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07화 (107/225)

107화 28. 황제의 멍에 (1)

제국 성인.

학자에 따라 8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호라 교단이 정식으로 성인으로 인정한 건 일곱 명이다.

그들은 제국을 건국한 노예제 티그리트의 신실한 신하로 목숨을 걸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 건국의 주춧돌을 자청했다.

그들은 제국 백성들에게 멀리 있는 호라신보다 가까이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 오랫동안 높은 인기를 누리며 숭배받았다.

특이하게도 그들의 별명은 제국에 유행하는 각종 질병과 연결되어 기복의 대상이 되었는데, 해당 질병을 이명으로 가진 제국 성인에게 기도를 하면 그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그 일곱 명의 별명과 이름은 아래와 같다.

통풍의 발렌티아누스, 매독의 아가티아, 나병의 에디지우스, 천연두의 크리오네, 소아마비의 크리스토포루스, 열병의 메아불린, 이질의 에라스뮈스, 백내장의 판텔레온.

일부 학자는 흑사병의 생시몽을 넣어 여덟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흑사병에 걸려서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기에 백성들은 그를 신통력 없는 성인으로 여겼고 아무도 숭배하지 않았다.

제국력 600년경에 호라 교단에서 제국 성인 숭배 금지령을 내린 이후 그들의 이름은 서서히 희미해졌으나 여전히 민간에서는 기복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들은 살아 있었고, 이제는 명백한 위협이 대상이 됐다.

황제 루페르트가 제국 마법 대학의 고위 마법사를 부른 건 그 때문이다.

황제의 요청에 따라 제국 마법 대학의 최강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우둔한 자 빌렘 반 네헨, 굼뜬 자 두비오 아리시니, 발작하는 자 프리츠 에센바하, 눈먼 자 헬브라이트 베틀렌.

선제후조차 생애에 걸쳐 한 명을 보기 힘들다는 오각의 마법사들이다.

“제국 성인을 참칭하는 자가 제국의 그늘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과거에도 심심찮게 흘러나오던 이야기였습니다.”

눈먼 자라는 이명과 달리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별빛처럼 반짝이고 명민한 눈동자로 좌우를 살피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다만 지금까지 그들이 실제로 행동을 옮긴 적은 없었습니다.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죠. 하지만 제국이 천년기를 눈앞에 둔 현재, 그들의 위협은 실체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그 위협의 수준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학의 마법사들은 만장일치로 황제를 도와 제국 성인을 추적, 적발,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조만간 대학에서 뽑은 최고의 인재들이 제국 전역을 들쑤실 것이다.

대학의 전폭적인 협력은 루페르트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다만 일부 마법사는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고대의 악몽이라 불리던 미네아의 붉은 벌레도 이미 우리에겐 커다란 충격입니다만, 대체 그 정체불명의 석상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히려 사각의 마법사 지겔슈타트를 혼절하게 만든 그 석상이 더 위험하다고 보입니다. 아는 위협은 대처할 수 있지만 모르는 위협은 대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우둔한 자 빌렘 반 네헨은 별칭과 달리 네 명의 최상위 마법사 중 가장 지혜로운 자로 알려져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빌렘 반 네헨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독심술마저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루페르트는 그 말을 믿지 않지만 조심할 필요성은 느꼈다.

“신의 뜻을 우리가 어찌 알겠나.”

황제가 그리 말하자 마법사들도 더 이상의 의문을 제기하진 않았지만 인간 중에서 가장 예민한 감각을 지닌 그들이 냄새를 맡은 이상 마음을 놓을 순 없으리라.

마법사들이 떠나자 또 다른 중요한 손님이 루페르트의 집무실을 찾았다.

“폐하.”

다름 아닌 아카이아 대주교다.

그는 루페르트를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괴한 말을 덧붙였다.

“프리.”

“?”

“어려운 싸움에서 위대한 승리를 축하드립니다프리.”

“대주교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미에 붙이시는 생경한 단어는 대체?”

“아, 이거 말입니까프리?”

“?!”

거듭 경악하는 루페르트를 향해 대주교는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은 채 주위를 둘러보더니 은밀하게 속삭였다.

“우리들만의 비밀이잖습니까프리?”

‘이 늙은이, 갑자기 노망이 들었나?’

“호라신의 진정한 이름 말입니다 프.리.”

“아, 그런 거였군요.”

그제야 루페르트는 대주교가 자신에게 말했던 호라의 진정한 이름에 관한 건을 떠올렸다.

‘그래, 빙해 문선지 뭔지 거기서 진짜 신의 이름을 밝혀 낸다고 했었지.’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주교한텐 일생일대의 중대사일지 모르겠지만 루페르트에겐 아무래도 좋은 죽은 신에 관한 학문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건 그렇고 왜 자꾸 프리프리 거리지?’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 미친 노인은 루페르트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게다가 대주교는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다.

시종이 차를 내오자 대주교는 환희에 찬 얼굴로 차향을 음미한 후 본론으로 넘어갔다.

“계시의 성녀가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프리.”

“그 프리 좀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그 비밀스러운 이름을 함부로 불러 대면…….”

“아, 우리의 가장 은밀한 비밀이니까요. 진정한 신의 이름만큼 축복스러운 단어가 있겠습니까? 저와 폐하, 나아가 제국을 위한 마음에서…….”

“첩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자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오, 그런 경우의 수도 있었군요.”

대주교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눈치지만 자신의 말투를 정정하기로 마음먹은 눈치다.

“아무튼, 계시의 성녀가 또다시 폐하가 계신 곳에 나타나 기적을 행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루페르트의 표정엔 별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겠지만 이번 리프니에의 동행이 어쩌면 그걸 위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안젤리나의 육신을 취한 것도,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던 것도, 렌타이어마르크의 오염된 대지를 정화할 정도의 권능을 갖고 있음에도 기분 나쁜 은둔자의 힘을 빌리라 한 것도, 그리고 루페르트가 승리하자 기다렸다는 듯 모든 이의 눈앞에서 계시의 성녀다운 기적을 행한 것도.

“…….”

나쁘게 생각하면 끝도 없다.

루페르트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책망했다.

‘여신님은 날 거두어 주시고 기회를 주신 분이다. 굳이 이런 식으로 나쁘게 생각해 봐야 뭐가 돌아오겠어?’

“폐하?”

잠시 딴생각을 하던 루페르트의 귀에 대주교의 목소리가 슬그머니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위대한 생각을 하셨습니까?”

“위대한 것까지는 아니고 계시의 성녀를 생각했지요.”

“폐하도 그분이 기적을 행하는 걸 보셨습니까?”

“아니요. 안타깝게도.”

“듣자 하니 계시의 성녀는 아직 앳되지만, 그 아름다움은 가히 미의 여신답다고들 하더군요. 그 계시의 성녀가 추하든 아름답든 중요한 건 그녀가 폐하가 이르는 곳마다 나타난 진실한 기적을 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주교가 숨을 헐떡였다.

“이 기세대로라면 우리는 더욱 큰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리되길 바랍니다.”

대주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프리.”

대주교가 떠난 후 루페르트는 의자에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

무심코 바깥을 보았다.

창가 너머로 펼쳐진 정원은 유난히 밝아 보였다.

때마침 정오였다.

수직에서 내리쬐는 태양이 정원의 그늘을 지워 버린 것이다.

가급적이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번 전쟁이 루페르트의 완벽한 승리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았다.

특히 그 은둔자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흐름은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함의 연속이었다.

특히 수천 명의 아우성을 울리며 선혈을 자아내며 움직이던 거신의 엽기적인 움직임은 인간의 마음을 찌그러뜨리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흡!”

갑자기 숨이 막힌다.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 이유 없이 이 집무실과 이 풍경이 낯설어 보인다.

까닭 모를 불안감이 발목부터 덩굴처럼 휘감고 올라가 전신을 휘감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비틀거렸다.

“폐하?”

시종이 루페르트를 보며 조심스레 묻는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흥건히 맺혀 있다.

시종이 루페르트의 이마를 닦아 냈다.

루페르트는 그동안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과연 여기가 내 자리가 맞는가 하는.

분명 그렇고 그래야겠지만 전신을 휘감은 불안감과 공포는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너무 무리했나.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볼까.’

집을 생각하자 또 다른 막막함이 루페르트를 벽처럼 막아섰다.

집이라는 게 지금 있는 걸까.

침소로 쓰는 별궁이 있긴 하다.

미궁이라는 이름의.

하지만 그곳이 과연 루페르트의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거기엔 여신이 있다.

“!!”

어두운 방 안에 창백한 인간의 모습으로 서 있던 여신을 떠올린 루페르트는 또 한 번 비틀거렸다.

거기는 집이 아니다.

집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무엇보다 그가 잘 아는.

그런데 지겔슈타트는 지금까지 몸져누워 있고 한스 징펠만은 휴가를 청했다.

유일하게 남은 건 마를로네지만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 황궁 안에 머무르고 있을 조부의 간호를 하고 있진 않을까.

‘그 녀석이라도 한번 만나 보고 올까.’

루페르트는 마를로네 일행이 머무는 작은 가옥으로 향했다.

곧 그 아담한 가옥이 눈에 들어왔다.

훤칠하게 뻗은 노간주나무 아래 갓 길어지기 시작한 그림자를 받은 작은 집 앞엔 목발을 짚은 베르크 란과 그의 옆에서 뭔가를 먹고 있는 마를로네의 모습이 보였다.

둘은 드문드문 담소를 나누며 정오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멀리서 본 그녀의 모습은 괜찮아 보였다.

기이하게도 황제의 불안은 아는 사람의 얼굴을 보자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뭐였던 거지. 이 불안감은. 너무 쉬지 않고 일을 해서 그런 건가.’

황제는 모든 걸 할 수 없기에 적당히 하라는 여신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신님의 말씀이 맞을지도. 인간의 열정은 한계가 있다고 했나.’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아섰을 때였다.

“!”

여간해서 깨지지 않는 표정의 가면에 금이 갔다.

그의 뒤에 한 여성이 웃는 얼굴로 서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은발에 가까운 창백한 금발을 드리운 푸른 눈의 미녀.

무엇보다 확신에 찬 환한 미소는 루페르트가 생애를 통틀어 가장 보기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우, 울피아나!’

골트문트의 딸, 그리고 전생의 황후.

루페르트가 가장 두려워하고 지금도 두려워하는 여인이 운명의 장난을 쳐 놓은 모양새로 가장 예상하지 못한 영역에 나타난 것이다.

“폐하.”

울피아나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루페르트는 황급히 마음을 다잡으며 그녀의 인사에 답례했다.

울피아나가 환하게, 마치 소녀처럼 웃었다.

그녀의 투명한 피부 위에 희미한 홍조가 띠는 걸 보며 루페르트는 입 안이 바짝 타는 걸 느꼈다.

기억해 낸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과거의 행동을.

‘그, 그랬었지. 골트문트에게 딸을 달라고 했었지!’

“아버님에게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꼭 한번 찾아뵙고 싶었는데 전쟁이니 뭐니, 폐하께선 늘 다망(多忙)하셔서 그럴 기회를 찾지 못했는데, 운명의 여신이 이끈 것처럼 의외의 장소에서 폐하와 만나게 되었네요.”

“하, 하하.”

“폐하?”

“아, 전쟁의 피로가 갑자기 밀려와서요.”

“아, 들었어요.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거대한 마물이 전장에 강림하듯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폐하는 그 마물 앞에서도 한 걸음 물러나지 않으셨다고. 그야말로 부동 그 자체라고.”

“그건 와전된 이야기입니다. 사실 제일 먼저 뒤로 물러났지요.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요. 별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먼저 피신해야지. 그렇다고 제일 먼저 도망갔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하하. 폐하도 참.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위버하임 남작 시절이라면 모를까, 저 또한 폐하의 일개 백성에 불과한걸요.”

천연덕스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울피아나를 보며 루페르트는 거대한 빈대를 연상했다.

‘제발 좀 떨어져라.’

“폐하. 그런데 여긴 어인 일로.”

“아, 그게.”

잠시 까맣게 잊고 있던 울피아나의 특징 하나.

그녀는 눈치가 대단히 빠르다.

오전에 만났던 오각의 마법사 빌렘 반 네헨이 독심술을 익혔다는 소문이 있지만 울피아나는 진짜 독심술을 잊힌 것마냥 사람의 의중을 잘 꿰뚫어 본다.

그 눈치로 루페르트를 영혼 밑바닥까지 추락시켜서 문제지.

아무튼 그 눈치가 시공을 넘어 다시 현세에 재현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아, 설마 저 여자를 만나러 가신 건가요?”

울피아나가 멀리 조부와 함께 햇살을 뻔뻔하게 즐기고 있는 금발의 소녀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흐음~”

“…….”

“아, 기억났다! 대리 결투에서 폐하의 챔피언을 맡았던 노인의 손녀죠? 이름이 뭐였더라. 마리 루이즈?”

“마를로네.”

루페르트가 입을 열었다.

울피아나를 떠들게 놔두면 한도 끝도 없이 떠든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 거신을 보고 모두 마음의 병을 얻었는데 저 녀석은 멀쩡한 것 같구려.”

“어머. 폐하께서는 마음도 넓으시네요. 일개 도펠죌트너의 상태까지 걱정해 주시다니.”

“나의 챔피언의 병세도 확인할 겸 겸사겸사. 아무튼, 건강한 걸 확인했으니 이만 가 보겠소.”

“네. 폐하. 저야말로 하찮은 여성이 폐하의 중요한 시간을 뺏은 것 같아서 송구할 따름이네요.”

울피아나는 특히 하찮은 여자라는 말을 강조하며 마를로네 쪽을 웃는 눈으로 보았다.

“…….”

루페르트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전과 달리 이번엔 루페르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우호적이지만 그 본성.

그 사람을 영혼째로 갉아 먹는 본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음 만남을 기대하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는 울피아나를 보며 루페르트는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이쪽이야말로.”

루페르트는 절도와 체통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이탈했다.

그러나 울피아나.

역시 지독한 여자다.

“마를로네 양~!”

루페르트가 있는 자리에서 마를로네를 큰 소리로 불렀다.

“마를로네 양이죠?”

루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

안 좋은 예감밖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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