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30. 루돌프 (2)
“아아…….”
루페르트는 뒷걸음질 쳤다.
그 설인 앞에서도 그 미지의 괴물 앞에서도 자리를 고수하던 부동의 루페르트가 그보다 훨씬 더 격이 떨어지는 존재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미 공포가 마음을 잠식했다.
잇따른 끔찍한 고통이 루페르트의 몸에 공포의 각인을 새긴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루페르트는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거대한 손을 보며 소라고둥을 불었다.
* * *
복도 안에서 루페르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천 명의 호위도 오각의 마법사도 아무 소용이 없다.
단 한 명의 악의가 이렇게 무서울 수 있는 것일까.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루페르트는 행진을 연기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했다.
문이 보인다.
루페르트는 주저하며 그 문을 통과했다.
“…….”
지옥과 같은 현실이 다시 펼쳐졌다.
비가 내리고 군중들이 모였다.
성직자들은 번쩍이는 제기(祭器)를 산만하게 움직이며 행진을 준비했다.
루페르트는 그대로 의자에 늘어진 채 하늘을 보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달아나고 싶었다.
왜,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때 운명처럼 문이 열렸다.
루페르트는 뒤로 몸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돌렸다.
“!”
루페르트의 얼굴에 거짓말처럼 환한 미소가 깃들었다.
“루돌프 님.”
그렇다.
그 앞에 나타난 건, 과거의 황제였다.
철혈대제라 불리던.
“곤란을 겪고 계신 모양이군.”
때는 정오였다.
* * *
미궁의 뒤뜰.
루돌프는 언제나처럼 음영을 드리우는 두건을 뒤집어쓴 채 안락의자에 앉아 정원의 한구석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시죠? 이곳에 오신 건.”
루돌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다지 풍경은 달라진 게 없군.”
그는 차를 내왔지만, 향을 맡지도 않았고 찻잔을 입에 대는 일도 없었다.
그는 단지 정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루페르트는 곧 루돌프가 보는 것이 단순한 정원의 전경이 아닌, 정원 곳곳에 심은 장미들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루돌프 님.’
마음 한구석이 아린다.
애써 무시하던 죄책감, 아니 공범 의식이 루페르트의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이다.
여전히 철혈대제의 마음은 오로지 그의 여인만을 향하고 있다.
그토록 많은 피와 많은 죽음과 많은 비극을 낳은 자가 이 정도 순애보를 보여 줄 거라고는 회귀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폐하.”
시종 하나가 다급히 다가왔다.
“행진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그, 그런가.”
루페르트는 적잖이 당황했으나, 옆에서 지켜보던 루돌프가 짧게 말했다.
“무시하게.”
두건 아래에 드러난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는 그래도 되는 존재 아닌가?”
루돌프의 생각을 알아차린 루페르트는 즉시 표정을 고치고 시종에게 말했다.
“몸이 좋지 않다. 누구도 이곳에 들지 말라고 명해라. 근위병에게 권한을 주겠다. 어느 누구라도 여길 넘어오는 자는 암살자로 판단, 죽음으로 다스리겠다고.”
그 말을 듣고 있던 루돌프가 껄껄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건에 가린 눈이 순간 번득이는 듯했다.
“그대도 슬슬 황제의 자질을 갖춰 가는군.”
“그렇습니까?”
“폭군과 명군은 종이 한 장 차이지.”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최소한 폭군이 되려면 아래 인간들을 휘어잡았다는 소리 아닌가? 그자가 권력을 잃기 전까진 말이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난 폭군조차 되지 못한 한심한 놈이었지.’
폭군이면 차라리 후회는 남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대로 천벌을 받았구나 생각하며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래 인간의 사정을 일일이 고려할 필요는 없어. 마치 새의 새끼 같지. 아랫놈들이란. 먹이를 줘도 끝까지 대가리를 들이밀며 더 강하게 요구해. 둥지 옆에 나란히 있는 형제가 굶어 죽어 가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그걸 잘 조율하는 게 훌륭한 부모 새의 역할이 아닐까요.”
“어떤 현명한 부모 새는 자격 없는 새끼를 죽여서 둥지 밖으로 던져 버리고 하지. 마치 황새처럼 말이야.”
“……황새 말입니까?”
“누가 황새를 가지고 아기를 물어오는 새라는 전설을 퍼뜨렸을까. 자기 새끼마저 스스로 죽여 살아 있는 채로 바닥에 던져 버리는 새인데 말이야.”
루돌프가 비릿한 냉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요한 건 우리가 키운 새들이 훌륭하게 자라 비상하는 것이겠지? 새가 어떤 암투를 벌이고 어떤 형제 살인을 저지르건 간에 그것이 처음 둥지를 떠나 비상할 때의 그 감회와 아름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천명을 직감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그가 검을 들었다.
그리고 루페르트에게 내밀었다.
“루돌프 님?”
루페르트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곧 루돌프가 자신의 검을 들어 올리는 걸 보고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했다.
“검을 겨뤄 보세.”
“겨, 결투는 아니겠지요?”
“뭔.”
루돌프가 그답지 않게 피식 웃었다.
“나하고 싸운 자는 거의 다 죽었지. 허나 황제였던 내가 황제를 죽일 거 같나?”
“대련을 하시자는 거군요.”
“그자.”
루돌프가 눈을 반짝였다.
“어떻게 생각하나?”
“크리오네 말입니까?”
빠드득.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가 갈리는 인간이 있었을까.
하나 더 있긴 하다.
울피아나라고.
하지만 그 울피아나가 주는 압박과 크리오네가 주는 압박은 둘 다 끔찍함으로 따지자면 엇비슷했지만, 굳이 구분을 하자면 크리오네의 위협은 원시의 폭력처럼 말초적이고 울피아나의 위협은 보다 깊은 수렁을 연상케 했다.
회귀를 하고 진정한 황제가 됐지만 그 여자가 가진 그 기묘한, 마치 세상의 균열처럼 일렁거리는 듯한 감각은 여전했다.
역시 그녀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존재 자체가 섭리를 벗어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몇 번의 재회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그 여자는 피해야 한다. 무조건 피해야 해. 이건 여신님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깟 여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인간도 있겠지. 하지만 그 여자에게서 자유로웠던 남자가 몇이나 되지? 당장 철혈대제조차 안젤리나 님을 잊지 못하고 계시지 않은가.’
당장 문제가 되는 건 크리오네다.
“그자. 그 제국 성인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몸에 새겨진 수차례의 격통을 떠올리며,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루돌프가 차분히 루페르트의 몸을 위아래로 보았다.
“그대는 뛰어난 전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
“제가요?”
금시초문이다.
공을 잘 차는 건 맞다.
공만 잡으면 솔직하게 제국은 물론 대륙의 내로라하는 공잡이가 와도 다 이길 자신이 있었다.
“저는 공이나 찰 줄 알았지, 검을 휘두르는 건 젬병입니다. 그마저도 선생을 고용해 억지로 익힌 거지만요.”
“그건 그 선생이 딱딱한 제국의 검술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힘을 우선적으로 생각한 거리의 조절, 느슨하면서도 신중한 공방, 역습. 부르봉인과 저 아래 룸 제국 찌꺼기들의 검은 사뭇 다르지. 알고 있나?”
“레이피어를 이용한 결투 말이군요. 전쟁에선 쓰지 못할 검법이라 들었습니다.”
“갑주만 입어도 간단히 봉쇄되지. 하지만 고대엔 갖가지 다채로운 검들이 있었어. 영웅의 시대만 해도 얼마나 다채로운 무기가 등장했던가?”
루돌프는 이야기를 하면서 느릿하게 검을 휘두르는 시범을 보였다.
루페르트는 이 왕년의 황제가 검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한눈에 간파했다.
느릿하게 회전하는 검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검 그 자체에 의지가 깃든 것처럼.
‘철혈대제가 검을 잘 다뤘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 검기. 보통이 아니야. 전장에서 능히 자신의 한 몸을 지키고도 남을 정도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검사는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는 기량이 느껴진다.’
“자, 그럼 검을 교환해 보세. 전력을 다해 덤비게. 사양 말고.”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대는 내 몸에 상처 하나 낼 수 없어.”
루돌프가 씨익 웃었다.
루돌프를 수차례 봤지만, 그토록 확신 어린 미소를 본 적은 없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철혈대제를 향해 강하게 맞부딪쳤다.
챙캉! 챙캉!
테타우의 시민은 물론 제국과 대륙의 이목이 모두 황제의 행진에 쏠린 가운데, 루페르트는 이름 모를 노인과 함께 칼싸움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알 수 없는 기괴한 감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또 다른 기이함을 느끼고 있었다.
챙캉!
세 합을 넘기는 일이 없었다.
어떻게 부딪쳐도, 어떻게 공격해 들어와도 세 번 검을 교환하면 그의 검은 하늘로 솟구치거나 바닥에 처박힌 채 루돌프의 발에 짓밟혔다.
루돌프가 뒤로 물러났다.
루페르트는 예를 표하며 찬사를 던졌다.
“대, 대단합니다! 폐하.”
루돌프 앞에서 자신을 한껏 낮추긴 했지만 루페르트의 검기가 그리 녹록한 게 아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검술 사범에게 지도를 받았다.
리프니에의 통찰의 만화경에 의하면 검술 평가 등급은 B에 이르렀다.
마스터나 대가의 경지까진 아니더라도 검으로 벌어먹는 사람들 사이에서 능히 고개를 들고 다닐 정도의 수준은 된다는 소리다.
그런 루페르트를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처럼 제압하는 루돌프의 실력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솔직하게 마술을 보는 기분이랄까.
“그대에게 어울리는 검술이 있을 걸세. 아마도 미네아.”
“미네아 말입니까? 그 멸망한 문명 말이지요?”
“미네아의 전사들은 거의 벌거벗은 채 춤을 추는 것처럼 싸웠다고 하더군. 그래, 그대가 잘하는 축구처럼.”
“그런 검도 있었군요.”
“그대가 검기를 갈고닦으면 어쩌면 그 제국 성인 상대로 쉬이 당하지 않았겠지. 죽이진 못했더라도 어쩌면 통렬한 반격으로 그를 물러나게 했을 수도 있어.”
“그렇습니까?”
솔직히 그건 너무 갔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인간이 괴물을 이기겠는가.
아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때 크리오네에게 습격을 받았을 때 루페르트가 보았던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지금은 거의 지워졌지만, 당시엔 그가 찰나의 판단 속에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방법으로 보였으니까.
단지 그것을 실행한다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서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걸리겠군.”
“그렇겠지요.”
가능하다고 생각지도 않지만 말이다.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네.”
루돌프가 검을 하나 더 들었다.
쌍검.
루돌프는 두 개의 검을 천천히 엇박으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느릿하면서도 둔중한 회전이지만 루페르트는 알 수 없는, 사형집행의 예감을 감지했다.
죽음, 아니 처형이라고 할까.
저 검 앞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그런 절망감이 보는 것만으로 루페르트를 옥죈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한 자루의 검이 필요하지.”
“검 말입니까?”
“아라키스트. 수정의 검이 필요하네.”
“아라키스트, 수정의 검 말입니까?”
그런 검은 들은 적이 없다.
아니, 있다.
하찮은 동화 속에 나오는 검이다.
주인공이 죽어 배가 풍선처럼 부푼 소의 배를 터뜨리고 꺼낸 검.
그 검은 얼음처럼 차가우며 철갑 같은 비늘을 두른 전설의 드래곤마저도 벨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다고 한다.
그 동화의 검을 루돌프가 요구하고 있다.
“황궁 금고에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루페르트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루돌프가 정정했다.
“여신에게 부탁하게.”
“여신님 말입니까?”
“리프니에님이 그 검을 가지고 있네.”
루돌프가 두 자루의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 검이 있으면, 나는 자네를 죽이려 드는 그 괴물을 죽일 수 있다네.”
두건 속에서 섬뜩한 빛이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