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30. 루돌프 (3)
여전히 리프니에는 미궁의 2층에 있다.
루페르트는 시종을 물리치고 홀로 2층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짙은 어둠이 루페르트를 감쌌다.
루페르트는 조용히 여신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여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1분이 지나도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음? 뭐지? 여신님도 설마 낮잠을 주무시거나 하는 건가.’
어둠 너머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인다.
순간 루페르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의 섬뜩함을 느꼈다.
안젤리나를 꼭 닮은 소녀가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말없이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를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페르트에게 그 모습은 공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무언가다.
“여, 여신님?”
루페르트가 조심스레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
소녀는 답이 없다.
다시 한번 불러보았다.
“여신님?”
마찬가지.
소녀는 미동도 없고 눈의 깜빡임조차 없이 허공을 노려볼 뿐이었다.
마치 생명이 없는 것처럼.
‘이, 이건 아니다.’
루페르트는 예전에 느낀 공포를 떠올리고 몸을 돌렸다.
‘나, 나중에 뵙자. 아무래도 여신님은 낮잠을 주무시는 거 같으니.’
루페르트가 문고리에 손을 올리려고 할 때였다.
“루페르트 가우저?!”
“허억!”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경망스러운 소리를 내뱉으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느닷없이 검은 머리가 소녀가 그 옆에 나타났다.
안 그래도 크리오네로 마음이 극도로 약해진 루페르트다.
쿵! 쿵! 쿵!
심장이 격하게 뛰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녀를 떨리는 눈으로 보았다.
“어머. 루페르트 가우저. 왜 그렇게 처량한 모습인가요? 설마, 그 암살자가 그렇게 두려우신가요?”
“네, 그, 그렇습니다.”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제아무리 철통의 방비를 해도 가볍게 무시하고 들어와 번번이 이쪽을 죽이려 드는 악몽 같은 자를.
소녀의 모습으로 분한 리프니에가 딱한 눈으로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루페르트 가우저. 제가 말했죠? 회귀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요.”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걱정은 기이하게도 루페르트의 벌어질 대로 벌어진 마음에 상처에 따뜻한 치유의 힘으로 작용했다.
진심처럼 들렸다.
방금 그 짧은 순간만은.
‘……여신님.’
따뜻한 한마디와 함께 여신이 직접 소녀의 따뜻한 육체를 움직여 루페르트를 일으켜 세웠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토록 꺼리는 소녀를 보며 루페르트는 예전처럼 열과 성을 다해 여신에게 경의를 표했다.
“어머, 황제인 당신이 직접 제게 찾아와서까지 부탁을 드릴 정도라니. 무슨 일인가요?”
루페르트는 루돌프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검을 내가 요구했다는 말을 하면 안 되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루돌프는 신신당부를 했다.
“혹 그 이야기가 여신의 귀에 들어간다면 아마 나는 더 이상 그대를 도울 수 없을지도 몰라. 여신님은 그대를 걱정하는 만큼 나 또한 걱정하거든. 혹 내가 크리오네에게 패해 죽게 된다면, 어쩌면 그녀의 회귀의 권능으로도 날 살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
“어째서입니까?”
당시 루페르트가 물었다.
“나 또한 수레바퀴 위에 묶였던 몸. 그 수레바퀴에서 벗어난 지금, 나는 그 바퀴의 은혜를 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 왜, 그대의 여러 번의 회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대가 크리오네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나?”
“…….”
확실히 그러하다.
그가 회귀의 영향을 받았다면 루페르트가 크리오네 때문에 여러 번 회귀했고, 정신이 거의 무너질 정도로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의문점은 남지만, 루돌프는 특별하다.
‘그분의 말씀이 옳다면, 어쩔 수 없다. 지금은 크리오네. 그 괴물을 제거해야 한다. 그 괴물이 날 완전히 부숴 버리기 전에 말이야.’
루페르트는 속마음을 숨기고 소녀의 모습을 한 그녀의 여신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크리오네를 쓰러뜨릴 무기를 가지고 싶습니다.”
“무기요?”
“아라키스트. 수정의 검이라는 강력한 무기만이 크리오네라는 자를 죽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라키스트.”
리프니에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망령을 베는 검인데. 크리오네 같은 살아 있는 존재에게 그리 신통할까요?”
“크리오네는 곰처럼 강한 인간입니다. 곰처럼 강하긴 하지만, 에디지우스나 판텔레온 같은 초월적인 힘을 가지진 못한 것 같습니다.”
“초월적이라니요.”
리프니에가 조소했다.
“그런 저급한 권능에겐 과분한 표현이네요.”
“죄송합니다. 여신님.”
“당신이 죄송할 건 없어요.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가 허공에서 뭔가를 꺼냈다.
검을 꺼내는 순간 어둠이 걷힐 정도로 환한 빛을 발하는 글자 그대로 수정으로 이루어진 검이었다.
“아라키스트. 수정의 검. 지금은 죽어 버린 어떤 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지요.”
“신도 죽습니까?”
“네. 죽어요. 당장 제국의 신조차 이미 죽은 신 아니던가요?”
“……그렇습니다.”
“자, 받으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가 하품을 했다.
“저는 햇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졸음이 온답니다. 하긴, 너무 오래 깨어 있었죠. 저는 잠꾸러기예요. 칠칠치 못한 여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인걸요.”
리프니에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크리오네, 처치했으면 좋겠네요.”
그녀의 기척이 사라졌다.
완연한 어둠이 커튼처럼 주위를 다시 덮었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한 적막 속에서 루페르트는 좀 더 빨라진 자신의 고동과 약간의 배덕감을 느끼며 손에 들린 검을 응시했다.
“…….”
루페르트는 여신이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여신님. 이번 한 번만 거짓말하겠습니다.’
* * *
회차로.
제국의 모든 수레 달린 것들이 돌아가야 하는 끝자락엔 제국의 소수민족 하브루타인들이 사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의 깊숙한 곳에 가장 은밀한 하브루타인들의 회합장이 있다.
한때 루페르트도 간 적이 있는 그 장소의 중심을 차지한 건 두건을 쓴,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었다.
“그래.”
그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루돌프.
그는 자신 앞에서 술을 따르고 있는 사막을 닮은 피부를 가진 이국적인 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울피아나라는 여자에 대한 정보는 알아 왔나?”
황제 후보 한 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여인이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 이상으로 어긋난 여자더군요.”
“그래?”
“다섯 살 때 단지 부친이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난관에 매달려 자살하겠다고 시위를 부렸다고 합니다.”
“하하.”
루돌프가 웃었다.
“단지 성격이 좋지 않다고 보았는데, 그 정도로 미친 여자일 줄이야.”
루돌프는 호박빛 액체가 담긴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룸 제국에서는 그런 아이를 마구잡이로 때렸지.”
“그런가요? 군주의 자제도 말입니까?”
“예외는 없었어. 군주의 자식이라고 해도 행동이 이상하거나 엇나가면 노예 가정 교사가 체벌을 가했지. 앙심을 품은 어린이가 나중에 자라 복수를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어쩌면 그 엄정한 교육 방식이 룸 제국에게 그토록 강한 힘을 준 원인일지도 모르겠지.”
“역시 폐하께서는 역사에 통달하시군요.”
“영원한 젊음을 누리는 그대도 나만큼 해박하지 않나?”
루돌프의 물음에 여성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에 비하면 한 마리 벌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몸에 흐르는 피부터 천한걸요.”
그때 문가에 서 있던 한 사내가 여성을 향해 손짓했다.
루돌프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아가티아.”
“네. 폐하.”
“준비해라.”
아가티아라 불린 여성을 포함한 하브루타인들이 서둘러 뒤편의 장막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남은 건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 하나.
곧 입구에서 흐릿한 관상을 가진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문지기가 그 사내를 막아섰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검을 전하러 왔다.”
문지기는 정중하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중년 사내는 곧장 루돌프에게 다가왔고 그 앞에 앉았다.
거짓말처럼 중년 사내의 얼굴에 걷힌 안개가 걷히고 이제 갓 약관을 넘은 젊은 황제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루돌프 님.”
그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작금의 황제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황제를 찾아왔다.
“이걸 받아 주십시오.”
거짓으로 얻어 낸 전설 속을 검을 바치기 위해.
루돌프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 그 검을 한 손으로 받아들었다.
“아라키스트.”
그가 검의 이름을 말하자 마치 검이 의지를 가진 것처럼 묘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그 검을 쥔 채 칼날을 바라보며 루돌프가 말했다.
“……크리오네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거야.”
“그 말씀은?”
“그대의 치세를 계속하게. 그 암살자가 그대 앞을 가로막는 일은 없을 터이니.”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 압니까?”
루페르트가 분노를 드러내며 물었다.
“그자가 죽는 걸 보고 싶습니다.”
빠드득.
루페르트의 이가 그의 의지에 관계없이 갈렸다.
사람을 거의 무너질 정도로 괴롭힌 놈이다.
잔혹한 성격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지만, 루페르트는 크리오네가 고통스럽게 죽는 걸 보고 싶었다.
그 정도의 증오가 일련의 사태에서 쌓이고 만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루돌프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검투 경기를 좋아하나?”
“아니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야만적인 경기지만 영광스러운 싸움이기도 하지.”
루돌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황제가 보기엔 지나치게 저열한 오락이야.”
그가 방문을 나섰다.
“그대는 황제의 길을 걷게. 나는 내 일을 할 테니.”
루돌프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루페르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지만 가슴이 강하게 뛰는 걸 느끼며 과거의 황제가 사라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 * *
빗속에서 황제의 행진이 시작됐다.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황제는 누더기를 기운 옷을 입고 맨발로 수도원장과 함께 진흙의 거리를 걸어 나갔다.
그 행진엔 하늘에 휘날리는 헌화도, 황제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환호도 없었다.
모두가 사전에 알린 것과 같이 침묵 혹은 두런거림 속에서 그들의 황제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첨벙.
차가운 물웅덩이를 밟으며 루페르트는 주위를 눈동자를 굴려 조심스레 살폈다.
그 암살자.
그 엄중한 호위를 가볍게 무시하고 루페르트를 죽이려 드는 암살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이 가라앉지 않는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루페르트를 위협하고 끔찍한 고통을 안긴 장본인은 이미 루페르트의 마음속에 악몽이라는 형태로 달라붙었으니까.
믿을 건 루돌프뿐이다.
여신에게 거짓말을 한 보람이 있기를 바란다.
빗속에서 느닷없는 참회를 느끼며 루페르트는 자신이 믿지 않는 신의 신전으로 걸어 들어갔다.
“…….”
군중 속에 있던 한 사내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뒤로 돌아섰다.
그의 옆엔 수더분한 차림의, 추악하게 생긴 곰보 자국이 얽힌 사내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크리오네.”
루돌프가 말했다.
“그대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거한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체구에 가까운 이국적인 풍모의 사내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과거의 황제를 노려보다 갑자기 주먹을 들었다.
“네깟 놈을 황제로 모신 적이 없다.”
이에 루돌프가 가볍게 손짓했다.
“크으으으윽!”
곰보 자국이 얽힌 사내가 격렬한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크으으윽!!!!”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루돌프는 그저 차가운 눈으로 사내의 고통을 지켜볼 뿐이다.
“하, 항복! 살려 주시오! 부탁이오!”
곰보 자국 사내가 헛소리를 내뱉으며 자비를 구걸하자 그제야 루돌프는 팔을 내렸다.
그의 손바닥 안엔 루페르트가 잘 아는 한 마리 벌레가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루페르트가 황제의 멍에라고 이름 붙인 그 끔찍한 벌레가 말이다.
“……제국의 진정한 황제시여.”
크리오네라 불린 추악한 사내가 자비를 구하듯 고개를 들었다.
“제국은 어찌 되는 겁니까?”
루돌프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 운명을 이제 정하려 한다.”
도시의 종들이 울리고 있다.
천 개의 종이 일제히 울리는 가운데 황제의 서약이 시작되리라.
하지만 루돌프의 귀에 들린 그 수많은 종소리들은 이 질척한 비와 함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소리로 들렸다.
“……리프니에.”
루돌프의 눈은 황궁 옆에 외로이 서 있는 장미의 저택으로 향했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괴한 거인이 주인 없는 묘를 미동도 없이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