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31. 지긋지긋한 것 (4)
선제의 칙령을 폐기한다는 건 선제에게 도전하는 행위와 같다.
철혈대제가 제위에서 물러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제국 곳곳에서는 여전히 그를 기리는 사람이 많다.
철혈대제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그의 강력한 치세 중에 이득을 가장 많이 본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루페르트가 속한 슈발츠마인 쪽에 철혈대제의 지지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도펠죌트너라는 집단은 이미 저물어 가고 스러지는 존재.
그들이 실제로 힘이 있고 이득을 줄 수 있다면 그들을 돕는 것도 분명 한 가지 선택지일 수도 있겠지만 늙어 가고 잊히는 그들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서 군주나 귀족 중에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책은 지지를 필요로 한다.
황제의 권위로 밀어붙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권위의 남용은 역으로 황제의 권력을 약화하고 무너뜨리는 단초가 된다.
“선제의 칙령을 폐기한다라…….”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위험성도 잘 알고 있다.
그 실익을 판단하려는 것도 중신들을 불러 모은 이유 중 하나다.
결과는 예상 그대로였다.
아무런 실익이 없음.
미래를 알지 못하는 그들은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폐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 덕에 그는 빨간 명찰을 뗐고, 명예로운 제국 시민 중 한 명으로 구걸할 필요가 없는 평생의 안락함을 얻었습니다. 그 정도면 그에게 충분한 은전을 베푼 것이 아닐까요?”
오토 브라에의 말은 제국 기득권이 생각하는 전형을 제시했다.
할 만큼 해 줬다는 소리다.
오히려 그 이상 특혜를 베푸는 건 반발을 살 여지가 있다고 베르너가 덧붙였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칙령을 폐기하는 건 너무나도 위험하다.
혹 떼려다 더 많은 혹을 붙이는 행위다.
안젤리나가 마련해 준 신하들은 대단히 유능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로서도 루페르트는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방안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루페르트가 하려는 일은 단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 나아가서는 리프니에라는 루페르트의 가장 중요한 것과도 연결된 문제니까.
루페르트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대주교가 찾아온 건 루페르트의 심기를 대단하게 불쾌하게 했지만, 의외로 그는 괜찮은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크 란? 아, 선제가 쓰던 그 도펠죌트너 말이군요. 그가 뭐, 장군직을 바란답니까? 그가 뭘 요구하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목마른 자에게 반드시 물을 줄 필요는 없는 법입니다.”
“물을 줄 필요는 없다고요?”
“수분이 많은 과일을 제공하는 것도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방법은 물에 젖은 솜으로 입술을 간신히 축이게 하는 것이지요.”
“그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아카이아 대주교가 노회한 눈을 번득이며 말을 이었다.
“신이 인간을 시험하는 것처럼, 그에게 움직일 힘만을 주는 겁니다. 스스로 물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호오.”
루페르트는 좋지 않은 예감을 받았다.
아마 아카이아 대주교 본인이 걸어왔을 음험하고 비열한 모략에 관한 이야기리라.
하지만 그는 평생을 성공해 왔다.
마지막에 시대를 잘못 타고나 소리 없이 죽었을 뿐이다.
전성기의 그는 경쟁자를 모조리 몰아내고 철권 통치를 휘두르며 저 크로지우스마저 불태워 죽였던 책략이자 행동가다.
세속 선제후는 그들의 혈통을 내세우지만, 성직 선제후가 내세울 건 오직 자신의 능력, 특히 처신과 책략뿐이다.
그렇기에 아카이아 대주교의 말은 루페르트의 혐오에도 불구하고 새겨들을 이유가 있다.
“그가 물을 찾다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최고의 선택지겠지요.”
“그건 뭔가 대주교님과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잔혹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생각합니다. 진리를 발견하고 죽은 사람보다 진리를 찾으려다 죽는 사람이 더 신성에 더 가까이 근접한 게 아닐까 하는.”
“그런가요?”
“우리가 갈구하던 것이 막상 얻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지요. 성직자의 신분인 제가 진리에 대해 폄하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사람의 문제입니다. 줄 수 없는 걸 갈구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영원히 갈구하는 과정을 걷게 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에서 말해 본 것이지요.”
“영원히 갈구하는 상태를 유지한다…….”
잔혹한 이야기다.
사람이 사람의 운명을 갖고 논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나 대주교의 말은 잔혹한 만큼 루페르트의 마음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안젤리나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보다 작고 앳된 마를로네의 투정도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 그런 거였나.’
안젤리나는 그 박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를 끝까지 잡아 두었다.
처음엔 그녀의 대황후라는 신분이 그걸 가능케 했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베르크 란 조손을 잡아 둔 건 그들의 희망을 담보 잡았기 때문이다.
즉, 희망을 가지게 한 상태에서 보상을 주지 않고 끝없는 사역에 내몰았다.
“인간은 하나를 얻으면 둘, 더러는 셋을 바라는 법입니다. 폐하. 그 점을 유념하시길.”
아카이아 대주교는 이어서 본론을 이야기했다.
루페르트에겐 아무래도 좋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진정한 신의 이름의 세 번째 음절을 찾을 단서를 발견했다는 소리다.
프, 리에 이른 세 번째 음절의 후보는 ‘에’였다.
“프. 리. 에.”
대주교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점점 윤곽이 갖춰지는군요.”
루페르트는 그 이름이 전부터 느꼈지만, 자신이 아주 잘 아는 여신과 오싹할 정도로 닮아 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은 문제다.
지금 중요한 건 베르크 란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물에 젖은 솜으로 입술을 축이게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사람을 가지고 노는 책략은 그의 중신에게 구할 의견이 아니다.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정치적이고 현학적인 지도와 군주로 이루어진 표만을 본다.
보다 인간을 잘 아는 건 대주교다.
“프. 리. 에. 네. 그렇지요. 제가 듣기로 베르크 란은 결투로 중상을 입고 불구의 몸이 되었다 합니다.”
“고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런가요?”
“제가 잘 아는 마녀가 있지요.”
대주교가 음험하게 미소 지으며 눈치를 살폈다.
루페르트는 입속이 바짝 마르는 경멸을 느꼈다.
‘이 인간. 그렇게 많은 사람을 이단으로 불태워 죽이고도 살려 둔 이단이 있단 말인가.’
마녀는 무조건 죽여야 하는 대상이다.
용서는 없었다.
그 종교에 관대하다는 저지대 연방에서도 마녀와 관련된 사안은 제국의 이단 심문관까지 초빙해서 종교재판을 열어 고문하고 불태워 죽일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녀는 ‘악마’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름을 말해서도 안 되고, 아직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곧 태어날 악마를 숭배하는 자들.
그들의 기원은 룸 제국에서부터 이어진 종말론자들부터 비롯되며 엄청난 박해를 당하고도 끝까지 살아남아 루페르트가 보았던 멸망에 일조하는 데 공헌하기도 했다.
테타우를 습격한 융커스 베샤문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다.
그 악마는 마녀들이 섬기는 악마를 뜻한다.
“그 마녀는 비록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마녀의 치료술은 비할 바가 없지요. 죽은 사람을 살려내진 못하지만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는 건 물론이고 백내장에 걸린 맹인에게 빛을 되찾아 주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백내장은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다.
앉은뱅이까지 가지 않더라도.
당장 저 제국 성인 판텔레온조차도 백내장을 못 이겨 내지 않았던가.
명색이 제국 성인이라는 작자가 말이다.
“그 마녀를 구금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이 늙은이. 보나 마나 그 마녀가 쓸모가 있으니 자기 지배하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부려 먹었던 모양이군.’
대단히 대주교다운 일이지만 대주교의 의견은 대단히 매력적인 의견이다.
‘그래, 베르크 란의 몸을 회복시켜 주는 것으로 그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그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내 업적과 권력이 선제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레벤호스트를 이겨 내고 내전을 막아 낸다면 그때는 세상의 평가가 달라질지도 모르겠지.’
“좋습니다. 역시 제국의 대들보다운 훌륭한 의견이십니다.”
루페르트는 절반의 진심으로 대주교를 칭찬했다.
‘이런 인간도 필요한 법이다.’
황제는 제국 전체를 대표하는 자다.
제국엔 빛만이 있는 게 아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음험한 것, 비열한 것, 곰팡이와 균류를 연상케 하는 것.
그런 것들도 제국의 일부다.
루페르트는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며 대주교에게 마녀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마녀는 슈발츠마인에 있었다.
테타우를 나서면 조금이면 거리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그 마녀가 사는 마을은 공교롭게도 루페르트의 장원이었던 위버하임과 놀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 * *
“정말인가요? 할아버지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계신다는 게?”
마를로네의 표정이 밝고 기쁨에 넘칠수록 루페르트의 마음엔 그늘이 졌다.
“그렇다. 우연찮게 괜찮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 어떤 사람인가요?”
기쁨을 드러내면서도 마를로네는 약간의 경계를 드러냈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거짓을 보았고 너무나 많이 휘둘리는 인생을 살았다.
특히 권력자의 약속에 많은 상처를 받은 그녀가 루페르트의 말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안젤리나 님.’
루페르트는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부모와 다를 바 없는 그녀를 생각했다.
‘결국 저도 당신과 비슷한 길을 걸으려나 봅니다.’
루페르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마를로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마녀란다.”
“마, 마녀요?!”
역시나 소스라치게 놀란다.
도펠죌트너가 모든 곳에서 천대받는 천덕꾸러기라면 마녀는 아예 제국에 발조차 못 붙이는 존재다.
굳이 비교하자면 렌타이어마르크의 강령술사보다도 훨씬 아래로 아예 발각당하는 즉시 고문당하고 불태워지는 범죄자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를로네는 믿을 수 있다.
박해받는 사람들에겐 나름의 동료 의식이 있으니까.
“누구에게도 말하면 아니 된다. 베르크 란을 고칠 수 있는 건 그 사람뿐이니까.”
“아, 알겠어요!”
마차 한 대가 고즈넉한 교외를 느릿하게 갔다.
마차에 탄 건 3명뿐이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그리고 루페르트.
모처럼 두 조손과의 조촐한 여행길에서 루페르트는 문득 과거의, 지금보다 훨씬 더 밝았고 의지가 있었던 자신을 생각했다.
가령 리히트 보덴으로 향할 때라든가.
그때는 모두 좀 더 어렸다.
루페르트의 턱에 수염이 나지 않았으니.
지금은 매일 면도해야 한다.
수염이 많이 나고 빨리 자라는 체질이다.
베르크 란은 전보다 좀 더 늙어 보였다.
어쩌면 불구라는 마음의 병이 그에게 더 빠른 노화를 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를로네는 아름답게 자라났지만 만연한 마음의 수심이 그녀를 나이보다 성숙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침묵 속에서 마차가 한 오두막 앞에 도착했다.
오두막 안엔 넓은 차양을 쓴 추악한 노파가 가마솥에서 부글거리는 녹색의 액체를 끓이고 있었다.
“읔!”
베르크 란이 그답지 않게 경악을 보였다.
“마, 마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