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30. 루돌프 (5)
황제의 순결 선언이 끝났다.
울피아나가 대담하게 그와 함께하려 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이 소문은 빠르게 제국의 수레와 말을 통해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루페르트를 주시하던 군주들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고, 저마다의 주판알을 두드렸다.
“루페르트. 그 친구가 기어코 그 큰일을 해내는군.”
북방의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은 솔직하게 루페르트를 인정했다.
“그 정도 결의가 있는 자가 제국의 구원을 운운한다면, 뭐 인정해 줘야 하지 않겠나?”
막스 게오르크는 루페르트의 진의를 의심하긴 했지만 그 또한 황제가 될 자격이 있는 자. 루페르트의 선택을 기꺼이 반기며 자신의 아들을 불러다 넌지시 말했다.
“너는 그렇게 대성할 인물 앞에서 성질을 부린 것이냐?”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 정도 인물이라는 걸 메헨부르그에서 알아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누이가 웃으면서 한마디를 보탰다.
“당시 황제 폐하는 그리 대단해 보이진 않았던 거 같아요. 기백 같은 건 분명 있었겠지만. 하지만 얼마 전에 봤을 땐 사람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래?”
“네. 혼백이 몇 번이고 달아나는 경험을 한 사람처럼 눈은 퀭하고 피부는 창백하며 무엇보다 볼이 움푹 들어가 있었어요. 수더분하지만 도련님 같던 분위기는 하나도 나지 않더라고요.”
선제후 중 가장 골머리를 앓는 건 골트문트다.
“울피아나. 울피아나. 밖으로 나오거라. 식사를 안 한 지 일주일이 넘었잖냐. 전에도 단식을 했는데…….”
울피아나가 다시 단식에 들어갔다.
대중 앞에서, 아마 황제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크게 한 방 먹은 울피아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어쩌면 회복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골트문트가 더 염려하는 건 그녀의 추락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잘 알고 있다.
그 왜곡된 집념이 꺼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별들이 그녀의 운명을 그렇게 정해 놓았으니.
끔찍한 일이지만 골트문트는 그런 자신의 딸을 사랑한다.
죽은 아내를 위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마지막까지 딸의 소망을 옆에서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괘씸하다는 건 사실이다.
‘거기서 그렇게 매몰차게 내쳐야 했나. 아무리 울피아나가 상궤를 넘는 짓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완곡하게 포용해 줬으면 이 사달은 안 났을 거 아닌가.’
루페르트에 대한 악감정이 무엇으로 이루어질지 아직 골트문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수하들은 끊임없이 연락을 취해 오고 있다.
저 레벤호스트.
트라이아의 선제후가 기어코 큰 사고를 터뜨릴 거라고.
* * *
“루페르트 가우저. 수고했어요. 당신의 결단은 정말로 아름답더군요. 제국을 위해 많은 걸 포기하는 당신의 의지를 보니 솔직하게 저도 약간은 감동했답니다?”
소라고둥이 간만에 말을 걸어왔다.
홀로 침대에 누워 있던 루페르트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루돌프 님은 어떻게 된 거지. 크리오네를 처리한 걸까.’
“저기 그때 빌려 간 검은 어떻게 됐나요?”
“그 검 말입니까?”
“네. 그게.”
“괜찮아요. 천천히 돌려줘도. 다만 그 검은 워낙에 인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깃든 물건이라 바깥에 오래 놔두면 누군가를 해치게 되거든요. 이 점을 유념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여신님.”
소라고둥이 우뚝 선 채 마치 그를 바라보는 것처럼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여신이 온화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 여신님.”
루페르트는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죠?”
“네. 그렇습니다.”
“어떤가요? 순결 선언이라는 초대형 도박을 한 현재의 심정은?”
“으음. 그다지 좋지는 않군요.”
“그렇죠. 군주의 행복 중 가장 큰 걸 거세했으니.”
“거세라.”
“당신이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그런 표현을 즐겨 쓰더라고요.”
소라고둥이 웃었다.
“조, 좋아하다니요.”
“그 금발 계집. 좋아하지 않나요?”
“아닙니다. 조그만 녀석을 좋아하는 취향은 없습니다. 여신님도 보셨겠지만, 제가 사랑했던 연인들은 모두 다 컸죠. 그, 그러니까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흐음~?”
“단지 상대하기 편한 것이겠지요.”
루페르트가 맥빠진 표정을 지으며 이실직고했다.
“그 녀석만큼 만만한 사람은 이 황궁에 아무도 없습니다.”
“시종들이 있지 않나요.”
“시종들을 믿는 건 악의에 자신을 그대로 맡기는 것과 같지요. 게다가 그들은 솔직히 저와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뭐, 신분이 다르니까요.”
소라고둥이 자리에 누웠다.
“제 새로운 신전, 기대할게요.”
루페르트는 어째서인지 여신이 졸려 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때는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약속한 대로 여신만을 위한 화려한 사당을 반드시 건축하겠습니다.”
여신의 기척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루페르트는 잠시 억눌린 죄책감이 다시금 파도처럼 덮쳐 오는 걸 느끼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돌프 님…….”
과연 어떻게 됐을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묻고 싶다.
그가 되고 싶던, 철혈대제가 대체 그 검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 했는지, 크리오네는 제대로 처리했는지.
묻고 싶다.
그 소망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그날 오후 루페르트는 한 시종에게 한 사내가 알현을 요청했다는 걸 듣는다.
“폐하가 기다리고 계실 루돌프라는 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루돌프 님이?!”
루페르트는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즉시 루돌프를 궁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다.
루돌프는 궁 안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그가 장소를 잡았다.
정오에, 대성당 앞에, 홀로.
“뭐지?”
뭔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있는 것일까.
가면을 쓰고 루페르트는 홀로 황궁을 빠져 나갔다.
전처럼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도 없었고 제지하는 이도 없었다.
신묘한 여신의 권능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며 루페르트는 그토록 골치를 썩이던 대성당 앞에 홀로 섰다.
몇 명의 병사가 창칼을 들고 지키고 있었지만, 거리는 한산했고 사람의 그림자는 찾기 어려웠다.
한 사내가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두건을 쓴 지혜롭고 고집 있는 노인의 하관.
루돌프다.
“잠깐 걸을까?”
루페르트는 기꺼이 그의 말을 따랐다.
“그대는 좋은 사람이야.”
대뜸 루돌프는 루페르트의 칭찬을 했다.
그러나 그 칭찬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루돌프 본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좋다는 건 군주에게 있어 모욕과 같은 수식이라고.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루페르트가 물었다.
루돌프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순수한 칭찬이지. 인간 대 인간으로. 자네도 좋은 사람에게 끌리지 않나?”
“아, 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악인하고는 아무리 마음의 문을 열려 해도 친해지기가 쉽지 않더군요.”
“악인과 친해지려면 그대도 악인이 돼야 하기 때문이지. 같은 죄를 저지르면 아주 빠르게 친해질 수 있을 거야.”
“하하……. 그럴지도요.”
루돌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루페르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루페르트는 그제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선제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대는 리프니에를 어떻게 생각하나.”
“리프니에님 말입니까?”
“그래. 그 괴물을.”
“……괴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루페르트가 정색했다.
그가 리프니에를 싫어하는 건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그럴 만한 짓도 많이 했고.
하지만 루페르트는 여전히 리프니에의 사도다
최근 그녀가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준 것도 좋은 감정을 가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 괴물이 내 아내에게 한 짓이 뭔지 알고 있네.”
루돌프가 차갑게 말했다.
순간 루페르트는 호흡이 멎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올 것이 왔다.
‘이, 이런. 드디어 눈치를 채신 건가?!’
언제나 이때가 오리라고 생각했다.
모든 죄를 덮을 순 없는 법이다.
“나는 수많은 아내를 가졌었지.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세 명 정도 됐을 거야. 하지만 말이야. 그 괴물은 내 아내를 모두 가져갔지.”
루돌프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회한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루페르트는 굳은 채 루돌프의 옆모습을 보며 치열한 생각에 잠겼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 수많은 아내라니.’
“그 괴물이 자네에게 무슨 짓을 한지 알고 있네.”
루돌프가 루페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실을 알면 그대는 아마 크게 고통받겠지. 어쩌면 그것의 다른 장난감처럼 미쳐서 버려질지도 모르고. 아니 이미 몇 번쯤 미치고도 남았나.”
루돌프가 희게 웃었다.
“자네는 튼튼한 장난감이야. 그래서 그것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더군.”
“…….”
“제위에서 물러나게.”
루돌프가 말했다.
“내 자리를 돌려받고 싶군.”
“네……?”
루페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제위를 돌려받다니요.”
“방법은 준비되어 있어. 이미 슈발츠마인 쪽에 고지를 했지.”
“죽은 폐하가 살아 돌아온다는 걸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요?”
이에 루돌프가 두건을 벗었다.
두건 너머엔 루페르트가 알지 못하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 주눅이 들 수염 없는 금발 전사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건. 설마 이게 루돌프 님의 진정한 얼굴?! 노인이 아니었나. 서, 설마 안개 가면?!’
“안개 가면보다 더 높은 권능을 수여 받았지. 리프니에와 함께한 시간이 꽤 되거든.”
“…….”
“나는 그대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고대의 인물이야. 몇 번이고 이름을 바꿔 제국의 황제 노릇을 수행했지.”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고백에 루페르트는 강한 혼란에 휩싸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루돌프 님은. 아니 철혈대제는?!’
“왜, 지금 물러나기 아쉬운가?”
“그,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루돌프가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그 시대를 경험한 최초의 황제라 생각하나……?”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페르트의 떨리는 물음에 루돌프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가 황제가 되기 전에 내가 먼저 경험했어.”
“……!!”
“도저히 방법이 안 나오더군. 그대가 존경해 마지않는 철혈대제로도 손을 쓸 수가 없었어.”
루돌프가 등에 지고 있던 붕대에 싸인 검을 루페르트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것의 권능을 쓰지 않는 한 이겨 낼 수 없었지. 그대가 생각하는 회귀를 넘어선 권능을. 왜,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게 보여 준 마술이 있지 않나?”
“…….”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썼어야 했어. 이미 이 제국은 한계에 달했거든.”
“하, 한계요?”
“리프니에의 권능에 너무 의지했지. 진즉에 무너져야 할 제국인데 리프니에의 사악한 권능에 의지해 그때그때 문제를 넘어갔어. 그때 어설프게 넘어간 문제들이 마치 빗물이 모여 샘을 이루듯 앞으로의 시대에 한 번에 대금을 청구하려는 거지. 그게 그대가 맡았던 시대의 본질이야.”
루돌프가 돌아섰다.
“심판의 시대지.”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알아. 내 요구가 지나치게 이르다는 걸. 1년의 시간을 주겠네.”
“……루돌프 님.”
“내가 말했던가.”
루돌프가 루페르트를 돌아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해에 눈먼 개들을 다스리는 데 가장 유효한 방법이 뭔지?”
“그, 그건.”
“그래. 상대가 오류에 빠져 있도록 하는 거지.”
루돌프가 걸어갔다.
수정의 검을 놔두고, 끝이 보이지 않는 대로를 향해. 이름 없는 군중을 향해.
“내 진정한 이름은 클라우데 2세가 아니라, 티그리트다.”
진정한 이름을 밝힌, 늘 어두운 복도 속에 앉아 있던 남자는 이제 정오의 햇살 속으로 사라졌다.
루페르트는 그 자리에 선 채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죄악감과 더불어 또 다른 절망이 루페르트의 가슴을 덮쳤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한 채 루페르트는 한참이나 정오의 햇살 아래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 * *
카렐리아 의회.
한 명의 성직자가 의회에 난입했다.
그의 이름은 마르틴 보엠.
레벤호스트의 스승이자 책사다.
“언제까지 황제의 은전만을 기다릴 건가?”
그가 사자처럼 포효했다.
“황제는 약속을 어겼다. 고로 그는 우리의 황제가 아니다. 약속을 어긴 황제에 대해 우리는 저항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왕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호라에게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