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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21화 (121/225)

121화 31. 지긋지긋한 것 (1)

여름이 되자 레벤호스트의 도전은 점점 대담해졌다.

그는 외국 군주와 잇따라 사돈 관계를 맺었고 제국 선제후에게도 끊임없이 손을 뻗치며 동맹 관계를 구축하려 했다.

아직 군대를 모집한 건 아니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의 화약고엔 도시 전체를 날려 버릴 정도의 화약이 넘쳐흐르고 병기고엔 문을 뚫고 나올 정도의 창과 총이, 마구간에도 영원히 해치우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건초가 쌓이고 있다고 한다.

이제 사람과 말만 부르면 된다.

전쟁을 원하는 이는 얼마든지 있다.

제국이 부유하고 강성하다 하지만 그 부는 소수 귀족과 군주, 성직자에게 집중됐다.

가난한 자는 늘 가난했고, 있는 자는 늘 가난한 자의 몫을 더 뺏으려 들었다.

가난한 자는 제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제국보다 혼란하고 피폐한 타국에서는 한 푼 금화를 위해서 얼마든지 타인을 죽일 수 있는 자세가 된 병사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최근 대륙에서는 전쟁이 거의 없었다.

북방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던 스베아 왕국와 야디슈 왕국의 전쟁도 절반의 승리와 패배로 화의를 이루었다.

스베아 왕은 전쟁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며 사람들이 수군거리지만 스베아 왕이 야디슈 왕국이 자랑하는 창 기병대를 야전에서 처참하게 박살 낸 건 사실이다.

그가 물러난 건 야디슈 왕이 청야전술을 펼친 데다가 궁핍한 봄이 식량 사정을 메마르게 해, 본국의 귀족들이 귀환을 애원했기 때문이라는 소문 또한 조심스레 퍼져 나갔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지난 전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스베아 왕은 어쩌면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를 노릴지도 모른다고.

바로 제국 말이다.

레벤호스트는 그 스베아 왕과도 친분을 다지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군.’

루페르트는 넌더리를 느꼈다.

그놈의 정치 공작.

그 레벤호스트의 정치 공작질을 다시 보려니 두통이 몰려왔다.

그 역겨운 행태는 회귀 전에도 진저리나게 경험한 바다.

‘대체 그게 어디가 재밌는 거지?’

레벤호스트는 정치 공작을 즐기는 인간이었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기에 끊임없이 공작을 펼치고 사람들이 그에 따라 움직여 주는 걸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이었다.

루페르트에게 그건 구역질 나는 취향에 불과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그 지긋지긋한 정치 공작을 즐기는 레벤호스트의 도전에 정면으로 맞설 필요가 생긴 것이다.

루페르트가 동방에서 수입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자신의 중신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오토 브라에.”

이제 명실상부한 독신의 몸이 된 루페르트는 그와 달리 저마다 가정을 이룬 중신들을 모아 놓고 의견을 물었다.

“선제후는 선을 넘고 있습니다. 그냥 놔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레벤호스트가 이제 명백한 황제의 적이라는 데는 나머지 중신들도 동의했다.

문제는 그를 어떻게 처리하냐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와는 다르다.

턱이 녹아 제대로 씹지도 못해 가느다란 관으로 간신히 음식을 먹으며 연명한다는 선제후와 달리 레벤호스트는 신교 동맹이라고 인가받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아는 강력한 종교 공동체의 일원이다.

황제가 그를 섣불리 건드리면 게오르크 아르님과 막스 게오르크를 동시에 자극할 것이다.

제국 절반을 적으로 돌린다는 이야기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레벤호스트와 루페르트가 일대일로 승부하는 것이다.

선제후 자격으로서 일대일로 경쟁한다면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때처럼 루페르트는 능히 그를 찍어 누르고 무릎 꿇릴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레벤호스트가 과연 그 뻔한 수에 당해 주냐다.

“선제후의 전략은 동맹을 늘리고 이쪽을 고립시키는 겁니다. 모든 정치적 행보가 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베르너가 현재 상황을 정리한 문서를 내밀었다.

루페르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레벤호스트. 대체 무엇이 그대를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만든 것이지?’

레벤호스트가 확보한 잠재적인 동맹은 신교 동맹, 굵직한 이웃 강대국이 아니라 생소한 소국의 군주와 수도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교도인 동방 종교의 전쟁 무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 전쟁이 벌어지면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겠지만 레벤호스트가 역겨울 정도로 열심히 외교적 행보를 이어 나가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제가 볼 땐.”

잠자코 있던 요하네스가 입을 열었다.

“암살도 좋은 선택지라 보입니다.”

“암살이라고?”

루페르트뿐만 아니라 다른 중신들의 얼굴에 불쾌감이 떠올랐다.

“그건 레벤호스트보다 더 선을 넘는 행위야. 레벤호스트.”

완고한 베르너가 질책했다.

“모두를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

오토 브라에 또한 비관적인 의견을 말했다.

그들의 시선은 황제에게 향했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요하네스를 지그시 응시했다.

“자세히 말해 보게. 요하네스.”

“선제후를 암살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는 암살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르틴 보엠 목사라는 신교 광신도가 레벤호스트 선제후를 꼭두각시처럼 움직인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흐음.”

“저처럼 한미한 집안은 잘 모르겠지만 공작 이상의 훌륭한 가문은 어김없이 신교나 구교의 고위 성직자가 가정교사를 명목으로 똬리를 트고 앉아 열심히 어린 자제들에게 그들의 사상과 적개심을 주입하지요. 레벤호스트 선제후도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루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르틴 보엠이라.”

그는 군주 계급에 비하면 하찮은 인간이다.

귀족이라고 하지만 하급 귀족이고 하급 귀족 따위는 대외적으로 이름만을 사용하는 군주들의 세계에선 작은 인간이다.

성직자로서도 대단치 않다.

구교와 달리 수직적인 교단을 가지지 않는 신교 특성상 그는 여러 목사 중 하나일 뿐이다.

그저 권세를 업고 돈이 많은.

목사들 세계에선 그건 구교의 고위 성직자에 걸맞은 지위지만 외부에선 볼 땐 단지 일개 목사다.

“그 인간을 죽인다고 일이 해결될까?”

“레벤호스트 선제후와 마르틴 보엠 목사는 사실상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이긴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마르틴 보엠 목사 쪽이 좀 더 교활하고 머리를 잘 쓴다고 하더군요.”

“그래?”

루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내막이 있었나.’

회귀 전에 루페르트는 마르틴 보엠이라는 이름을 잘 알지 못한다.

어쩌다 얼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페르트에게 있어 마르틴 보엠이라는 자는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레벤호스트의 그늘에 가려진 잘 보이지 않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레벤호스트가 그 작은 인간의 꼭두각시라니.

과거라면 믿지 않았겠지만, 군주의 세계에서 확고히 뿌리내린 루페르트는 대충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별거 없었다.

그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도 결국 평범한 개인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저마다의 욕망과 우둔함, 가끔의 고결함으로 움직이는.

“나는 그 마르틴 보엠이라는 자가 죽는 걸 보고 싶군.”

루페르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오토 브라에와 베르너가 깜짝 놀란 얼굴로 루페르트를 보았다.

“암살이라니요.”

암살은 제국의 금기다.

비열한 동방 제국이나 부르봉에서나 하는 짓이다.

그런 천박한 짓을 황제 스스로가 하겠다고 나설 줄이야.

아무리 유연한 사고를 가진 그들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그가 위험하다고 하나, 암살은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폐하가 힘겹게 쌓은 평판을 한 번에 날려 버릴까, 그게 두렵습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지만 루페르트의 마음은 거의 기울었다.

아마 그의 생각을 바꾸게 한 건 그에게 시린 고통을 안겨다 주었던 거인일 것이다.

‘크리오네. 그 녀석에게 당해 봐서 알아. 암살이라는 건, 결국 죽인다는 거 아닌가. 죽음은 절대적이다.’

또 약간의 흥미도 있었다.

레벤호스트라는 그 잘난 척하는 인간이 마르틴 보엠이라는 책사를 잃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과연 전처럼 잘난 척을 하며 나댈 수 있을지, 아니면 벌거벗은 임금처럼 어리석은 파멸의 길로 들어설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도 무릎 꿇린 나다. 너라고 해서 못 꿇릴 거 같으냐?’

문제는 방법이다.

선제후가 아닌 일개 목사라고 하나 늘 선제후 곁에 붙어 있는 그의 경호 수준이 선제후와 거의 같다는 건 주지의 사실.

누구를 암살자로 파견하느냐.

루페르트는 얄궂게도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을 떠올렸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들은 전에도 비슷한 일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루페르트는 자신의 망각을 자책했다.

‘베르크 란을 돌아본다는 게.’

그가 없었다면 지금도 없었다.

그는 두 번이나 목숨을 걸고 루페르트를 구했다.

권력자가 하급자의 선의를 잘 잃어버린다고 하지만 루페르트는 적어도 그에겐 뭔가를 해 줄 생각이었다.

“회의를 종료한다.”

* * *

“할아버지.”

그저 하나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삶이란 얼마나 비참한 삶인가.

그 기다림의 끝에 풍족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걸 알고 있어도 그건 못할 일이다.

마를로네는 시간이 흐를수록 황궁의 생활에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인간이 우리를 안 찾은 지 두 달이 흘렀어. 그놈의 순결 선언이니 뭐니. 우리를 까맣게 잊은 거겠지. 이름이나 기억할까.’

그녀가 지금까지 기다린 건 사랑하는 조부가 마음을 고쳐먹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토록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면 그의 조부도 조금은 회의를 느끼고 고개를 돌리지 않을까.

“…….”

베르크 란의 상태는 이제 확정됐다.

그는 불구가 되었다.

황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고 황제의 직을 지켜 낸 건 물론이며 제국의 안녕까지 지켜 냈지만, 그가 얻은 건 그저 빨간 명찰을 떼고 약간의 금전적, 생활적인 보장을 얻은 게 전부였다.

망가져 버린 팔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이제 전처럼 도펠죌트너의 대검을 쥘 수 없고 적진 사이에 뛰어들어 사자처럼 날뛸 수도 없다.

그는 이제 오른손이 잘 다물어지지 않고 한쪽 다리를 저는 초로에서 늙은이로 나아가는, 쇠락해 가는 영혼이다.

“우리 이제 부르봉으로 돌아가요.”

마를로네가 건조하면서도 은근히 애원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해 약간의 은퇴금을 더 마련하도록 할게요.”

“아직은 아니다.”

베르크 란이 말했다.

“내 잃은 지위를 돌려받기 전까진 여기를 나설 수 없다.”

“그렇군요. 할아버지. 그런데 그 지위가 우리에게 뭘 해 줄 수 있나요? 이름뿐인 지위가 아닌가요?”

“아무것도.”

베르크 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왜?”

“하지만 내가 그 지위를 찾는다면 제국을 위해 죽어 간 나의 전우들이 기뻐하겠지.”

“…….”

마를로네는 입이 근질거리는 걸 간신히 참았다.

‘사람은 죽으면 끝인데, 대체 왜 그렇게…….’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오고 있다.

뒤에 줄줄이 많은 인간들을 부속품처럼 끌고 다니는 건 다름 아닌 루페르트다.

‘황제!’

그가 실로 오랜만에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를 찾았다.

누구보다 기뻐한 건 베르크 란이었다.

“폐하!”

그는 서둘러 옷을 정리했다.

마를로네가 차분하게 그의 재킷을 정리하고 잠그지 않은 단추를 대신해서 잠가 주었다.

베르크 란이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그래.”

루페르트가 조손이 사는 집을 가만히 돌아보았다.

황궁 정원 안에 그림처럼 자리 잡은 집은 내부는 단출했지만 필요한 물건이 모두 있었고, 잘 정돈되어 보기가 좋았다.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에게 물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시오.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드리리다.”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환희가 떠올랐다.

곧 그가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권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허울이면 충분합니다. 단지 저에게 장군, 제국의 장군 지위를 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잃어버린 동료들을 모아 한 번의 사열을 하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루페르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석한 베르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려운 일입니다. 도펠죌트너의 복권조차 문제가 되는데 그를 장군으로 삼는다는 건…….”

루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베르크 란에게 말했다.

“다른 건 없소?”

베르크 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별다른 숙려도 고민도 없는 거절에서 베르크 란은 뼈저리게 느꼈다.

비참한 삶에서 억지로 부여잡고 있던 자신의 꿈이,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는 신기루 같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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