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27화 (127/225)

127화 32. 마녀의 비약 (3)

리프니에.

그녀는 무엇인가.

자신의 입으로는 균형의 여신이라고 밝혔다.

그녀가 균형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걸 알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루돌프, 그러니까 티그리트는 그녀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상상도 못 할 정도의 경멸과 증오를 드러내며.

안젤리나에게 한 짓을 보면 그의 기분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리프니에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상상도 못 할 짓을 저지른다.

도덕이라는 게 그녀에겐 없는 것 같았다.

시체라고 하나 자신을 숭배하는 자의 아내를 먹고 그 모습으로 변할 생각을 어떤 인간이 할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다.

하지만 루페르트가 느낀 리프니에는 괴물하고는 조금 달랐다.

루페르트가 보기에 리프니에는 어린 여자아이 같다.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하고 원하는 게 있으면 기어코 손을 뻗치고 장난도 치는.

그녀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다닌 건 맞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루페르트가 보았던 것들은 그녀가 균형보다는 파멸과 파괴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했다.

그녀는 뭐랄까, 그래도 여신답게 따뜻하게 감싸 주는 마음이 있다.

자애라고 할까, 어쩌면 일시의 변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의 변덕이라면 필멸자에겐 영원과도 같을지도.

“…….”

리프니에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루페르트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본 적이 없는 분노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를 차마 표현하기 어려운 형태로 찢어 놓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무저갱에서 영원한 고통을 줄지도.

공포는 리프니에의 방에 다가가면서 점점 구체화됐다.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과 고통, 처참한 최후가 마치 환상처럼 루페르트 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헉!”

그중 하나의 결말은 루페르트의 입에서 소리가 나오게 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

불길한 상상이 루페르트의 발목을 잡았다.

루페르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굳게 닫힌 눈을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눈앞엔 수천, 수만 개의 끔찍한 미래가 떠오르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이 열린 동공으로 몰려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다.

루페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치켜뜬 눈엔 공포가 사라져 있었다.

‘여신님에게 말해야 한다. 그러기로 했다.’

무슨 미래가 기다리고 있건 리프니에에게 사실을 말해야 한다.

차일피일 미룬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짓이 변하는 건 아니고 티그리트가 기다려 줄 일도 없을 테니까.

슈발츠마인 가문 회의 측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루페르트가 아는 가문의 원로 중엔 선제에게 연락을 받았거나,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나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마를로네가 용기를 줬다.

중요한 일은 외면하고 애써 일상을 영위한다는 그들의 경험은 루페르트의 그 어떤 논설이나 교훈보다 직접적인 깨달음을 주었다.

지나치게 세상일을 단순하게 보는 건 지양해야겠지만, 일은 미룬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 여신의 코앞에 있다.

루페르트는 천천히 문을 열어젖혔다.

때는 저녁이었다.

늘 어둠에 잠긴 방 안엔 어쩐 일인지 석양의 노을이 창문을 통해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가구 하나 없는 텅 빈 방 안의 공허한 풍경이 루페르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중심엔 검은 머리의 소녀가 멍한 눈으로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루페르트는 다시 한번, 그녀가 대단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단지 외모만이 아니다.

석양이 그녀에게 색채를 주었고 동시에 그늘을 주었으며 그 그늘이 그녀에게 감정을 주었다.

“어머, 하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에 오다니. 그래, 무슨 일인가요?”

여신이 환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다가오는 걸 기다렸다.

여신이 맨발로 걸어왔다.

그녀가 발길을 향하는 곳엔 어째서인지 물결이 느껴졌고, 죽어 가는 산호의 오색찬란한 빛들이 반짝였다.

“여, 여신님.”

루페르트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네.”

“죄를 하나 고백하려 합니다.”

“죄요?”

리프니에가 놀라움을 드러냈다.

“무슨 죄요? 설마 제 신전을 제가 원하는 규격대로 못 만들어 주겠다는 건가요? 뭐, 어쩔 수 없죠. 당신은 앞으로 많은 일을 앞두고 있으니.”

“그게, 여신님.”

루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요?”

“그렇습니다.”

“무슨 거짓말요?”

리프리네의 얼굴에 싸늘한 한기가 흐르고 지나갔다.

루페르트는 영혼마저 얼어붙을 추위를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고 가까스로 말했다.

“일전에 아라키스트라는 검을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아, 그런 부탁을 했었던 거 같네요.”

리프니에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제 부탁이 아닙니다! 루돌프 님의 부탁입니다. 그분이 저에게 여신님에게 그 사실을 숨겨 달라…….”

루페르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바다의 향기가 나는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막아 버렸으니.

놀란 얼굴로 루페르트를 앞을 보았다.

거기엔 안젤리나, 아니 리프니에의 미소 지은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 어째서?!’

루페르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여신님이 이토록 자애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루페르트 가우저.”

미소 지은 얼굴로 리프니에가 입술에 댔던 손가락을 천천히 떼어 내고는 허리 뒤로 깍지를 낀 채 가볍게 돌아섰다.

“저.”

그녀가 서쪽을 보았다.

석양이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기분 처음이에요.”

“네?!”

“당신처럼 솔직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거든요.”

“그, 그런가요?”

“모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만 했죠. 왕이니, 재상이니, 황제니, 신의 아들이니 인간 앞에서는 그토록 근엄하고 잰 체하는 인간들이 정작 제 앞에서는 강아지만도 못한 모습으로 벌벌 떨며 진실을 숨겼죠.”

리프니에가 이번에는 피어오른 장미처럼 화사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루페르트를 향해 돌아섰다.

“당신은 다르네요. 당신에게 갖가지 불길한 환상을 심어 줬는데도 기어코 여기까지 와서 사과를 하다니.”

“여신님. 서, 설마 알고 계셨습니까?”

“음, 아는 방법이 있었죠. 제 수하 하나가 당했거든요. 그것도 아라키스트에 의해.”

“수, 수하도 있습니까?”

“명색이 신인데 졸개 하나둘 정도는 있지 않겠어요? 아무튼,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가 그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그자와 다른 거 같네요.”

“그자라면.”

“당신이 검을 빌려주었던 그 꼴사나운 사내요.”

리프니에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에 진한 슬픔이 떠올랐다.

“그 사람을 알게 된 건 오래전의 일이었죠.”

천 년도 전의 일이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

한 사내가 피투성이가 된 채 모래사장을 걸었고 힘이 다해 쓰러졌다.

사내는 목이 마른 듯 고개를 처박은 턱 아래에 밀려드는 파도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지만, 그의 혀에 닿는 건 짜디짠 바닷물뿐이었다.

타는 듯한 갈증 속에서 그보다 더 내장을 뜨겁게 하는 불에 데이고 칼에 찔린 상처의 고통 속에서 사내는 뒤로 몸을 뒤집어 내장이 흘러내릴 것 같은 배의 상처와 상체가 하늘을 향하게 했다.

하늘을 향해 사내는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호라교의 신자였다.

정확히는 교단에서 이단으로 분류하는 발렌티우스 학파의 신자였다.

딱히 신심은 없었던 것 같다.

죽음 직전에 그는 이를 갈면서 다른 신을 찾았으니.

“누구라도 좋다. 악마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누가 나의 말을 들어다오. 누가 나의 억울함을 듣고 저 룸이라는 악의 제국을 멸망시켜다오.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 뭐든지…….”

그 말을 듣고 리프니에는 그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죠?”

그 사내의 이름이 무엇인지 여신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는 너무 많은 이름들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에 자신이 지어 준 티그리트라는 이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티그리트.’

그는 필멸자의 위대함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그토록 꺾이지 않는 신념과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모든 걸 변하게 한다.

리프니에 자신마저도.

“당분간 혼자 있고 싶네요.”

리프니에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여신님.”

“그 사람이 배신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랐네요. 어쩌면 그 사람이 배신할 걸 알기에 저도 일을 서둘렀고, 그 사람 또한 배신을 빠르게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리프니에가 손을 저었다.

방안에 익숙한 어둠이 커튼처럼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루페르트 가우저. 저에겐 당신이 있으니.”

“여신님.”

엉거주춤하게 선 루페르트를 보며 리프니에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조금 못 미덥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문이 열렸다.

루페르트는 예를 표하고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가 그를 불렀다.

“네. 여신님.”

“당신은 티그리트처럼 절 배신하지 않겠죠?”

“저는 그 사람과 다릅니다.”

“제가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죽여도?”

어둠 너머로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종잡을 수 없는 리프니에의 감정선에 루페르트는 강한 혼란을 느끼면서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소중한 사람이 없습니다.”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리프니에의 중얼거림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켜보겠어요.”

* * *

마법 대학만큼 재능의 크기에 민감한 곳도 없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마법의 재능은 명확하게 눈에 보이며 측정 가능하니까.

생판 얼굴도 모르는 놈이 갑자기 학교에서 기대받는 유망주가 되기도 하고 오래전부터 명성을 누리던 학생이 갑자기 집단으로 추월당해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학생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최고 중의 최고만이 점과 선에서 벗어나 ‘도형’이 될 수 있다.

그 도형 중에서 정점에 오른 자만이 오각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고.

제국을 대표하는 오각의 마법사 중 하나인 눈먼 자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여느 오각의 마법사처럼 수많은 전설과 뒷이야기를 가진 사람이다.

여느 오각의 마법사처럼 그의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다.

혹자는 백 살이 넘었다고 말하고, 혹자는 이 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의 나이가 팔십을 넘은 건 사실이다.

그의 저서 마법제요는 출간된 지 50년이 흘렀으니.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의 나이는 초로의 사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흰머리와 흰 수염이 어색하게 보일 정도로 맑고 주름 없는 피부도 또 다른 어색함으로 다가왔다.

그 강력한 마법사는 최근 제자를 한 명 받았다.

“피리스.”

나이는 들었지만, 재능의 크기만은 인정된 친구다.

하지만 그보다 마법사의 구미를 끈 건 그녀의 출신 성분이다.

그녀는 무려 황제와 연줄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재능이 있는 건 사실이다.

노력하면 삼각의 마법사 정도는 될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극적인 효과를 노리려면 오각은 아니더라도 사각의 마법사 정도는 되야 한다.

대학의 마법사 중 황제와 연분을 쌓은 저 사각의 마법사 지겔슈타트처럼 말이다.

‘대학과 정치가 무관하다고 하지만, 세상에 완벽하게 독립된 건 아무것도 없지.’

대학의 운영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 자금을 대는 게 바로 제국 정부다.

황제와 친해져서 나쁠 건 없다.

단지, 둘이 너무 친해지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 특히 권력자들이 보기에 좋지 않은 결과로 이뤄질 거 같아 다들 몸을 사리는 것뿐이다.

저 짖는 자 프리츠 에센바하가 오각의 마법사의 체통도 잊고 황제의 경비견 역할을 한 걸 보면 명확하다.

황제와는 친분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피리스의 재능은 명확하다.

남들보다 뛰어나지만 압도할 수 없다.

이 정도로는 황제의 감동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

진한 실망을 안고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의 재능은 한계가 엿보이는구나.”

“그, 그런가요?!”

피리스가 고양이처럼 큰 눈에 강한 실망과 공포감을 띠며 물었다.

“너 스스로 생각해라. 너의 벽을 깰 방법을.”

재능이 없는 자가 재능 밖의 힘을 얻을 방법은 하나뿐이다.

금지된 지식을 얻는 것이다.

그중엔 악마가 집필했다는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의 마도서도 있었다.

눈먼 자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그 책을 제자의 눈에 잘 띄고 제자의 손이 닿을 수 있는 서가에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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