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31. 지긋지긋한 것 (2)
“아니, 괜찮습니다. 제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베르크 란은 고개를 숙였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잠시 그를 돌아보다 돌아섰다.
이쪽이 손을 내밀었다.
상대는 과한 보상을 요구했다.
협상은 결렬됐다.
그뿐이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우리의 관계는 이번이 끝이 아닐까 하는.
“폐하.”
뒤를 따라오는 자가 있었다.
마를로네다.
루페르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를로네.’
처음 봤을 때보다 키가 꽤 자랐다.
황궁에서 좋은 음식을 많이 먹은 게 도움이 됐는지 사내아이로 오인되던 작은 체구는 평범한 여성 수준으로 자라났다.
그래서일까.
얼굴에 여성의 매력이 물씬 묻어난다.
과거 루페르트가 선택했던 여성들처럼 풍만한 몸매는 아닐지언정 그녀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따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조용한 곳에서 농담이나 건네며 그녀와 그녀의 조부를 위로하며 다른 약속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제 루페르트는 순결 서약을 한 몸이다.
상대방에게 아무런 흑심이 없다고 하나 젊은 여성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한다는 건 구설수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황궁의 지긋지긋한 시선과 악담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아는 루페르트는 사심을 접어 두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를로네의 말을 기다렸다.
“대단히 죄송하오나 저희들에게 약간의 은전을 내려 주시면 아니 될까요? 부르봉에 가서 조부를 모시고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그래. 그대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루페르트가 집 안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조부에게도 감사를 표해라. 그의 부탁을 이뤄 주지 못하는 건 나로서도 가슴이 무거운 일이라고.”
루페르트가 시종을 불러 베르크 란 조손의 은퇴 자금에 관한 상의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야기를 끝나고 루페르트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갔다.
마를로네는 잠자코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 홱 하고 돌아섰다.
“하아.”
진한 한숨이 그녀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출신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큼 그 격차를 크게 느낀 적은 없었다.
한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산맥의 험준한 길을 함께 걷던 사내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곁에 설 일이 없을 것이다.
절반의 아쉬움과 절반의 후련함을 느끼며 그녀는 황궁 안의 작은 집에 들어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할아버지?”
베르크 란은 어느새 모든 짐을 싼 채 황궁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어, 어디 가는 거야?”
“나를 써 주는 곳으로 가야지.”
“그러니까, 어디?”
베르크 란이 가만히 마를로네를 응시했다.
곧 그가 어깨에 멘 짐을 고쳐 매며 대답했다.
“레벤호스트.”
“설마 그 사람 밑으로 가겠다고?”
“다른 방법은 없다. 마를로네.”
베르크 란이 손짓했다.
“가자.”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가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곧 루페르트의 귀에 전해졌다.
“……그래?”
루페르트는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루페르트는 홀로 그 집을 찾았다.
시종이 말한 그대로였다.
집엔 아무도 없었다.
그를 도와주고 지켜주고 한 끼의 은혜로 연결된 관계는 느닷없이 끊어졌다.
아마 영영 그들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짙은 허무감 속에서 루페르트는 푹 꺼진 바닥을 텅 빈 눈으로 응시했다.
“대체 황제란 무엇인가.”
루페르트가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소망 하나조차 이뤄 주지 못하는데…….”
대답 없는 달이 침울한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 * *
하나가 가면 하나가 온다.
렌타이어마르크 동란 때 함께했던 한스 징펠만이 마침내 일선에 복귀했다.
“다시 폐하 밑에서 모험을 하게 될 생각을 하게 되니 정말이지 며칠째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언제나처럼 우유를 찾는 이 사냥꾼은 그럼에도 전보다 꽤 수척해 보였다.
애써 명랑한 척을 하고 있지만, 그때 보았던 그 거대한 악의 우상은 여전히 그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얼룩을 새겨 버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스 징펠만은 당시에 대해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주제를 회피했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징후가 역력했다.
한스 징펠만이 걱정하는 건 주군의 상태였다.
“폐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그야, 제대로 쉬질 못했으니까.”
“정말이지 폐하는 부동심의 소유자입니다. 그, 아, 아닙니다. 분명 지쳤을 터인데 쉬지 않고 정무를 계속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주제넘는 말씀일지도 모르겠지만 폐하도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좋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
언제부터일까.
이토록 인내심이 없어진 건.
인사치레 같은 건 지루하게 느껴졌다.
빠르게 용건을 말하고 결과만을 얻고 싶어졌다.
어차피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예상과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면 다시 회귀를 해야 하니까.
루페르트는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사람 하나를 사냥해 주게.”
한스 징펠만의 입이 살짝 열렸다.
그가 놀라고 있다.
그는 이내 수염을 쓰다듬는 척하며 놀란 표정을 감췄지만 이미 드러난 감정의 동요는 루페르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루페르트는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그는 믿고 있었다.
영혼 동맹의 힘을.
“폐, 폐하의 청이라면 네. 받아들이는 것이 옳겠지요.”
“마르틴 보엠이라는 목사로 제국에 기어코 내전을 일으키려는 신교 이교도지.”
“좋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여신님의 권능. 영혼 동맹이야.’
“하지만 이건 제가 생각하는 모험과는 좀 다른 것 같군요.”
그가 예를 표했다.
“한 달 안에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루페르트는 가만히 그가 떠나는 걸 눈으로 배웅했다.
일말의 씁쓸함이 느껴졌지만, 그 씁쓸함에 반응하기에 루페르트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한스 징펠만이 제대로 본 것이다.
황제에겐 휴식이 필요하다는걸.
한 달 후. 한스 징펠만의 쌍둥이 도제가 알현을 요청했다.
그들은 작은 가방을 들고 왔는데 그 가방 안에선 시체 썩은 악취가 났다.
그들은 기어코 그 가방 안의 내용물을 황제가 봐야 한다고 요구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루페르트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면서, 그러나 그걸 내색하지 않으면서 그 가방의 내용물을 드러내라고 명했다.
가방 안에 든 건 잘린 머리였다.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그 얼굴의 주인은 루페르트의 첫 번째 영혼 동맹 한스 징펠만이었다.
쌍둥이 남매 중 누나 쪽인 루라는 훤칠하게 키가 자란 소녀가 살인자의 이름을 말했다.
“마를로네 란입니다.”
그녀가 감정이 섞이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녀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 * *
“놀랍군.”
레벤호스트가 흐뭇한 눈으로 검을 든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 가는 소녀를 응시했다.
“황제의 사냥꾼을 한 번에 처리하다니.”
평민의 복장을 한 마를로네는 고개를 숙인 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공을 세운 것 치고는 그녀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파리했고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레벤호스트는 그녀의 마음이 좋지 않다는 걸 느꼈지만 그는 하급자의 기분을 헤아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건 무슨 곤란을 겪고 있건, 이쪽은 군주이고 저쪽은 그 아래의 사람이다.
권신이든 한 번 쓰고 버릴 장기 말이든 그들의 행동은 제국을 움직이는 자신의 행동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큰 사람이 큰일을 한다.
큰 사람의 뜻이 곧 대의다.
레벤호스트는 마를로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포상으로 금화를 내리겠네.”
레벤호스트와 달리 그의 조언자 마르틴 보엠은 그의 주군보다는 타인의 마음을 읽는 데 능했다.
하지만 초록은 동색이다.
“그대 조부의 치료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군.”
한마디 격려를 보태고 선제후의 조언자는 선제후를 따라 사라졌다.
“…….”
남겨진 마를로네는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높은 천정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게 다 그 슈발츠마인 인간 때문이야.’
한스 징펠만을 살해한 건 단지 실력만이 아니다.
그는 백발백중의 명수이며 우스꽝스러운 외견과 달리 사려 깊고 심계가 깊은 사람이다.
그녀가 한스 징펠만을 죽일 수 있었던 건 정보가 있어서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됐다.
‘나, 한스 아저씨 조금은 사람으로서 좋아했다고. 그 집단에서 그나마 인간다운 사람이었는데…….’
한스 징펠만에겐 기와 루라는 쌍둥이 도제가 있다.
한스 징펠만은 그들의 부모를 죽였다.
부모를 죽이고 그 자식을 거둔 것이다.
그 부모가 죄인인 건 맞다.
무슨 죄인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철의 형제단이라는 사조직의 규율을 위반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죽어야 할 짓이었을까.
기와 루는 그의 부친이 겨우 형제단의 오래된 지식 하나를 판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마를로네는 기술에 대해 무지하다.
고작 뭔가 만드는 잡기 하나가 사람을 죽일 사유가 된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보다 그녀의 마음을 흔든 건 자신이 죽인 자의 자식을 거둬 도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도제라는 건 노예의 또 다른 표현이다.
마스터가 인정해 줄 때까지 도제는 그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야 한다.
부모를 죽인 살인자에게 봉사하라니.
“그 사람이 몹쓸 짓은 안 하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마를로네는 자신을 찾아온 쌍둥이 남매에게 한스 징펠만의 죄책을 물었다.
없었다.
전혀 없었다.
하지만 쌍둥이 남매에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들은 죽은 부모를 사랑하고 있었다.
“언니가 돕지 않으면 선제후가 죽을 거예요. 스승님은 이미 선제후를 죽일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니까요.”
“마를로네 님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그분의 도제로 살며 그분이 마를로네 님의 고용주를 죽이는 걸 도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큰마음을 먹고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마를로네 님 정도 되는 친분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 스승님은 결코 빈틈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니까요. 아니, 어쩌면.”
기가 창백한 얼굴에 미세한 의문을 띄웠다.
“이미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뜻이지?”
“글쎄요. 우리 스승님도 지쳤나 보죠.”
기의 얼굴에 끔찍한 공포가 미세하게 흐르고 지나갔다.
멀리서 보았지만, 그들도 보았다.
렌타이어마르크에 나타난 거인을.
그 거인이 반쯤 꾸며 낸 이야기로 변하고 있는 이유는 별 게 아니다.
모두가 잊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없었던 일로 삼아 버리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서다.
그걸 자꾸 생각해 버리면 자기도 모르게 미쳐 버릴지도 모르니까.
“멀리서 본 우리조차 그날의 악몽이 잊히지 않는데, 스승님은 오죽했겠어요? 안 그래도 마음이 약한 사람인데.”
“그럼에도 우리 부모님을 한마디 말도 없이 도살하긴 했지만요.”
덕분에 한스 징펠만을 죽일 수 있었다.
그녀의 조부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를로네가 벌어다 준 돈으로 기이한 무당과 주술사를 불러 그의 팔을 고치려고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엔 술병이 들려 있었다.
자신을 키워 주면서 좀처럼 술을 하지 않던 그는 이제 항상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다.
“…….”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걸 느끼며 마를로네는 두 눈을 감았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뭘 그리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나?”
느닷없는 목소리에 마를로네는 자기도 모르게 검을 뽑으며 소리가 난 방향을 노려보았다.
마를로네의 초록빛 눈동자에 의아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사람은?’
틀림없다.
안개처럼 소리 없이 나타나 루페르트와 높은 빈도로 단둘이서 이야기를 하던 흐릿한 관상의 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