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06화 (106/225)

106화 27. 더 끔찍한 것 (4)

그날 렌타이어마르크 바이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제후가 괴물을 불러냈고, 그보다 더 괴이한 괴물이 나타나 선제후의 괴물을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기괴한 벌레로 이루어진 괴물이 흐릿한 안개 속에서 수백만 명의 비명을 내지르며 붉은 피로 변해 녹아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혹자는 말한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괴물에 군대도 장군도 달아나자 황제 본인이 신이 되어 괴물을 응징했다는.

마치 제국을 만들어 낸 노예제 티그리트처럼.

소문의 진위가 무엇이든 하나의 전쟁은 끝났다.

자칫하면 제국 전체를 불태우는 내전으로 치달을지도 몰랐을 이 사달은 렌타이어마르크 동란(動亂)이라는 짧은 사태로 종결됐다.

선제후는 다시 구금됐고, 렌타이어마르크 주는 제국의 품에 돌아왔다.

모두의 시선이 황제의 손끝에 몰린 가운데 루페르트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그대를 또 한 번 용서하겠다.”

루페르트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거듭 용서했다.

강경론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유약한 정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실은 알려진 사실과 사뭇 다르다.

루페르트는 자신 앞에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연신 머리를 흔들어 대는 죽어 가는 사내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제국 성인을 어디서 만났지? 그 잘난 유산을 내게 말해라.”

누가 봐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길어 봐야 수개월, 1년은 결코 넘지 못할 것이다.

“……끄으.”

세련된 룸어를 입에 담던 입에선 더 이상 악취가 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죽어 가는 자의 숨결이 흘러나왔다.

“끄으으으…….”

몸만 시든 게 아니다.

그보다 더 크게 상한 건 선제후의 정신이다.

그는 미쳐 버렸고, 이지를 상실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반쯤 떠난 그는 루페르트의 말을 그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제국 성인? 그래. 제국 성인. 그런 게 있었지.”

선제후의 손가락이 경련하며 꼼지락거렸다.

“그래, 제국은 멸망했나? 그런데 제국이 멸망하면 그 뒤엔 뭐가 생기는 거지? 왕국? 공국? 후국? 그것도 아니면 공화국?”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망막 위엔 실체 있는 무언가가 떠오른 것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 아내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부군이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듬성듬성 이어지는 선제후의 말을 듣던 지겔슈타트가 루페르트에게 속삭였다.

“이미 그는 광기의 강을 건넜습니다.”

“그렇게 보이는군.”

루페르트도 더 이상 선제후에게 얻어 낼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단지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토록 순수하다던 제국 황실의 혈통이 어떤 모습으로 전락했는지.

“…….”

미쳐 버린 선제후를 놔두고 루페르트는 뒤돌아섰다.

선제후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이것이 에디지우스가 입고 있던 옷입니다.”

제국 성인 나병의 에디지우스의 시신은 사라졌다.

정확히는 핏물로 녹아 버렸다.

그만이 아니다.

황제군을 도망치게 했던 괴물의 잔해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토록 많던 미네아의 벌레 중 단 한 마리도 발견되지 않았다.

뒤늦게 바이엔에 도착한 마법대학의 악마학 교수 예나가 상황을 나름의 지식으로 해석했다.

“전설 그대로군요. 미네아의 붉은 벌레는 셀 수 없이 많았으나, 실제로는 오직 단 한 마리의 왕을 가지며 그 왕이 죽는 순간 모든 벌레는 마치 한 몸처럼 사라진다는.”

에디지우스는 벌레들의 왕이었던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역사서에서 에디지우스의 이야기를 찾아 읽었다.

……지친 전사들의 기운을 북돋게 하기 위해서는 황금이 필요하나, 그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는 건 그늘진 언덕 아래 모여 사는 썩어 문드러져 가는 자들뿐이니.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가장 현명하고 아름다운 자를 보내야 할 터. ……추악한 자들은 모름지기 아름다운 자를 경외하는 법이니.

이야기는 군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티그리트가 막대한 재보를 가진 나병 환자를 설득하기 위해 에디지우스를 보내는 부분에서 시작한다.

나병 환자들은 약속한 황금을 보내 주었으나 에디지우스를 돌려보내진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티그리트의 천막 앞에 썩어 문드러져 가는 자가 나타났다.

티그리트의 막하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사내, 에디지우스였다.

술에 취해 있었던 티그리트는 직접 몽둥이를 들어 그를 쫓아냈고, 두 번 다시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진짜 에디지우스이건 아니건 그가 가지고 있던 고대의 지식은 극도로 위험한 것입니다. 미네아의 붉은 벌레를 만드는 법은 마법 대학의 금서 목록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통해 붉은 벌레를 어떻게 육성하는지는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루페르트는 예나와 함께 바이엔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촌락을 향했다.

역병이 휩쓴 마을로 마을 전체가 사라진 곳이었다.

병사들이 집단 매장지로 추정되는 땅을 파헤치자 시체들이 나타났다.

시체들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 같이 복부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내장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역병은 단지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선제후는 붉은 벌레를 양산하기 위해 애꿎은 마을 몇 개를 지워 버리고 그들을 미네아의 붉은 벌레에게 던져 준 것이지요. 전승에 따르면 붉은 벌레는 오직 인간의 내장만을 파먹는다고 하니까요. 대량으로 그걸 만들어 내려면 많은 사람이 필요하겠지요.”

“선제후니까 가능했다는 소린가.”

“이해가 맞았겠지요.”

함께 있던 마를로네가 무심한 눈으로 죽은 사람들을 보며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뭔가 중얼거렸다.

그녀만이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보았던 것일까.

루페르트는 그녀가 응시하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아무 죄도 없는 평범한 백성들이 죽어 갔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그가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건, 선제에게 어떤 원한을 품었건 그것은 백성을 제물로 바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그는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작고 보잘것없으며 저열한 인물이었군.’

루페르트를 업신여기던 선제후의 민낯 하나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예나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이 어두운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요?”

루페르트가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비단 마법사에게만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 * *

망자의 목동을 찾아간 건 그다음이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가장 믿을 수 있는 한스 징펠만 한 명만을 데리고 은밀하게 망자의 목동을 접선했다.

루페르트가 두건을 벗자, 시체를 이끌던 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존귀하신 분이여.”

그들은 루페르트가 황제라는 걸 알지 못한다.

밝힌 적도 없고 밝힐 생각도 없으니.

루페르트는 그들에게 적잖은 금화를 건네며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

“시체 100구를 호스라는 마을에 보내라고요?”

시체를 다루는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이지적인 미를 갖춘 여성이 미세한 경악을 드러냈다.

“문제라도 있나?”

“그 마을은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저주받은 곳이지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답은?”

강령술사들은 잠시 고민한 후 고개를 숙였다.

“존귀하신 분의 뜻이 그러하다면.”

백 구에 달하는 살아 있는 시체가 안개와 함께 렌타이어마르크의 저주받은 산천을 걸어 버려진 마을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 루페르트는 말 아래 느릿하게 걸어가는 여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장이 없는 시체를 본 적이 있나?”

“네. 자주 보았습니다. 자주 그들을 장지에 이끌기도 했고요.”

“이상하게 느끼진 않았나?”

“소문에 의하면 내장을 파먹는 기생충이 창궐했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그 기생충을 본 적은 없지만요.”

여성의 말엔 거짓이 없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떠한 악의도 드러내지 않았다.

문득 루페르트는 미안함을 느꼈다.

단지 그녀가 하는 일이 끔찍하고 기괴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죄인처럼 다뤘고 인격체로 여기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정작 인간이길 거부한 건 제국의 선제후라는 당당한 직위를 가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였다.

“이름이 뭔가?”

황제가 강령술사의 이름을 물었다.

강령술사는 루페르트의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부드럽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아그네스라고 합니다.”

아그네스의 인도로 루페르트는 무사히 백 구의 살아 있는 시체를 은둔자에게 인도했다.

문을 열고 약속한 물건을 확인하자마자 은둔자는 희게 웃었다.

그가 두건을 벗어 이국적인 풍모를 드러내며 루페르트를 쏘아 보았다.

“얕은꾀를 쓰는군. 황제.”

“뭐라 비난해도 관계없다. 나는 내 말을 지켰으니. 그대가 필요한 건 스스로 걷는 백 구의 사람 아니었나?”

“시체로 받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시체를 안 받겠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지.”

은둔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 악마가 시켰나?”

거듭 악마라는 말에 루페르트는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나는 악마를 숭배하지 않는다. 이방인. 그리고 나는 제국의 황제로 누구의 명도 따르지 않는다.”

“그대가 믿는 게 뭐든 간에, 그대는 그대가 숭배하는 것과 닮아 가겠지.”

은둔자가 이죽거렸고,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무슨 뜻이지?”

“오물을 가까이하면 오물 냄새가 배고, 피를 가까이하면 몸에 피 냄새가 나는 법이지.”

“거듭 말하지만 나는 제국의 황제다. 더 이상의 망언은 묵과하지 않겠다.”

황제의 경고에 은둔자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고 돌아섰다.

“다음엔 이런 어리석은 장난은 받지 않겠다.”

시체 냄새가 나는 은둔지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가 말했다.

“다음은 없다.”

루페르트가 딱 잘라 말했지만, 은둔자는 자신의 말을 다 했다.

“다음도 백 명이다. 살아 있고,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제국인.”

문이 닫혔다.

루페르트는 차가운 눈으로 닫힌 문을 노려보다 돌아섰다.

마지막 행선지가 남았다.

* * *

과거 선제후의 집무실엔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가문의 구성원들이 형장에 오르는 죄인 같은 표정을 지은 채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선제후령의 운명은 이제 황제의 손에 달렸다.

정당성도 명분도 전쟁의 결과도 모두 황제가 쥐고 있다.

더욱이 이미 두 번이나 배신한 렌타이어마르크에 손을 뻗칠 선제후나 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황제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것인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친척들은 가슴이 조마조마하는 걸 느끼며 황제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루페르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렌타이어마르크를 두 번이나 용서했지만, 또 한 번 거듭 용서할 생각이오.”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세 번의 용서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용서했다고 하나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가문을 용서한 건 아니다.

그런데 루페르트는 가문마저 용서했다.

황제의 말을 들은 가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고개를 숙이며 감사와 사죄를 온몸으로 드러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적어도 루페르트의 치세 동안 렌타이어마르크가 반란을 일으킬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자발적인 동맹이 될지도 모른다.

영지의 특성상 큰 힘은 되지 못하겠지만.

* * *

루페르트가 선제후의 궁정에서 가문에 미래의 씨앗을 심는 동안 바깥에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저걸 봐. 대체 저 소녀는 뭐지?”

“글쎄. 알 수 없어. 하지만 저 사람에게선 신성함이 느껴져.”

한 소녀가 병든 대지를 배경으로 맨발로 선 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그 노래는 천상의 목소리 같은 경건한 울림이 있었고, 그 춤사위는 모든 이의 넋을 빼놓을 정도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분명 별 볼 일 없는 한 소녀의 움직임이건만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까닭 모를 운명을 감지하고 소녀의 춤을 지켜보았다.

누구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고 누구도 방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 어느새 바이엔의 성벽 밖엔 도시 거의 전체에 달하는 시민들이 모인 채 홀로 춤사위를 펼치는 미지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무수한 웅성임 속에서 성직자가 기억 속에 묻혀 있던 단어를 생각해 내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 저건 틀림없어! 계시의 성녀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녀는 성직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이라면 혼백마저 빼앗길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고 전해졌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다.

황제가 가문의 구성원을 복속하는 사이, 바깥에서는 계시의 성녀가 춤추고 있었다.

그 춤은 단순한 춤사위가 아니다.

그녀의 발끝이 이르는 곳마다 잃어버린 색채가 피어났고, 그녀의 유려한 손짓이 이르는 곳마다 구름을 뚫고 서광이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놀라운 일이건만 더 크고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렌타이어마르크를 오랜 침체에 몰아넣은 병든 대지가 정화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렌타이어마르크의 주민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새로운 황제, 그리고 계시의 성녀가 가져올 제국의 영원한 평화와 번영을.

* * *

새로운 황제의 승리는 멀리 떨어진 이국의 군주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

계시의 성녀니, 사람 몸을 파먹는 벌레니, 인간을 미치게 하는 거신상이니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거르고서라도 새로운 황제의 승리는 완벽에 가까웠다.

“난공불락의 렌타이어마르크를 1년도 되지 않은 시간과 최소한의 피해로 정벌했다니.”

그곳은 전쟁터였다.

포성과 포연과 함성과 비명이 끊이지 않는.

적진에서 쏜 포탄이 귀곡성 같은 비명을 지르며 다가오지만 왕의 낯빛은 터럭만큼의 변화도 없었다.

포탄은 왕을 스치고 지나가 뒤편에 떨어졌다.

“새로운 황제의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왕이 물었고 신하가 대답했다.

“루페르트입니다.”

“루페르트.”

스베아 왕국의 왕 아돌푸스 4세 바사.

그는 이미 전장 한가운데 있었지만, 또 다른 전장이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걸 느꼈다.

더 진한 화약 냄새를 머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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