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23화 (123/225)

123화 31. 지긋지긋한 것 (3)

“그, 그쪽은? 황제의…….”

“안녕하신가? 부르봉 억양의 아가씨.”

그 사내가 위압적인 체구를 구부려 정중하게 인사했다.

“티그리트라고 하네.”

‘티, 티그리트?!’

제국인의 정체성이 모호하지만 마를로네도 제국의 건국자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노예제 티그리트? 그 이름은 함부로 쓸 수 없는 이름 아니었어?’

권위적인 동방 제국처럼 모든 왕의 이름을 피휘(避諱)라는 이름으로 사용이 금지되는 건 아니지만 제국에서도 함부로 쓸 수 없는 이름들은 몇 개 있었다.

이를테면 제국 성인의 존함이라든지, 신의 명칭이라든지.

티그리트라는 이름은 가장 대표적인 이름으로 써서는 아니 될 ‘이름’이다.

“티그리트 님이 왜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당황하긴 했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권력자의 변덕을 맞춰 온 살인자답게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호하며 의도를 물었다.

“그건.”

순간 마를로네는 보았다.

티그리트라는 이름을 댄 사내의 한쪽 눈에 불길한 초록색 불길이 일렁거리는걸.

‘뭐, 뭐야?! 마법? 하지만 마법의 냄새는 나지 않는데?’

그녀가 도펠죌트너의 숨겨진 권능을 발동했다.

그건 피안을 보고자 하는 어두운 결심을 하고 세상을 다시 본다는 마음으로 사물을 다시 확인할 때다.

그녀는 죽음을 본다.

‘?’

마를로네의 몸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휘청거렸다.

‘뭐, 뭐야. 이 사람.’

한 인간의 몸에 이토록 많은 죽음이 달라붙을 수 있는 걸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검은 얼룩으로 보는 그녀의 시야 속에서 티그리트는 칠흑이다.

단 한 군데, 눈동자에 아른거리는 초록색 불길을 제외하면.

마를로네의 몸이 의지와 관계없이 격하게 떨렸다.

‘뭐, 뭐야. 이 사람. 아니, 사람이긴 해? 대체 무슨 짓을 하면, 아니 어떻게 살아야 저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내 선물을 하나 주지.”

그가 목걸이 하나를 내밀었다.

목걸이를 장식하는 건 금도 은도 진주조차 아닌 깨진 조개 조각 같은 석회류의 파편이었다.

파편 한 면에 눌어붙은 따개비의 흔적이 원래 모습을 짐작게 했다.

‘소라?’

부르봉의 바닷가에서 꽤 어린 시간을 보냈기에 그걸 알아보는 건 마를로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걸 몸에 지니고 있게.”

“이걸요?”

“그래.”

“이런 예쁘지도 않고 기분 나쁘기만 한 걸 왜 몸에 지녀야 하나요?”

“가지고 있어 보게. 어쩌면 이 세상의 비밀을 조금은 알게 될지도 모를 테니.”

티그리트라고 이름을 밝힌 사내가 돌아섰다.

마를로네는 시야를 현실로 향하며 그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안개 같기도 하고 허무로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한 그 미지의 사내는 어느 순간 유령처럼 그녀의 눈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여름에 접어드는 계절이었다.

제국의 여름은 건조하지만, 햇살은 뜨겁다.

루페르트는 인부들이 한창 뚝딱거리며 짓고 있는 여신의 새로운 신전의 완성도를 눈으로 확인했다.

꽤 걸릴 것이다.

3년에서 4년 정도?

그 정도로 충분히 공사 기간을 줄 것이다.

저 앞의 테타우 대성당만 해도 완공까지 120년이 걸렸다.

그것도 최고의 석공과 석수를 동원했는데도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대성당에 비하면 조촐한 신전이라고 하지만 루페르트는 여신을 위한 전당을 날림으로 짓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마를로네가 떠나고 그 마를로네가 한스 징펠만을 죽였다.

둘 다 나팔을 부는 것만으로 돌릴 수 있다.

하지만 나팔을 부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걸 루페르트는 잘 알고 있다.

레벤호스트의 폭주를 막아야 한다.

그 첫 단계가 마르틴 보엠이라는 자를 죽이는 것이다.

‘마를로네를 내 곁에 둔다면 레벤호스트의 호위가 가벼워질까?’

그건 아닐 것이다.

도펠죌트너를 이용한 건 안젤리나만이 아니었다.

여간한 권력자는 암암리에 갈 곳 없는 초인 병사들을 해결사로 부려 먹고 있었다.

한스 징펠만을 죽인 건 마를로네지만, 그녀가 없었더라도 다른 자가 그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암살조차 쉬운 일이 아니군.’

루페르트는 크리오네를 떠올렸다.

그 터무니없는 암살자에게 너무 쉽게 당해서 암살이라는 것을 우습게 생각한 모양이다.

사람의 판단은 경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니까.

암살이라는 치졸한 수를 결정한 것도 암살자를 보낸 것도 그 크리오네가 남겨 준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시간을 돌려야 하는 건가.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지금 상황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마르틴 보엠을 죽이는 것 말고는 별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는다.’

루페르트는 잘 알고 있다.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수가 없는 이상 레벤호스트는 마르틴 보엠 목사의 안배에 따라 내전을 향한 길을 차근차근 다질 것이고 루페르트 또한 총력을 기울여 그에 맞설 준비를 하게 될 테니까.

그 준비라는 건 결국 군비 증강과 동맹의 확보라는 해묵고 지긋지긋한 정치 공작으로 이어진다.

‘각오한 바다. 그 진흙탕에 뛰어드는 건. 하지만 내 마음이, 내 마음이라는 게 버티지 못하는 모양이다.’

인내심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성급해졌고 때때로 화를 내는 일도 잦아졌다.

회귀 전 루페르트의 지위와 권력은 비할 바가 아니다.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의 운명마저 틀어쥔 진정한 황제와 꼭두각시는 같은 선상에 놓일 게 아니니.

하지만 그 성격은 너무나도 다르다.

과거엔 꼭두각시일지언정 성격은 유순하고 유쾌했으며 여유가 있었다.

적어도 테타우가 포위되기 전까진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매사에 신경질을 느끼고 매사 초조함과 지루함을 느낀다.

그 한스 징펠만조차 말을 끊고 사지로 보냈다.

남들이 말하는 걸 듣고 싶지 않다.

명령만 하고 싶고 결과만 보고 싶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돌려서 원하는 결과를 보고 싶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루페르트는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소라고둥을 보았다.

“……회귀.”

금단의 단어를 입 밖에 냈다.

장점만 있다고 생각했다.

무한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그 앞에 나타난 회귀라는 권능은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명과 암을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는 힘이었다.

리프니에는 그가 지치는 걸 걱정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인간이 아닌 무한한 존재라서 그렇게 생각할 것이리라.

루페르트의 생각은 다르다.

회귀는 인간을 변하게 한다.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으로.

어쩌면 거기서 비롯되는 사람의 변화가 여신의 눈엔 지친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메헨부르그의 야수.”

자기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조금은 맥없는 모습으로 입에 물었다.

부우우우우우---

또 한 번의 회귀가 시작됐다.

아무런 감흥도 흥분도 없이, 그저 의무감으로.

* * *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시점은 베르크 란이 이탈하기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순결 서약을 끝내고 레벤호스트가 점점 위협적인 행보를 이어 나가던 시점.

어쩔 수가 없었다.

순결 서약은 그 자체로 루페르트의 거대한 행마 그 자체였으니.

다른 하나의 회귀 원점은 보다 앞에 있지만, 너무 앞이다.

제위가 결정된 후, 두 개의 왕관을 쓰기 전날이다.

그때부터 돌아가 뭔가 다시 시작한다는 건 어지간한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상황, 같은 대화, 같은 절망과 감정을 반복한다는 게 이제는 견디기 어려운 무언가로 변했다.

똑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더 잘할 것 같지 않다.

당장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또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그 가죽 벗기는 자를 또 어떻게 마주하고 또 어떻게 구슬리고 또 어떻게 그 피의 거인 앞에 다시 서야 한단 말인가.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등을 젖게 만드는 악의 우상을 기억의 한구석으로 치워 버리며 루페르트는 중신들에게 담판을 요구했다.

“베르크 란은 장군직을 원했다. 하지만 쉽진 않겠지. 선제의 명을 고스란히 어기는 것이니. 해서 그대들의 의견을 묻고자 한다.”

마를로네를 옆에 두려면 베르크 란을 잡아 둬야 한다.

그가 원하는 건 장군직이다.

실제로 그는 철혈대제 시절에 명예직에 가까운 장군직을 맡았었다.

도펠죌트너들의 장군이라고 할까.

철혈대제를 위해 벌인 수많은 살육과 모험에 대한 대가다.

지금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아들이 부관을 맡았다고 한다.

뭇 여성을 설레게 하는 미남이었고, 자신의 부친의 고향이기도 한 부르봉 출신의 하급 귀족 여성과 결혼을 했다고 한다.

아이는 두 명을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마를로네다.

다른 하나는 사내아이였는데 불행하게도 철혈대제가 도펠죌트너 박해령을 내린 이후 궁핍한 삶에 노출되어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베르크 란의 아내의 최후는 더 끔찍한데 그녀는 구빈원에 들어갔고, 죽음만을 기다리는 구빈원의 사람처럼 굶주림과 아우성 속에서 신음하며 가족을 기다리다 결국 홀로 지켜보는 이 없이 손을 뻗은 자세로,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고 한다.

‘왜 그토록 마를로네가 우리를 증오하는지 알 것 같군. 증오와 별개로 그들은 우리가 잡아 둘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 중신들의 의견을 기다린다.

쉽지 않다는 건 각오한 바다.

아니나 다를까 부정적인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완고한 베르너는 당연히 반대했고, 외교와 균형을 중시하는 오토 브라에도 신중한 반대론을 펼쳤다.

그나마 믿었던 요하네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사람에 대한 편애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날 위해 싸우다 그런 모습이 되었고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작은 명예의 한 줌조차 그에게 주지 못한단 말인가?”

루페르트의 시선을 마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제국이라는 나라의 한계다.

“……그의 신분은 너무나도 낮습니다.”

군주 - 귀족과 성직자 - 재산이 많은 자 - 평범한 자 - 하찮은 자.

지나치게 단순화한 감이 있지만, 제국의 실제적인 계급은 이런 식으로 나뉜다.

각 범주는 저마다 용인되는 한계가 있는데 그 한계는 하찮은 계급으로 갈수록 가혹해지고 엄중해진다.

가령 재산이 많은 자의 대표를 들라면 루페르트가 위버하임 장원에 있을 때 그를 죽이려 들었던 하녀와 부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평민이지만 돈으로 명예로운 직을 샀고 그 직함으로 제국의 밤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조차도 용인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이 귀족이라는 계급과 가깝기에 벌어진 현상이다.

하지만 평범한 자가 그런 영광을 얻는 건 어려운 일이고, 사회의 관심 밖에 놓인 하찮은 자들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는 귀족은 숫자가 적고 재산이 많은 자도 귀족에 비해 숫자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자는 어디에나 있고, 그 숫자가 너무나도 많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자보다 못한 하찮은 자가 그 평범한 자를 뛰어넘는 건 평범한 자들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언가다.

“당장 선제께서 그들에게 걸인이라는 지위를 하사했습니다. 걸인이 장군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베르너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들은 인정하겠지만, 테타우의 시민 대다수는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시골의 농부들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빨간 명찰을 달고 협박, 구걸이나 하는 무리 중에 장군이라니요? 아무리 명예직이라고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아니 되는 일입니다.”

중신들의 의견은 확고했다.

다만 요하네스가 그답게 대담한 의견을 제시했다.

“선제의 칙령을 폐기한다면 이야기가 다를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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