그 추억뿐입니다. 폐하께서 친서 하나를 써 주신다면 저는 평생의 반려자와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을 해야 하는데 장인 될 사람이 만슈타인을 고깝게 보고 있으니 편지 한 장 써 달라는 이야기다.
“서기를 불러라.”
직접 쓸 필요는 없다.
대충 결혼을 권장하는 내용을 작성하게 하고 도장만 찍으면 되니까.
사실 황제가 친서를 쓴다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제국 역사를 통틀어 봐도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보내는 친선의 편지가 아닌 이상 황제의 친서가 가는 일은 없다.
딱 한 번 있긴 했다.
이백 년 전, 동방 제국이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렌타이어마르크 일대를 침공했을 때 말이다.
“내용은 어떻게 작성할까요? 폐하?”
“만슈타인의 신원을 보증하고 내가 믿는 사람이라는 내용을 섞어서 적당히 추천사를 써 보게.”
“알겠습니다.”
전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보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만슈타인의 반려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
“만슈타인보다 열다섯 살 연상의 미망인입니다.”
“만슈타인. 그 사람은 연상 취향이군.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나이 차이는 너무 많지 않나?”
“아내가 될 사람이 재산이 상당히 많다고 하더군요. 카렐리아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부자라고 합니다.”
“그래?”
대충 내막이 뭔지 알 것 같다.
돈을 보고 결혼한 것이다.
만슈타인이라면 만슈타인다운 짓이겠지만 루페르트는 개의치 않았다.
‘돈이 많아서 결혼을 했든 진짜 사랑해서 결혼을 했든 한 남녀가 하나로 합쳤다. 축하할 일이지.’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의 행운을 기원하며 소정의 금원을 보내라 지시했다.
‘그건 그렇고 그 친구가 있는 곳이 기가 막히는군.’
만슈타인은 현재 카렐리아 수도 슈코브 수비대의 기병 대장을 맡고 있다.
휘하 병력은 5백 명 남짓이지만 인근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기병대다.
그 자리도 사실 루페르트가 추천서를 써 준 자리다.
그러니까 신부도 직위도 모두 루페르트에게서 나왔다는 소리다.
만슈타인은 귀족이긴 하나 제국이라기보다는 카렐리아계이고, 그 집안도 그다지 내세울 만한 집안은 아니다.
루페르트라는 끈을 얻어 도약했기 망정이지 카렐리아 출신 촌 동네 귀족을 누가 중용하겠는가.
루페르트가 아는 선제후 중에 그럴 위인은 단 한 명도 없다.
‘나라는 별을 만나 그라는 별도 덩달아 반짝였다는 여신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적절하군.’
만슈타인의 혼사를 처리한 루페르트에겐 이제 거칠 게 없었다.
상황은 이제 간단해졌다.
레벤호스트 한 명만을 보면 된다.
“이것이 일전에 폐하께서 약조하셨던 건들을 정리한 문서입니다.”
황제가 되기 전 루돌프의 조언을 듣고 무리한 약속을 여러 개 했었다.
루페르트는 그 수많은 공허한 약속들 중에 이행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걸 구분했다.
이 약속 중 적어도 세 군주의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아카이아 대주고, 그리고 레벤호스트다.
채무를 갚아야 할 사람은 여럿이나 그중 주요한 인물은 게오르크 아르님과 골트문트다.
루페르트는 게오르크 아르님을 위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은 뷔르템베르그 공작 가문에 개입해 그들의 중요한 재산을 반강제적으로 선제후의 손에 넘겼고 골트문트를 위해서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도시 하나의 지배권을 선물로 주었다.
루페르트가 한 터무니 없는 약속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 두 가지 사안은 두 선제후가 관심을 보이던 중요한 문제였다.
두 선제후는 사절을 보내 황제의 후의에 감사한다고 답했다.
그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을 잡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중립을 지킬 명분 두어 가지는 준 격이다.
퉁.
편안한 마음으로 축구를 즐기며 루페르트는 레벤호스트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 * *
“마르틴 보엠 목사가 당신의 어릴 적 스승인 건 맞지만 저는 솔직히 그를 썩 대단치 않게 여겼어요. 너무 시끄럽고 말이 많았죠. 지나칠 정도로 우리 아이의 마음을 휘어잡으려 했고요.”
레벤호스트의 아내 캐서린은 바다 건너 섬나라인 앙쥬 왕국의 공주다.
앙쥬 왕국은 한때 강력한 함대와 전사로 이름을 떨쳤으나 제국과 전쟁에 휘말려 함대를 잃고 해외에 건설한 교두보를 모조리 잃으면서 이류 국가로 전락했지만, 섬나라의 특성상 독립성을 잃지 않았고 평화 속에서 서서히 힘을 키우고 있었다.
캐서린은 아름답고 당찬 여성으로 가히 여걸이라고 해도 무방한 기개에 말을 아주 잘 타고 활 또한 남자 못지않게 다룬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실제로 그녀는 선제후령에서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수려한 용모를 가지고 있지만 젠체하고 오만한 레벤호스트에게 현재의 아내가 없었다면 그의 인기는 지금만큼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의 오랜 불만은 마르틴 보엠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남편의 행동과 신앙을 간섭하려 했다.
이미 마르틴 보엠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레벤호스트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캐서린 입장에서 마르틴 보엠은 눈엣가시 그 자체였다.
그것이 이번에 제거됐다.
“그 인간이 당신에게 황제에게 거역하라고 부채질을 자꾸 한 거 같은데. 대체 그렇게 해서 얻는 목적이 뭐죠? 저는 선제후에게 시집왔지, 황제에게 시집온 게 아니에요. 황제라면 아마 시집오지도 않았겠지요. 아버지도 당신을 대단히 좋아한답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뭘 하시려는 건가요? 현재의 황제는 거기다가 평생 아이도 가지지 않겠다고 맹세했잖아요? 굳이 그런 사람 상대로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요?”
방해꾼이 사라지자 캐서린은 마음껏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불만을 털어놓았다.
레벤호스트는 오만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아내에게만큼은 겸손한 사람이었다.
“당신의 생각도 일리가 있어. 굳이 그와 대립을 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말이야. 캐서린. 나조차 그에게 대항하지 않는다면 누가 황제가 딴마음을 먹었을 때 그를 막을 수 있겠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일 아닌가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너무 늦어. 루페르트 가우저. 그 촌놈은 철혈대제와 오싹하리만치 닮았어. 지금은 총각 맹세를 했지만 언제 또 생각이 바뀔지 모르지. 그 인간은 이제 갓 스물을 넘은 인간이라고. 십 년이면 사람이 바뀐다고 하는데 두 번이나 더 바뀌고도 남을 정도로 젊지.”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캐서린이 진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이지, 그 목사가 죽었어도 내 부군의 생각은 터럭만큼도 바뀌지 않는구나.’
“목사가 죽은 건 큰 손실이지만 덕분에 꽤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어.”
“괜찮은 사람이요?”
레벤호스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드리아의 루돌프라고 하더군.”
“뭐 하는 사람인가요?”
“슈발츠마인 출신의 귀족이라고 하더군. 선제의 친족이라는 모양이야.”
“선제의 친족이라면 당신의 적 아닌가요?”
“그는 루페르트 가우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
레벤호스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어쩌면 루페르트 가우저는 선제의 친족이기는커녕 제국인조차 아닐 수도 있다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황제가 될 수 있는 거죠?”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이제 와서 그의 과거를 쥐고 흔들어 봐야 남는 건 진흙탕 싸움이지.”
레벤호스트가 갑자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 당신도 한번 만나 보겠나? 안드리아의 루돌프라는 사람을.”
“제가요?”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야. 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가진 남자지.”
“하아. 당신이 원한다면.”
캐서린은 작은 실망을 느꼈다.
‘마르틴 보엠 다음엔 출신조차 불분명한 인간이라니.’
한번 봐 두긴 해야 한다.
그 인간을 남편 옆에서 몰아내려면 적어도 어떤 인간인지는 알아야 할 테니.
시종들이 분주히 오가는 가운데 선제후 부부는 선남선녀다운 서로가 서로를 빛내는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차를 들었다.
“어머.”
캐서린의 눈이 반짝였다.
“이 차. 상당히 맛있네요. 어디 것이죠?”
“신 칼란이라는 곳에서 가지고 왔다더군. 동방 제국 너머에 자리 잡은 수많은 신들을 믿는 민족, 그들의 영역 너머에 있다는 진정한 동쪽 끝의 제국에서 가지고 왔다고 들었어.”
“그런 귀한 것을.”
“루돌프가 가지고 왔지.”
그 루돌프가 선제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멀리서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한 거구로 회색인지 흑색인지 알 수 없는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캐서린은 그를 본 순간 모호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기묘했다.
마치 안개 같기도 하고 신기루 같기도 했다.
둘 다 모호함이라는 속성을 가진 것이다.
그 정도로 집중하지 않으면 그라는 인간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생각조차 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 거구의 사내가 선제후 부부 앞에 섰다.
“안드리아의 루돌프여. 그래. 모습을 보이게.”
레벤호스트가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 사내에게 말했다.
“……원하신다면.”
그 목소리는 노인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캐서린 또한 그 루돌프라는 자가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두건 아래 하얀 수염으로 얼룩진 하관이 보였으니.
루돌프가 두건을 벗었다.
마술이 일어났다.
수염처럼 보이던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강인하게 갈라진 턱을 가진 헝클어진 금발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나이는 많아 봐야 서른.
그 정도로 젊었다.
무엇보다 캐서린을 놀라게 한 건 두 눈이다.
헝클어진 금발이 드리운 음영 속에서 두 개의 푸른 눈이 마치 심야의 야수의 두 눈처럼 스스로 빛을 내며 소리 없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캐서린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 인간. 사람 같지 않아. 한 마리의 야수 같아……!’
그 사내 루돌프가 말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가짜 황제입니다. 그는 제국의 적이며 없어져야 할 존재입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티그리트다.
그 이름은 극소수의, 세상의 이면을 아는 자에게만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