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32. 마녀의 비약 (2)
“모처럼 보는 강인한 남자였습니다. 제 나이가 오십 살만 어렸어도 남편으로 삼고 싶을 정도요.”
마녀의 이름은 베르타였다.
그 이름은 오직 단둘이 있을 때에만 부를 수 있었다.
대주교가 말했다.
그 이름을 절대 타인에게 알려 줘서는 안 된다고.
딱히 타인에게 알려 줄 생각은 없다.
루페르트가 흥미를 느낀 건 이 마녀가 알고 있다는 지식 나부랭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약간의 능력이 있는 건 사실이니.
무엇보다 이 마녀는 그토록 많은 사람과 연루됐으면서도 알려진 건 아무것도 없는 도펠죌트너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황제가 된 후 루페르트가 도펠죌트너에 대해 알아낸 건 하나뿐이다.
호라신의 축복으로 철혈대제가 고대의 비전을 알아냈고, 그 정수를 가장 용감한 병사에게 나눠 줬다.
‘선제의 진정한 무서움은 어쩌면 비밀 유지에 있는지도 모르지.’
모호한 건 도펠죌트너의 기원뿐만 아니었다.
군대, 재정, 정책, 외교, 인사.
모든 기록이 모호했다.
마치 후임 황제 자체를 고려하지 않은 듯한 느낌.
심지어 예전부터 일하던 제국 정부 관리들도 마치 양초공이나 밧줄공처럼 하나의 국소적인 영역만을 맡아 그것만 도맡아 처리한지라 그들이 큰 틀에서 무슨 일을 했고 어떤 목적으로 그러한 일을 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게 문제로 비화하지 않은 건 그 모호한 체계가 기이할 정도로 잘 맞물려 돌아갔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 효율성은 오래된 기계가 그러하듯 점차 삐걱거리고 있었고, 곳곳에서 이상 신호를 내고 있었다.
그 사실은 행정 전문가인 베르너와 재정 전문가인 요하네스가 지적한 바다.
도펠죌트너 또한 그러한 안개 같은 모호함 속에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호라 교단 소속의 청빈 수도회와 제국 정부 산하 전쟁부가 그 일을 맡고 있었는데, 실제 도펠죌트너를 만들고 관리한 건 ‘전쟁 지원 조합’이라는 기관이며 그 기관에 관한 뚜렷한 정보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철혈대제의 정치적 유산 중에서 가장 모호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기관은 아무 실체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루페르트의 구미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마녀. 아까 하려던 이야기의 계속을 듣고 싶군, 그래?”
루페르트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오두막은 충분히 넓고 나쁘지 않은 좌석이 있었지만, 황제가 앉기엔 지나치게 낮고 저열하며 부정한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주답게 오만함과 당당함 사이에서 루페르트는 우뚝 서서 마녀를 내려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부글부글.
가마솥에서 큰 기포가 터지며 소리와 함께 쿰쿰한 향기를 사방에 흩뿌렸다.
마녀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호기심이 많으신 분이군요.”
“너의 평가를 듣고 싶진 않다.”
마녀가 커다란 주걱으로 가마솥을 휘젓기 시작했다.
주걱이 경쾌하게 솥 바닥을 긁으며 불쾌한 색이 나는 액체를 리듬감 있게 뒤섞었다.
루페르트는 인내심이 서서히 깎이는 걸 느끼며 마녀를 응시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루페르트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마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악마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악.”
루페르트가 즉답했다.
“저는 다르게 말하겠습니다.”
마녀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죽은 신.”
“신도 죽나?”
루페르트가 빈정거리듯이 물었다.
“내가 알기로 신성엔 죽음이란 속성은 포함되지 않는 걸로 아는데.”
“죽은 신들이 존재하는 건 사실 아닙니까?”
마녀가 가마솥 안에 국자를 넣어 맛을 보며 힐끔 루페르트 쪽을 훔쳐보았다.
“제국에서 숭배가 금지된 신들을 생각해 보세요.”
“…….”
루페르트는 자신을 이곳에 오게 만든 한스 징펠만을 떠올렸다.
그가 숭배가 금지된 신을 섬긴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는 호라가 아닌, 사냥의 신 다르타니아를 섬긴다.
제국 성립 전, 기원을 알 수 없는 까마득한 과거부터 숲에서 살던 수렵민들이 섬기던 신이다.
“그 신들은 살아 있는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글쎄. 그건 내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 숭배가 금지된 신들이 악마가 된 건 아닌 거 같은데.”
“그건 아직 아마도 그 신들의 숭배자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
“그 작은 숭배자마저 없는 신들은 완전히 죽습니다. 신이라는 건 결국 신자가 있어야 성립되는 존재니까요. 신자가 없는데 신을 악마라고 하든 잡귀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게 도펠죌트너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장광설, 말을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이제 루페르트가 가장 싫어하는 화법이 되었다.
루페르트는 즉각적인 결괏값을 원한다.
특히 별 볼 일 없는 인간을 상대로는 더더욱.
“짧게 말할 수 있는 사안 아닌가? 그게 안 된다면 그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겠지.”
“하지만 숭배와 별개로 살아 있는 존재가 있지요.”
마녀가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내 스승의 스승의 스승. 그러니까 셀 수 없는 시간 전의 제 스승이 살던 시기엔 살아 있는 신들이 이곳에 많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남쪽에서 혹은 서쪽에서 혹은 북쪽에서 그것이 나타나 우리 세계의 신들을 모두 먹어 치웠다고 하더군요.”
“호라도 포함되는가?”
“호라는 만들어진 신입니다. 처음부터 신성을 갖지 못한 허상이지요. 그렇기에 가장 고귀하고 가장 많은 존중을 받겠지요.”
루페르트는 냉소를 머금었다.
이 마녀가 마음에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 발언만큼은 꽤 마음을 움직였다.
마녀가 이어서 말했다.
“그 신들을 먹어 치운 괴물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살아 있을 수 있죠. 한 가지 확실한 건 도펠죌트너라 불리는 존재들의 몸속엔 수많은 스승이 보았던 전쟁의 신 미르미도스와 비슷한 냄새가 나는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전쟁의 신 미르미도스?”
다르타니아와 함께 만신전 구석에서 은밀하게 숭배되는 옛 토착 신이다.
다르타니아처럼 호라 신앙이 들어온 이후 숭배가 금지됐다.
이단 취급을 받는 건 아니지만 숭배가 금지된 신을 숭배하는 것은 대가가 따른다.
“수많은 스승들이 노래하길 전쟁의 신은 그를 숭배하는 자에게 전장을 지배하는 힘을 수여한다고 하더군요.”
“어떤 식으로?”
루페르트가 마침내 자리에 앉았다.
단단하게 낀 팔짱은 여전히 마녀에 대한 그의 방어적인 태도를 단단하게 엿보였지만, 황제가 자리에 앉은 건 사실이다.
루페르트가 조촐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며 마녀를 노려보았다.
“어떤 식으로 힘을 수여했다는 거지?”
“글쎄요. 거기까지는 기억의 전승자에 불과한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추측하기로는…….”
마녀가 고개를 숙였다.
쓰고 있는 챙 넓은 뾰족모자가 드리운 그늘이 그녀의 추악한 얼굴을 반절 정도 덮였다.
루페르트는 그 어둠 속에서 갖가지 사악한 지혜가 똬리 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역시 마녀는 마녀구만. 머리로 생각해서 떠올리는 기억은 아니야.’
루페르트는 마를로네처럼 죽음을 보는 능력은 없지만, 저 마녀에겐 스승이라는 것들의 혼령이 깃든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실제로 그런 느낌이 들었으니.
과거의 루페르트였다면 소스라치게 놀랐겠지만, 이미 그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았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았고 그걸 견뎌 내기까지 했다.
마녀가 드러내는 사악한 힘은 그에 비하면 애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곧 마녀가 재의 냄새가 나는 쿰쿰한 숨결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죽은 신의 피를 마시게 한 건 아닐까요?”
“죽은 신의 피?”
“어디까지나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 수많은 스승의 말에 의하면, 신의 피를 마신 자는 그 신의 힘을 일부나마 손에 쥔다고 하니까요.”
마녀가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물론 그것은 지식이라기보다는 추측에 가까우리라.
그래도 어느 정도 도펠죌트너의 힘에 대한 실마리는 얻었다.
‘전쟁의 신이라.’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을 생각했다.
홀로 전장을 가르던 그는 확실히 전쟁의 신의 가호를 받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베르크 란이 이제 불구의 몸에서 벗어났다.
그가 나이가 적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부활한 그는 어쩌면 루페르트를 위해 또 한 번의 날카로운 휘두름으로 그에게 보답할지 모른다.
당장 있을 마르틴 보엠의 암살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부탁이 있습니다. 존귀한 분이시여.”
마녀가 떠나가는 루페르트를 불러세웠다.
“내게 용무가 있나. 마녀.”
처음보다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루페르트가 말했다.
“보다시피 저는 혼자입니다. 수많은 스승을 뒀지만 정작 저에겐 제자가 없지요.”
“제자를 두려는 건가. 뻔뻔하기도 하군. 마녀 주제에.”
“하지만 귀인께서도 저를 필요로 하시잖습니까?”
“…….”
“비록 손가락질당하고 있지만 나름의 작은 재주는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국인들이 좋아하는 마법에 대해서도 잘 알지요. 기원은 다르지만, 같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대학의 마법과 저의 마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건이 뭐냐. 나는 길게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하나 보내 주세요.”
“사람?”
루페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마녀가 히죽 웃었다.
“이래 봬도 저한테 가르침을 구하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답니다.”
“그래?”
“이를테면 마법대학의 학생이라든지요.”
“대학의 학생이 왜 마녀에게 가르침을 구하려 드는 거지?”
“그들의 스승이 잘 알려 주지 않으니까요.”
“그래?”
“귀인께서는 대학이 광주리에 담아 둔 벌레들의 소굴 같은 곳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요. 거기엔 스승이 없습니다. 잡아먹히는 자와 잡아먹는 자만 있을 뿐이지.”
“대학에 못 들어간 자의 악담 정도로 생각하겠네.”
마녀의 두 눈에서 음침한 빛이 흘러나왔다.
“마녀가 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약간의 가르침을 주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은 진리 앞에서 방황하는 어린 양에게 빛이 될 수도 있겠지요. 왜, 야밤에 맹수들의 두 눈에서 나오는 안광도 길잡이 역할을 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루페르트는 마녀의 제안을 일축했다.
애당초 마법대학에 아는 사람도 없거니와.
피리스 한 명이 있지만, 그녀와는 지금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다.
‘피리스. 잘 지내겠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위안을 주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피리스가 루페르트에겐 그런 사람이다.
저기 멀리 보이는 위버하임 장원에 속한 숲과 동산의 풍경처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은 위안에 불과하다.
그들이 루페르트가 거쳐 온 추억인 건 맞겠지만, 그 접점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루페르트의 진정한 시련은 황제가 된 이후부터 시작됐다.
루페르트는 말없이 자신 옆에 서 있는 금발의 소녀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를로네는 루페르트의 시선을 눈치채고 살짝 놀라 돌아보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언제나처럼 알 수 없는 눈동자를 돌려 석양이 지는 노을 쪽을 응시했다.
“기분이 좋네요. 이 바람.”
“그래.”
베르크 란을 치료하러 온 여정은 루페르트조차 생각지도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마녀의 비약은 베르크 란을 고쳤다.
또 다른 마녀의 비약은 루페르트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켰다.
땅거미 지는 풍경을 보면서 루페르트는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이 싸늘하게 식어 버릴 것 같은 이름을 떠올렸다.
‘티그리트.’
마를로네 덕분이다.
꼴사납게 눈물을 흘렸지만 그녀 덕분에 애써 외면하던, 곧 도래할 운명과도 같은 사내를 마주 볼 수 있게 됐다.
물론 그것은 또 다른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벌을 받을 각오를 말이다.
오늘 루페르트는 자신의 죄를 리프니에에게 고백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