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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16화 (116/225)

116화 30. 루돌프 (1)

테타우 대성당엔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이유는 오직 단 하나.

황제 루페르트의 터무니없는 정치·종교적 행보 때문이다.

황제가 독신을 선언한다.

황제가 수도승 황제가 되려 한다.

황제는 그 젊은 나이에 결혼도 후사도 포기하려 한다.

제아무리 냉담한 호사가도 들뜰 수밖에 없는 소재다.

순결제 이후 수백 년 만에 독신을 선언하는 황제가 나타난 것은.

모든 준비는 마쳤다.

교회법은 물론 교단의 모든 의식에 통달한 아카이아 대주교 이를 승인했고, 황제의 선언을 듣는 자의 역할을 자처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다.

그날 테타우엔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진흙으로 더럽혀진 거리에 황제가 맨발로 등장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신과 성인에게 기도를 올리며 황제의 안녕과 제국의 평화, 그리고 자신의 건강과 행운을 가장 크게 갈구했다.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엔 수많은 병사가 배치됐다.

소문에 의하면 전 도펠죌트너 출신도 다수 배치된 모양.

어디까지나 황제가 고용한 것이 아닌, 황제를 지지하는 귀족과 군주가 편법으로 고용한 모양새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강력한 병사들이 자리를 지키는 건 적어도 지금 같은 큰 행사에선 가슴 든든한 일이었다.

종소리와 함께 황제가 행진을 시작했다.

황제 옆엔 청색 속죄회, 맨발 수도회, 백색 복음 기도회, 제13 지파 등 제국 각지에서 인기를 얻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호라 교단 산하 수도회의 원장들이 맨발로 황제를 호위했다.

그중엔 칠순에 가까운 노인도 있었지만, 세월이 좀먹은 노구(老軀)의 쇠약함도 한 시대를 함께한다는 사명감을 이기지 못했다.

행진의 중간에서 루페르트는 수시로 목에 건 소라고둥을 매만졌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황제가 심장 부근을 만지작거리며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보였다.

‘이 난관을 넘으면 적어도 내 마음은 편안해지겠지.’

울피아나 하나를 피하는 것만으로 루페르트의 심신은 크게 안정될 것이다.

물론 루페르트의 진정한 노림수는 선제후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어차피 루페르트의 목적은 왕조를 세우는 게 아니니까.

제국을 지켜 내기만 하면 된다.

처와 자식? 왕조?

그건 사치다.

불타는 황궁에서 후회하며 죽어 간 황제가 바라기엔 과분한 보상이다.

그래서 이 길을 택했고, 이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된다.

하지만 하나의 난관이 남았다.

‘크리오네. 설마 여기에 나타날 생각은 아니겠지?’

세간엔 도펠죌트너만 배치됐다고들 한다.

그들만이 아니다.

마법대학은 루페르트의 청을 받아 최강의 마법사를 여기에 배치했다.

발작하는 자 프리츠 에센바하.

마법대학의 중추인 오각의 마법사 중 필두라 불리는 최강의 마법사다.

그의 예지는 하늘에 맞닿았고, 그의 권능은 감히 신화와 전설의 영역에 맞닿아 있다고 전한다.

더욱 기이한 건 그의 나이다.

그는 사실 300년 전부터 마법대학에 존재했는데, 초월적인 마법의 힘으로 불로불사의 비술을 터득했고 이단에 몰리지 않기 위해 이름을 바꿔 가며 오각의 마법사의 한자리를 지켜 왔다는 것이다.

그게 진실이든 허구든 프리츠 에센바하가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보험이다.

‘제아무리 제국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오각의 마법사다. 홀로 전황을 바꾼다는 그를 상대로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이번만큼은 크리오네가 나타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폐하?”

나란히 걷던 칠순의 수도원장이 루페르트를 조심스레 짙은 음영이 드리운 푹 파인 눈으로 응시했다.

“걱정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내 행동이 호라신의 마음에 반하지 않을까 그게 염려스러워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옛 경전에 따르면 신의 눈은 모든 걸 동시에 보고 있기에 한 명의 개인을 하나로 인식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무슨 뜻인가?”

“신은 포괄해서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하늘에 계신 호라신의 눈에 비친 이 거리 행진의 풍경은 어쩌면 한 명의 사람이 행하는 풍경처럼 비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아.”

루페르트는 탄복하는 시늉을 했으나 속으로는 조소를 금치 못했다.

‘왜 늙은이들은 뭐든 모호한 사변의 세계로 도피하는 걸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순 없는 건가?’

루페르트가 걱정하는 건 단 하나다.

크리오네라는 실질적인 위협이다.

행진을 하기 전 시간의 책갈피에 현재 시점을 저장했다.

루페르트는 죽음의 함정을 팠다.

크리오네가 나타난다면 즉시 소라고둥을 불어 시간을 돌릴 것이고, 다음 시간 축에서 크리오네를 제거할 것이다.

제국의 종양과 같은 제국 성인을 그렇게 쉽게 처리할 수 있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다.

루페르트의 신경은 오직 소라고둥을 향했다.

저벅저벅.

물에 젖는 거리를 맨발로 걸으면서.

저기 대성당이 보인다.

‘역시 크리오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아쉽지만 이건 이거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행사를 끝내는 시점에 루페르트의 전사들이 복귀할 테니 말이다.

‘다 왔군.’

대성당의 문턱이 지척에 있다.

루페르트는 성호를 긋고 대성당에 입장하려 했다.

그때 주변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어어어어어!”

“뭐야? 저건!”

“꺄아아아아악!”

뒤늦게 루페르트는 자신의 발밑과 그 주위를 물들인 그림자를 보았다.

‘뭐, 뭐냐? 이건? 대체 어떤 마법이냐?’

마법 따위가 아니다.

“위!”

“위를 봐!”

병사들의 외침을 듣고 루페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루페르트의 눈에 거한이 낙하하는 모습이 비쳤다.

쿵!

크리오네가 루페르트의 뒤에 지축을 흔들며 착지했다.

‘어, 어떻게?!’

크리오네가 말했다.

“반갑소. 황제.”

그가 손을 뻗었다.

“내 이름은 크리오네. 제국 성인이라고도 하지.”

루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병사와 호위병은 지천에 깔렸지만, 지금 가장 가까이 있는 건 저 막을 수 없는 거한이다.

“멈춰라!”

뒤에서 프리츠 에센바하가 천둥과 같은 고함을 지르며 순간 하늘을 어두워지게 할 정도의 마력을 방출했지만, 그전에 크리오네의 손이 루페르트의 팔을 붙잡았다.

“죽어라!”

루페르트의 몸이 위로 들렸다가 아래로 메다꽂혔다.

쿵!

순간 의식이 날아갔고 황천이 보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인다.

비산하는 돌멩이도 날아가는 핏방울도, 주위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조차 느리게 들렸다.

“커억!”

느리게 가던 시간이 원래의 흐름을 되찾으며 루페르트는 피를 토해 내고 격하게 기침했다.

“끄아아아아악!”

뒤늦게 처참한 고통이 뒤를 이었다.

그 고통은 끔찍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축복이었다.

적어도 살아 있다는 증거였으니.

크리오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게 보인다.

“황제?”

뭘 보고 그리 놀란 것인가.

그뿐만 아니다.

함께 동석하던 수도회장들도 경악한 얼굴로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폐, 폐하……?”

“어, 어떻게?!”

루페르트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내가 안 뒤지는 게 그리고 신기한 일이란 말인가!’

“허억!”

루페르트는 진창 속에서 격한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타타타타탕!

“폐하를 지켜라!”

콩을 볶는 듯한 총성과 함께 천둥소리가 머리 바로 위에서 들려오며 한줄기 뇌전이 크리오네를 강타했다.

황제의 호위병들이 뒤늦게나마 제국 성인을 막으려 드는 것이다.

덕분에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

루페르트는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 대신 왼팔로 소라고둥을 잡고 힘차게 불었다.

부우우우우---

* * *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어느 때보다 처참하게 질려 있었다.

루페르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고 있는 오른팔을 지친 눈으로 응시했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끔찍한 적수가 또 있었을까.

수만 명이 운집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 황제를 죽이려 드는 괴물이 있다니.

메헨부르그의 야수와 빙해의 스크라엘링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크리오네.

그는 살아 있는 고통이자 상처이다.

그 자체로 황제의 마음을 어그러뜨리는.

“…….”

그럼에도 나아가야 한다.

저 문을 열어 다시 맨발로 그 비 내리는 진창길을 걸어야 한다.

“……근위대장을 불러라.”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부여잡으며 루페르트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시종들이 근위대장을 불러왔다.

루페르트는 근위대장에서 특히 지붕 쪽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하라고 전달했다.

“동방 제국에서 지붕에 숨은 암살자가 동방 황제의 목숨을 노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비슷한 암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붕공을 올려서라도 지붕 쪽을 철저히 조사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쿠르트 자우버는 일견 정중하게 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루페르트의 눈엔 다 보였다.

저 근위대장은 루페르트의 방금 발언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걸.

지나친 과민 반응이라고 속으로 욕하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이걸 위한 회귀였다.

‘크리오네. 너의 수는 확실히 읽었다. 이번에는 그냥 당하지 않겠어. 나타나는 순간 아주 벌집으로 만들어 주마.’

크리오네가 준 고통과 공포가 분노로 치환되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옷을 벗고 얇은 흰옷만을 걸친 채 바깥으로 나갔다.

늙은 수도회장들이 전과 같은 모습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기대에 찬 시선은 루페르트의 마음을 그저 냉담하게 만들 뿐이었다.

얕은 한숨을 내쉬고 루페르트가 앞장섰다.

다시금 행진이 시작됐다.

비 내리는 우중충한 하늘과 운집한 군중들.

수많은 시선과 두런거리는 소리들.

기도, 기복, 황제의 무병장수와 안녕, 제국 만세, 아이의 칭얼거림과 아기의 울음소리, 젊은 여자의 재잘거림, 병사의 고함과 말발굽 소리.

도무지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잡다한 소음 속에서 루페르트는 점점 가까워지는 대성당의 지붕만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이 어찌나 확고한지 함께 행진하던 수도회장들은 말을 붙여 보고 싶어도 붙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

루페르트가 옆을 따르는 기마병에게 손짓했다.

“프리츠 에센바하에게 전달해라. 저 지붕 위에 무언가 도사리고 있다고.”

“알겠습니다. 폐하.”

기마병이 말머리를 돌려 뒤로 향하려 할 때였다.

군중 속에서 우악스러운, 거대한 손이 기마병의 목을 움켜잡더니 그대로 들어 올린 채 목을 악력만으로 꺾어 버렸다.

“아…….”

또 그놈이다.

“크리오네.”

병사를 집어던지며 거한이 루페르트 앞에 거대한 몸을 드러냈다.

“제국 성인이지.”

“제발.”

루페르트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소라고둥을 입에 갖다 댔다.

부우우우우우---

다시 어둠이 루페르트를 덮었다.

* * *

‘크리오네. 그 괴물의 능력은 단지 거대한 몸과 신체 능력만이 아니라는 건가……?’

몇 번이고 당해 보니 알겠다.

크리오네는 평범하게 힘만 센 거인이 아니다.

놈에겐 뭔가 신출귀몰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제국 성인처럼 그도 명백히 이능에 속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거대한 신체가 하나의 이능처럼 보여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다.

‘그놈은 몸을 숨기는 능력이 있다. 아니 어쩌면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지. 동화 속에 나오는 영리한 슈미트처럼 말이야.’

영리한 슈미트는 제국에서 널리 알려진 동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계모에게 학대당하고 부친의 재산을 모두 강탈당한 소년으로 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배회하다 한 노인을 도와주고 그에게 3가지 보물을 보상으로 받아 부와 복수와 아름다운 공주를 모두 손에 넣는다.

그가 쓰던 도구 중에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있었다.

“슈미트의 작은 문 같은 능력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냐고요?”

이번에는 아예 프리츠 에센바하를 옆에 대동했다.

“글쎄요. 어떤 마법사도 공간을 건너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전설 속의 존재라면 또 모르겠지요.”

번개의 사랑을 받았다고 태어난 이 장년의 마법사는 낮은 목소리에도 천둥을 연상케 하는 사나움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그를 천둥의 아이라고 두려워했지만, 오히려 루페르트에게 그 기이함은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자, 이제 오각의 마법사가 내 옆에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크리오네.’

루페르트의 자신은 1분도 채 되지 않아 무너졌다.

출발한 직후 프리츠 에센바하 뒤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고, 우악스러운 손으로 마법사의 얼굴을 감싸 쥐더니 그대로 비틀어 버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오각의 마법사가 죽었다.

“크리오네.”

마법사의 시체를 내던지며 거한이 루페르트 앞에 우뚝 섰다.

“제국 성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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