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05화 (105/225)

105화 27. 더 끔찍한 것 (3)

아카이아 대주교가 황제의 집무실을 찾아온 건 선제후와 황제의 전쟁이 한창 중이던 시기였다.

집무실엔 잡다한 관료가 저마다의 업무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현재 책임자는 베르너였다.

제국의 선제후이자 종교 지도자이기도 한 대주교가 통보도 없이 누군가를 방문하는 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른한 오후 햇살을 받으며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던 베르너는 대주교의 등장에 황급히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와 머리카락을 정리한 후 대주교를 맞이했다.

대주교는 껄껄 웃으며 친근한 덕담을 건넨 후 상석에 앉았다.

‘대체 무슨 일로 이분이 갑자기 찾아온 거지?’

아카이아 대주교는 양면의 얼굴을 가진 자다.

이단 심문관으로서 그는 무자비하고 지칠 줄 모르는 박해자인 반면, 개인으로서는 극단적일 정도로 조심스러운 인간이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대주교는 후자의 경향이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였는데, 어째서인지 지금 대주교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

“그래, 남작. 전쟁은 언제 끝날 거 같나?”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략 한 달 전후로 끝나지 않을까요?”

“놀랍군.”

대주교가 과할 정도로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 생각하지 않나? 저 렌타이어마르크를 반년도 안 되는 시기에 정벌하다니 말이야. 저지대의 요새 도시 하나 함락시키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생각해 보면 놀랍다는 표현밖에 쓸 수 없는 일이지.”

“만슈타인이라는 자가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만슈타인?”

대주교는 그 이름엔 별다른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그의 흥미는 다른 곳에 있었다.

“우리 폐하를 보면서 느끼는데 말이야. 선제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지 않나?”

“선제라면 클라우데 2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 또한 놀라운 분이었지. 언제나 위태로운 결정을 하는데 그 위태로운 결정이 늘 맞아떨어졌어. 모두가 안 될 거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해도 그분은 흔들림이 없으셨지.”

대주교는 등받이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앉으며 탁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과자를 발견하고 하나 집어 입 안에 넣고는 즐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달지 않고 꽃냄새가 나지 않는 녀석으로 부탁하네.”

차를 준비하는 동안 대주교는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며 집무실 전체를 흥미로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중간중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걸 보며 베르너는 점점 대주교의 생각이 뭔지 알 수 없어졌다.

‘대체 뭐 하러 오신 거냐고.’

잠시 후 시종이 차를 내오자 대주교는 기다렸다는 듯한 모금 음미하고는 베르너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국의 역사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나?”

“기본 소양 정도는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대학을 나왔나?”

“네.”

“차남이군.”

“장남입니다.”

“호오.”

아카이아 대주교가 자세를 고쳐 앉아 얼굴을 좀 더 베르너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제국 태동기, 그러니까 최초의 황제 티그리트가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글쎄요.”

“생략이 많고 모호하지 않나?”

“신화나 전설에 가까운 느낌이긴 합니다. 그럴 만한 사건도 많고요.”

“렌타이어마르크 통합 당시도 비슷한 느낌이었지?”

“네, 그렇습니다.”

베르너는 소싯적 역사서에서 읽은 노예제 티그리트의 렌타이어마르크 통합에 관해 떠올렸다.

늘 그렇듯 티그리트는 소수의 전사만을 거느렸고 적대적인 부족으로 가득 찬 적지에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행군을 했다.

당시 렌타이어마르크는 여러 잡다한 부족의 연합체였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자가 야난이라는 자였다.

야난은 곰처럼 강력한 전사임과 동시에 뱀처럼 교활한 자로 티그리트를 함정으로 몰아넣고 완벽하게 포위한 상태에서 싸움을 걸었다.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전쟁이었다.

역사에 따르면 티그리트의 전사는 삼천 명 남짓에 반해 그를 공격하는 야난의 전사는 삼십만에 달했으니.

“숫자의 과장이야 그 시대의 기록이야 늘 있는 거지만 말이야. 내가 볼 땐 삼만 명이 아니었을까? 그조차도 지금 기준으로도 많은 숫자긴 하지.”

대주교가 차를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노예제가 그때 어떻게 이겼더라?”

“패색이 짙어지자…….”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무계한 결과였다.

“노예제 자신이 신이 되어 모든 걸 부숴 버렸다고 하더군요…….”

대주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어린아이도 안 믿을 이야기다.

그러나 제국에서 가장 엄격하고 보수적이어야 할 대주교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난 그 말을 믿어.”

일말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대주교는 힘주어 말했다.

“우리 제국은 살아 있는 신이 지키는 나라야.”

* * *

바이엔. 선제후의 궁전 앞.

자욱한 연기가 걷혀 가는 가운데 병사들은 보았다.

현실 위에 너무나 당당하게 서 있는 뒤틀린 이형의 존재를.

수천수만 마리의 벌레가 한 곳에 뭉친 역겨운 덩어리가 어둠 속에 눈처럼 보이는 붉은 불빛을 번들거리며 인간들을 무가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직 홀로 인간의 형체를 갖춘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광소를 터뜨리며 벌떡 일어서서 루페르트에게 손가락질했다.

“어떤가? 루페르트 가우저. 이 하켄하임에서 축구나 하던 촌놈아. 이제 너와 나의 고귀함의 차이를 느끼겠는가?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나의 자랑스러운 가계와 근본조차 모호한 혈통 사기꾼 사이의 격의 차이가 느껴지냐고 묻고 있는 거다.”

“그 격의 차이라는 게 저 괴물인가?”

루페르트가 비릿한 냉소를 머금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런 걸 가질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겠지. 그게 너와 나의 차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 같군.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순간 속으로 생각했다.

‘회귀 전엔 그래도 선제후다운 품격이 남아 있었는데.’

무엇이 인간을 어리게 만드는가.

훈련된 품성과 성찰이 치기를 거스른 것일까, 아니면 감정의 과잉이 미숙함을 불러온 것일까.

아무래도 좋다.

이제 상황은 루페르트의 손을 떠났다.

“장군.”

“네, 네! 폐하!”

“병사들을 물리시오.”

“병사들을요?!”

“당장!”

이제 기다릴 뿐이다.

루페르트의 진정한 지원군이 나타나기를.

한편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구체에 애걸했다.

“에디지우스! 가짜 황제를 죽이고 제국을 멸해라! 그게 그대의 소원 아닌가?!”

구체가 세 개의 눈을 번들거렸다.

그것은 마치 젤리처럼 몸을 늘였다 기울이며 루페르트 쪽으로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면 셀 수 없는 붉을 벌레들로 이루어진 그것의 움직임은 도저히 맨정신으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병사들이 자리를 떠나서 망정이지 계속해서 자리를 지켰다면 필경 미쳐 버리는 인간이 속출했을 것이다.

“폐하. 여기는 위험합니다.”

지겔슈타트가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매섭게 소리쳤다.

그의 눈동자와 목소리엔 이미 넘쳐흐를 것 같은 마법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가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그거 고맙군.”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느닷없는 밤.

칠흑 같은 어둠이 주위를 예고도 없이 뒤덮었다.

갑작스러운 격변에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들었다.

수천 명이 내지르는 고통에 찬 비명과 아우성을.

순간 루페르트 눈앞에 환상이 떠올랐다.

모든 걸 태워 버릴 듯한 작열하는 태양 아래 펼쳐진 드넓은 광장.

그 광장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심장이 산 채로 뽑히던 낯선 사람들의 모습을.

광장 너머 우뚝 솟은 피라미드 위에 한 사내가 앉아 그 모습을 음료를 마시며 보고 있었다.

루페르트가 하늘 위로 날린 깃털과 같은 깃털로 장식된 화려한 의장을 입은 그 사내의 얼굴은 버려진 마을의 은둔자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 사내가 말했다.

“리프니에.”

사 음절의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온 순간 환상은 깨어지고 현실이 빈자리를 밀려 들어오는 격류처럼 시야를 채웠다.

다시 돌아온 현실 속엔 거대한 형체가 느닷없이 루페르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이것은……?”

렌타이어마르크에 접어들 때 보았던 거대 석상.

그것이 지금 먼 거리를 넘어 선제후의 궁전 앞에 우뚝 서 있다.

“황제.”

빛바랜 두건과 로브로 몸을 가린 은둔자가 어느새 루페르트 옆에 서 있었다.

누구도 그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약속은 기억하고 있겠지? 인간 백 마리다.”

“기억하고말고.”

쪼그려 앉아 있던 석상이 일어났다.

그것이 일어나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

수천 명의 절규가 석상 안에서 아우성쳤고 움직일 때마다 관절에서 시뻘건 선혈이 폭포처럼 흘러나왔다.

그것은 고통 그 자체를 악의적으로 형상화한 거신이었다.

거신이 움직이는 걸 본 자들은 놀라움보다는 심장에 스며드는 소름 끼치는 고통부터 먼저 느꼈다.

사람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부리나케 달아났다.

자리를 지킨 건 황제 루페르트와 소수의 수행원이 전부였다.

저마다 역전의 용사라고 하지만 악의 우상 앞에서는 한낱 하찮은 존재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끄윽!”

누구보다 신비에 민감한 지겔슈타트가 버티다 못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보다 둔감한 한스 징펠만은 부릅뜬 눈으로 지켜볼 수는 있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총기는 그조차 모르는 사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의 도제들은 이미 달아난 뒤였다.

마를로네는 두 눈과 두 귀를 막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마, 마음에 멍이 드는 느낌이야. 뭐냐고. 저건. 대체 뭐냐고?!’

괴물 사이에도 악의 우열이 있다면,

마를로네는 확답할 것이다.

저 거인상은 저 눈앞의 구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악의로 뭉쳐졌다는걸.

규모가 다르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수천이라는 숫자와 수백만이라는 숫자의 차이라고 할까.

몸이 쪼그라들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마를로네는 문득 호기심을 느꼈다.

행여라도 그 끔찍한 거인상이 눈에 들어올까 봐 눈을 가늘게 뜨고 루페르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궁금했다.

황제라는 자가 이런 상황에 대체 어떻게 반응하고 느낄지.

황제라고 하나 그 또한 인간 아니던가.

‘황제.’

곧 승마용 장화를 신은 루페르트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두 다리는 마치 다리를 떠받드는 기둥처럼 우뚝 선 채 버티고 있었다.

“?”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시선을 좀 더 위로 향했다.

잘 다려져 정리되어 잡풀 하나 찾을 수 없는 바지의 올곧은 라인을 따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당당하게 편 허리와 굳게 쥔 주먹이 보였다.

이 대목에서 마를로네는 어째서인지 분한 마음이 들 거라는 확신을 품어갔다.

‘그럴 리가 없어. 슈발츠마인의 나약한 인간 따위가 나조차 감히 쳐다볼 엄두도 못 낼 저 괴물을 똑바로 바라본다고?!’

분명 그 얼굴은 다를 것이다.

지겔슈타트처럼 거품을 물고 있거나 한스 징펠만처럼 혼백이 나갔을 것이다.

어쩌면 선 채로 기절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희망을 품고 루페르트의 얼굴을 눈에 담았을 때, 마를로네는 모든 가정이 눈처럼 녹으면서 씻을 수 없는 치욕감으로 변해 가는 걸 느꼈다.

황제의 얼굴은 당당하고 안온했다.

일말의 공포를 품었으나 그는 여전히 황제였다.

‘어, 어떻게 이런!’

그녀만이 아니다.

의식을 차린 지겔슈타트도, 정신이 반쯤 나가 버렸던 한스 징펠만도 그들의 주군을 약속한 듯 동시에 쳐다보았고 보았다.

모든 걸 무너뜨리는 폭풍우 속에서 홀로 오롯이 선 황제의 모습을.

하나의 생각이 모두의 생각에 깃들었다.

황제는 제국의 기둥이니.

“…….”

꼭두각시 황제 시절 루페르트는 늘 표정의 가면을 쓰고 다녔다.

그것은 습관을 넘어선 삶의 일부였다.

그 가면이 지금 시공을 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황제의 얼굴을 덮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태연한 척하는 것.

꼭두각시 황제에게 남은 마지막 누더기처럼 찢어진 자존심이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어떻게. 이런. 어떻게 이런 끔찍한 게 존재할 수 있지?’

마치 악몽의 한가운데 있는 기분.

정신 그 자체가 찢겨 버릴 것 같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도망칠 수도 없고, 고개를 돌릴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남들보다 머리가 좋지도 않고 무력이 강한 것도 아니며, 마법의 재능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위태로운 정신을 지탱하는 건 과거의 고통이다.

불타는 테타우, 망국의 황제가 보았던 끔찍한 편린들.

‘내가 무너지면 제국 또한 무너진다.’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루페르트는 다른 생각을 했다.

감정이 한곳에 몰려 미쳐 버리는 걸 막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의 전환을 시도했다.

수많은 생각이 초원의 꽃처럼 덧없이 피었다 사라진 후 몇 가지 의문만이 뇌리에 남았다.

남겨진 생각은 극도로 단순했다.

무엇이 이런 걸 만들어 냈을까?

그 기이한 은둔자?

아니다.

그에겐 이런 걸 만들 힘이 없다.

저런 신적인 존재는 오직 같은 신격을 가진 자만이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설마. 리프니에님이?’

뒤늦게 루페르트는 고막에 아까부터 꽂히고 있던 소음을 자각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것이다.

기세등등하던 그는 개처럼 바닥을 뒹굴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의 귀와 입과 콧구멍에서 시뻘건 붉은 벌레가 역겹게 꿈틀거리며 튀어나오고 있었다.

루페르트와 더불어 유일하게 평온한 은둔자가 그 벌레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악마가 새로 만든 장난감인가. 조잡하군. 그래, 조잡하구나.”

“……그 악마는 누구지?”

황제가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묻자 은둔자가 크게 웃었다.

그때 루페르트는 보았다.

은둔자의 혀가 있어야 할 자리에 혀 대신 새하얀 갑각질의 벌레가 자리 잡고 있다는걸.

그 벌레가 혀처럼 움직이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루페르트는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유지하던 마음의 테가 또다시 일그러지는 걸 느꼈다.

‘어, 어억!’

마음은 일그러지지만, 표정만은 악착같이 지켰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당당한 태도만이 루페르트가 내세울 수 있는 전부니까.

“너도 알고 있지 않나?”

“…….”

은둔자가 꿈틀거리는 구체를 노려보며 팔을 내저었다.

거신이 셀 수 없는 사람의 아우성과 선혈을 뿜어내며 광장을 광기와 피로 물들이며 구체에 다가갔다.

구체는 세 개의 붉은 눈을 번들거리며 극산성의 용액을 뿜어내 보지만 거신의 주먹이 높이 올라갔다 내리치자 깡통처럼 찌그러졌다.

그게 끝이었다.

어떤 군대, 어떤 병기, 어떤 마법으로도 처리할 방법이 보이지 않던 붉은 구체는 단 일격에 으스러졌고 뿔뿔이 흩어졌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하나의 악몽을 종식한 은둔자는 비릿한 냉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악마, 예전만은 못하군.”

순간 이국의 깃털이 바람처럼 눈앞을 덮쳐 왔다.

한 줄기 바람이 그친 후 거신과 은둔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겨진 건 도처에 널린 벌레 사체와 광장은 뒤덮은 시뻘건 선혈, 광기의 잔향과 미친 채 뒹굴거리는 선제후뿐이었다.

루페르트는 천천히 돌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전사들을 미소 지은 얼굴로 응시했다.

부동(不動)의 루페르트.

당분간 그의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칭호를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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