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25화 (125/225)

125화 32. 마녀의 비약 (1)

대부분의 하층민처럼 베르크 란도 미신을 믿었다.

현재 제국의 농촌에선 빨간 명찰을 단 구걸하는 자들이 미신적 공포의 대상이 되었지만, 베르크 란이 어렸을 때 부르봉의 농촌에서는 마녀에 대한 공포가 밤의 난롯가를 지배했다.

나이가 지긋하다기보다는 노화가 빠르게 찾아온 할머니들이 손자와 손녀를 안고 마녀에 대한 악담을 아이들에게 주입했고, 그 아이들은 커서도 마녀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심을 키워 나갔다.

종교 재판이 횡행하는 시대에 그런 교육은 바람직했다.

주입 받은 공포심 덕분에 마녀에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마녀가 재판을 받을 때 연루될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어릴 때의 공포심이 초로의 나이까지 연장되리라고는 베르크 란도 생각하지 못했다.

‘마녀!’

“할아버지. 갑자기 왜 그래?”

베르크 란만큼이나 놀란 건 마를로네였다.

조부가 그렇게 놀란 건 처음 보았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베르크 란을 루페르트에게 무례에 대한 용서를 눈빛과 표정으로 구했다.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어 보인 후 마녀를 돌아보았다.

“클라인하르트라는 분의 소개를 받고 왔다.”

루페르트가 서찰 하나를 마녀에게 내밀었다.

마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글을 모른답니다. 하지만 이 문장은 눈에 익군요. 게다가 여기를 알고 찾아오셨다는 건 그분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겠지요.”

“글도 모르는데 약을 만든단 말인가?”

“우리의 지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지요.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지식이 진정한 지식입니다. 문자라는 건 진정한 의미를 곡해하고 오해의 여지를 만드니까요.”

“이자를 고칠 약을 만들 수 있나?”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을 돌아보았다.

베르크 란은 여전히 마녀가 못마땅한 눈치다.

어쩌면 저 마녀가 어릴 적 난롯가 옆에서 생각하던 마녀와 지나치게 일치해서 베르크 란의 반감을 더 키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강한 사람이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 또한.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도 알고 있다.

그는 천천히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의 불편한 팔과 다리를 마녀에게 보였다.

마녀가 베르크 란의 팔을 덥석 잡았다.

베르크 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의 손녀가, 하나밖에 없는 손녀가 그의 멀쩡한 손을 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마리.’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일말의 죄책감이 지나고 갔다.

마를로네는 그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한 채 그저 걱정하는 눈빛으로 조부를 올려다보았다.

“귀인께서 함께하고 계시잖아.”

“오냐.”

베르크 란이 허리를 폈다.

잠시 주춤거리던 황제의 챔피언은 죽음에 맞서던 과거처럼 마녀 앞에서도 의연하게 행동했다.

“마차에 깔리기라도 한 건가?”

마녀가 베르크 란을 보며 킬킬 웃으며 물었다.

추악하게 나고 싯누렇게 변색한 뻐드렁니를 보며 베르크 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투의 상처요.”

“도펠죌트너라고 했던가.”

마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를 돌아보았다.

“명찰을 달고 있다고 들었는데. 피처럼 빨간.”

“우리는 사면 받았소.”

“그렇구만.”

뒤이어 진찰이 시작됐다.

마녀는 베르크 란에게 팔을 구부려 보라고 요청하기도 했고, 손가락을 구부린 채 이런저런 각도로 움직여 볼 것도 요구했다.

베르크 란은 묵묵히 시키는 대로 했다.

“힘줄이 끊어졌고. 뼈도 이상하게 붙었고. 아주 심하게 당했구만. 살아난 게 용할 정도야.”

“고칠 방법이 있는 거요?”

“딱히 어려운 건 아니야. 고통에 견딜 수 있는 악다구니만 있으면 돼.”

마녀가 도구함을 뒤적거리더니 섬뜩한 사슬톱을 꺼내 왔다.

“팔을 가르고 끊어진 힘줄을 이어 붙일 거야. 겸사겸사 휘어진 뼈도 다시 부수고 이어 붙여야 하고.”

마녀가 베르크 란을 음습한 녹색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어때? 참을 수 있겠나?”

“바로 시작하시오.”

베르크 란이 즉답했다.

섬뜩한 도구에도 그는 일말의 공포도 내비치지 않았다.

마녀가 미소 지었다.

“처음엔 겁쟁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대담한 자군. 하긴, 겁많은 자가 죽은 신의 피를 마신다는 게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잠자코 있던 루페르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죽은 신의 피라고?”

“아, 귀하신 분이여. 성함도 모르고 신분도 모르지만, 그분이 직접 보낼 정도면 충분히 귀하신 분이겠지요.”

마녀가 호들갑을 떨며 루페르트에게 고개를 넙죽 숙였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마녀.”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 정도는 아니지만, 그도 마녀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베르크 란처럼 난로 옆에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지만, 목동 시절 동료들에게 마녀에 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고 황제 시절에도 마지막 마녀 재판을 직접 보기도 했다.

그 마녀들의 죄상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살아 있는 아기를 부글거리는 가마솥에 집어넣는 인간들이니.

그러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괜찮겠습니까?”

마녀가 히죽 웃었다.

“뭐가?”

“교회는 지식을 죄로 취급하지요. 안다는 것만으로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소리지요.”

마녀가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를 돌아보았다.

루페르트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가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벌을 받을 수 있다는 표현이다.

루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누가 나를 벌하겠는가. 나를 벌할 수 있는 건 여신님뿐이다.’

“……이야기는 나중에 듣지. 먼저 이 사람을 치료해라.”

“네. 귀하신 분이여.”

마녀의 비웃는 듯한 흥얼거림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오두막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마를로네의 손이 틈새를 잡았다.

그녀도 오두막을 나가고 싶은 눈치다.

황제와 한 소녀가 나란히 서서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잘 정리된 농경지 너머 솟은 작은 숲과 언덕이 보인다.

저 숲은 위버하임 남작 영지에 딸린 사냥터이며 그 위에 솟은 초록색 언덕은 루페르트가 남작 시절에 종종 올라가 풀 속에 누워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회귀 직후 맹렬하게 자신을 단련하며 자질을 키워 나가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무 의미도 없는 수치 하나에 목숨을 걸었지. 결국 여신님 말대로 나는 사람을 쓰는 사람일 뿐인데. 그나저나 이렇게 가까운 곳에 저런 마녀가 살고 있었다니.’

기이한 일이지만 역으로 보면 이쪽이 합리적이리라.

신통한 의술을 가진 마녀를 숨겨 둔 대주교 입장에선 이왕이면 황궁 가까운 곳에 숨기는 쪽이 마녀의 의술을 보다 요긴하게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외부인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니 아마 꽤 많은 손님을 받았던 모양.

마녀의 오두막 주위로는 아마 전부 대주교의 땅이리라.

개울을 끼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농사짓기 좋은 땅임에도 방대한 토지를 놀려 두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크아아아아악!”

오두막 안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를로네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치료가 시작된 모양이군.”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놀라지?”

“그, 그게. 할아버지가 저렇게 어린아이처럼 고함지르는 건 처음 보거든요.”

“그래?”

“아마. 마녀가 무서워서 그런 것일지도요.”

마를로네가 루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진짜 신통력 있는 거 맞을까요?”

“글쎄다. 하지만 대주교가 추천한 사람이다. 약간의 신통력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그렇군요.”

마를로네가 뒤로 팔짱을 낀 채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발끝으로 살살 굴렸다.

마름모꼴의 돌멩이가 끝으로 서나 싶더니 이내 다시 바닥에 납작하게 누웠다.

“……고마워요.”

마를로네가 돌멩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 목소리지만 마를로네는 확실하게 감사를 표했다.

“할아버지도 저도 알고 있었어요. 이대로 할아버지의 상처가 영영 낫지 않으리라는걸. 그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죠. 그런 거 있잖아요? 사형수들이 모인 감방에서 사형수들이 매일 수다를 떠는데 그들 중에 사형 집행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왜 그럴까?”

“외면하고 싶은 심리가 아닐까요? 앞에 중대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확실히 그런 게 없잖아 있지.”

루페르트는 한숨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대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군.’

루돌프.

아니 이제는 티그리트라고 정체를 밝힌 과거의 황제.

그는 이제 루페르트의 적이다.

그가 말했다.

1년 뒤에 황제직을 돌려받겠다고.

어떻게, 무슨 수로 돌려받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 강철처럼 단단하고 사자처럼 강인한 육체에 찍힌 낙인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티그리트의 묘사와 일치했다.

진짜 티그리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가 사라진 후 루페르트는 그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회피하고 외면했다.

다른 문제, 이를테면 레벤호스트의 처리에 관한 문제에 노골적으로 집중했다.

방법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떤 황제가 천 년 전의, 그것도 제국을 건국한 황제와 다툼을 벌이겠는가?

이건 여신에게도 상담할 수 없는 문제다.

티그리트의 이야기를 논한다는 건, 곧 루페르트가 여신을 배신한 이야기와 맞닿아 있으니까.

‘어떻게, 어떻게 하란 말이야.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대체 내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난 그저 제국이 망하지 않는 걸 바랐을 뿐인데.’

애써 외면했던 문제를 떠올리는 순간 루페르트의 온몸은 격정에 휩싸였다.

그토록 감정을 잘 다스리고 숨기는데 능했던 루페르트조차 온몸을 덜덜 떨고 자기도 모르게 눈가에 충혈될 정도의 눈물이 고일 정도로.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 정도로 중대한 문제였다.

“폐, 폐하……?”

이렇게 되자 정작 놀란 건 마를로네였다.

‘나, 무슨 해서는 안 될 이야기라도 한 거야?!’

“아아아아아악!!!”

오두막 안에서 베르크 란의 처참한 비명이 재차 들려왔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소름이 돋을 정도의 비명이다.

마녀의 비열한 웃음이 뒤를 이었다.

“키키키키키! 노병 주제에 엄살이 심하구만! 자 그럼 접합을 시작해 볼까?!”

루페르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감정에 휩쓸렸다는 걸 알아차렸고, 약간의 수치심과 함께 오랫동안 참아 왔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저기.”

마를로네가 손수건을 꺼냈다.

“닦아 드려도 될까요?”

그녀는 루페르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뭐가 이 사람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한 걸까? 그때 그 거신?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저 사람은 태연했어.’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가만히 보다 손을 내밀었다.

직접 닦겠다는 소리다.

마를로네가 손수건을 루페르트에게 건넸다.

루페르트는 손수건을 보았다.

전에 쓰던 걸레 같은 헝겊 조각과 달리 고급스러운 소재에 아름다운 자수가 박힌 상품이다.

손수건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그런데.

“음?”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던 루페르트가 흠칫 굳었다.

“폐, 폐하?!”

“이, 이거 어디서 받은 거지?”

“이 손수건요? 아, 울피아나 님이…….”

루페르트의 눈에 더 많은 눈물이 맺혔다.

“폐하?!”

“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루페르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아 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세상이 날 죽이려 드는군. 이 세상 전체가.’

마를로네가 호의로 내민 손수건에도 루페르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 손수건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니야. 매우 마음에 들어. 정말 좋은 향기군.”

“그런데 더 슬퍼 보이시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어쩌면 말이야.”

루페르트는 멀리 보이는 그리운 언덕을 응시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과거를 그리워하는지도.”

“과거.”

“그래. 과거.”

이제는 저기로 돌아갈 수 없다.

기다리는 건 지긋지긋한 것들과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들.

즉, 감당하기 어려운 미래다.

“저기.”

마를로네가 바닥을 보며 입을 열었다.

루페르트가 그녀를 응시하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에 목동 일을 하셨다고 말씀하셨죠?”

“그랬었지.”

“거세한다던데요?”

“뭐?”

“아는 목동한테 물었더니 그게 목동의 주된 일 중 하나라고.”

“갑자기 그건 왜 이야기하는 거지?”

“그냥 떠올라서요.”

엉뚱하기 짝이 없는 마를로네의 태도에 루페르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거세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군. 오싹하게도.’

그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마를로네가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진짜 목동 일 하신 거 맞으세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웃음기가 가시기 전에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거기엔 창백하지만 결연한 눈빛을 번득이는 베르크 란이 한 손을 부여잡은 채 당당하게 서 있었다.

베르크 란이 자신의 오른손을 움직여 보았다.

피로 물든 다리도 움직여 보였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붕대에서 피가 배어들었지만, 오므렸다 펴는 그의 손가락엔 과거의 무자비한 힘참이 느껴졌다.

전사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 다시 싸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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