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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97화 (97/225)

97화 25. 믿음 (5)

숲과 녹색의 평야가 끝나고 뾰족하게 솟은 산과 낮은 구릉들이 하늘과 지평선을 가려 그 산그늘 아래 짙은 녹색으로 물든 방대한 늪과 썩어 가는 저수지가 보였다.

렌타이어마르크에 도착했다.

한때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황제를 배출하기도 했던 선제후령은 지금은 제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으로 추락했다.

지식인들은 그 원인으로 여러 가지 사유를 들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하나다.

땅 자체가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마치 신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가을이 되면 황금밭으로 물들었던 밀밭은 지금은 마물이 창궐하는 늪지로 변했고, 번쩍이는 황금을 배출하던 광산엔 죽음을 부르는 가스와 마물로 득실거린다.

천천히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 루페르트는 창밖에 펼쳐진 렌타이어마르크의 풍경을 무심한 눈으로 담았다.

‘여기가 렌타이어마르크인가.’

루페르트가 렌타이어마르크의 땅을 밟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회귀 전엔 이곳에 올 일이 없었다.

내전과는 동떨어진 중립 지역에다가 가치가 없는 땅이었다.

시쳇말로 휴양지나 피난처로도 못 쓸 곳이라는 평가를 받던 곳이다.

황제가 올 이유는 하나도 없었고 회귀 이후에도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 그곳에 도착했다.

루페르트는 자신 앞에 앉은 만슈타인을 응시했다.

“이제부터입니다.”

명목상의 지휘관은 분더발트지만, 이제부터 군대를 움직이는 건 만슈타인이다.

황제를 등에 업은 그는 폭풍처럼 군대를 적지로 내몰았다.

뒤가 없을 정도로 무모한 행군이었다.

전방 정찰은 물론이고 측 후방 경계마저 도외시했다.

제아무리 한스 징펠만의 선행 정찰대가 정보를 보내온다고 하지만 너무나도 무방비했다.

“이 상태에서 한 번이라도 기습을 받는다면 우리는 끝날 수 있습니다.”

분더발트의 말은 정론이다.

루페르트도 완고한 연대장 출신 장군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루페르트가 원하는 건 정론이 아니다.

정론을 원했다면 시간을 들여 테타우와 카렐리아에서 병력을 쥐어짜 내 황제의 군대에 걸맞은 거대한 토벌대를 일으켜 렌타이어마르크 자체를 짓뭉개 버렸을 것이다.

루페르트가 선택한 건 만슈타인이다.

“그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장군.”

분더발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인내심도 슬슬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렌타이어마르크에 진입한 지 3일째.

만슈타인은 기병대를 이끌고 한발 먼저 바이엔 쪽으로 달려갔다.

분더발트는 이에 대해 평소보다 더 강하게 반발했다.

“지금 시국에 기병대마저 물린다면 병사들을 통제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만슈타인은 한눈에 자신의 힘으로는 장군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바로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무리 만슈타인이 그가 믿고 신뢰하는 자라고 하지만 한쪽 편만을 드는 건 루페르트가 보기에도 형평이 맞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믿음을 계속 줄 것인가.

아니면 여기선 한발 물러설 것인가.

‘철혈대제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의 모든 방식을 따르려는 건 아니겠지만, 전쟁의 방식만큼은 흉내 내도 좋으리라.

전쟁 군주로서 그만한 성취를 이룬 황제는 천 년에 달하는 제국사를 들춰 봐도 그리 흔치 않으니까.

‘일단 믿음을 줬다. 끝까지 믿어 보자. 만슈타인을.’

“기병대를 보내게.”

“병사들이 소요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분더발트가 경고하듯 말했다.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에게 눈짓했다.

또 한 번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의 편을 들었다.

분더발트의 얼굴빛이 흙색으로 변했다.

그걸 본 루페르트는 적잖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미안합니다. 분더발트 백작.’

그렇게 해서 기병대와 보병대가 갈라졌다.

보병들은 불만 어린 눈으로 기병대가 떠나는 걸 배웅했다.

곳곳에서 쑥덕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폐하. 병사들의 불만이 엄청 큰 거 같은데요?”

그날 밤, 마를로네가 사적으로 찾아와 말을 걸었다.

출정 이래 그녀와 루페르트가 처음으로 나누는 대화다.

루페르트는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다.

‘이 녀석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심각한 거 같은데.’

“그래?”

그런데 루페르트에게 병사의 불만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지금 그가 보고 싶은 건 만슈타인이 도박이 들어맞냐 들어맞지 않느냐다.

만슈타인의 도박이 틀리는 순간 루페르트는 회귀를 해야 할 테니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일 하나하나 신경을 쓰기엔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

‘시간을 빨리 감는 능력은 없을까.’

솔직하게 다 때려치우고 결과만을 보고 싶은 게 루페르트의 솔직한 속내였다.

그러나 마를로네는 그와는 다르다.

그녀는 현재를 살아간다.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그녀가 흐릿한 눈동자로 루페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루페르트의 눈이 그녀의 얼굴을 향했다.

잘 먹어서인지, 고생을 안 해서인지, 아니면 세월이 지나서였는지 그녀의 얼굴은 처음 위버하임 장원에서 봤을 때 훨씬 더 여성으로 보였다.

“전쟁엔 여러 주인이 있겠지만, 결국 최후의 주인이 되는 건 병사라고요.”

“그런 말이 있긴 하지.”

“지금은 정말로 심상치 않아요. 폐하.”

그녀의 목소리엔 약간이나마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루페르트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 보지.”

마를로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루페르트는 뭐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하루가 지났다.

병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모한 강행군도 병사의 불만을 키우는 데 일조했지만, 그보다 큰 불씨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수행하는 지휘부에 대한 불만이다.

만슈타인, 그리고 황제에 대한.

그나마 정예라고 손꼽히는 연대이기에 꾹꾹 눌러 참았지만 렌타이어마르크의 음습한 공기와 늪지, 푸른 것 같지만 어딘가 빛바래 보이는 하늘이 그들의 인내심을 끌어내렸다.

거기다가 아침에 그들의 흔들리는 마음에 결정타를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짙은 안개 너머로 수백 명에 달하는 인간이 이동하고 있다.

비척거리는 걸음, 썩어들어 가는 시체의 냄새.

그들은 산 사람이 아니다.

망자의 목동, 강령술사가 이끄는 시체 무리가 부대 앞을 가로지른 것이다.

병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미 사기가 낮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병사들의 흔들림은 루페르트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진정해라. 우리는 황제의 군대다.”

“정숙! 정숙하라!”

분더발트가 장교들을 시켜 병사들을 추스르려 했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보다 못해 장교들을 시켜 망자들을 치우려 하지만 누구도 망자 무리 옆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군율보다 더 무서운 미지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확실히 안개 속에서 실루엣만을 드러낸 채 불규칙적으로 걷는 시체들의 행진은 인간의 마음 밑바닥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빌어먹을. 안 그래도 죽으러 가는데 이런 것들까지 만나야 하나?”

“할머니에게 듣긴 했지만 진짜로 이런 끔찍한 것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는 건 생전 처음이야.”

“우리의 운명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불온한 소리가 곳곳에 터져 나오는 가운데 지겔슈타트가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폐하. 제가 폐하 곁을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손엔 수백 개의 부적으로 감싼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마법사가 전투를 준비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마를로네 또한 날이 굽은 기병도를 들고 루페르트 뒤를 조용히 지켰다.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이 녀석. 감이 좋긴 해.’

마를로네가 살짝 불만이 담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뭐라도 해 보라는 듯이.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폐하.”

분더발트가 그답지 않게 사색이 된 얼굴로 루페르트를 맞이했다.

루페르트는 분더발트와 눈을 마주치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장군. 내가 직접 저 강령술사들과 담판을 짓고 오겠소.”

“폐하가 말입니까?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루페르트는 주변을 말없이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분더발트는 이내 루페르트의 뜻을 알아차리고 황송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진정으로 위험한 건 강령술사가 아닌 병사들이다.

루페르트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했다.

“말을 가지고 와라. 내 직접 망자의 목동과 담판을 짓고 오겠다.”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백마를 탄 황제가 마법사와 도펠죌트너의 호위를 받으며 병사들 사이를 나아갔다.

불평을 퍼붓던 병사들은 황제가 지나가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경의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전과는 다르군.’

아무리 그들을 사지로 이끈 황제라고 해도 아직 제국은 건재하고 황제의 권위 또한 살아 있다.

그 현재의 상태가 병사들의 경의로 이어진 것이다.

루페르트는 한발 더 나아갔다.

“거기, 망자의 목동이여.”

안개 속 너머 망자들을 이끄는 자들을 향해 루페르트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금속제 링을 끝단에 빼곡하게 붙여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지팡이를 든 회색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루페르트의 옷차림과 늠름한 말, 좌우를 지키는 호위병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초로의 남성과 젊은 여성 하나.

그들 뒤에 얼굴을 검은 포대로 가린 시체들이 줄을 지어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서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 시체의 숫자는 무려 수백 구에 달했다.

“내 부하의 경고를 듣지 못했는가?”

루페르트가 날카롭게 물었다.

남성이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격렬한 기침이 그의 말을 막았고, 대신 젊은 여성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들었습니다. 존귀한 분이시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놀라움을 느꼈다.

시체를 다루는 역겨운 인간 주제에 청아하고 지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리프니에보다 더 깊고 우아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명에 따라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루페르트는 울피아나를 떠올렸다.

그 정도의 미인이었다.

무엇보다 내려 깐 깊은 슬픔을 머금은 듯한 눈이 루페르트가 피상적으로 알던 강령술사의 이미지를 산산이 조각냈다.

‘이런 관상으로 시체 목동이나 하고 있다고?’

작은 놀람 속에서 여성이 말했다.

“한스 징펠만 총사님에게 곧 군대가 지나가기에 망자의 장송을 멈추라는 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존귀하신 분과 그 군대가 너무나 빠르게 오셔서 그만 우리처럼 추악한 자들이 존귀하신 분들의 눈을 더럽히고 말았군요.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뭐 하는 짓이지? 강령술사?”

루페르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일말의 존중도 없이 포대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줄지어 움직이는 시체들을 경멸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루페르트는 호라신의 충실한 신도는 아니지만, 망자를 다루는 강령술사는 혐오했다.

혐오 받아야 마땅한 자라고 생각했다.

망자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어떤 존중이 필요하단 말인가.

루페르트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은 여성은 그러나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게 예의 그 내리깐 눈으로 젖은 땅을 응시하며 청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작년에 역병이 일어 마을 하나가 전멸했습니다. 아무도 시체를 수습하려 하지 않아서 저희들이 유족 대신 시체들을 매장지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역병에 걸린 시체들을 우리 앞에 지나가게 한다고?”

“역병은 사람이 죽으면 함께 죽습니다. 길어 봐야 한 달일까요? 그 이후엔 부패 속에서 사멸합니다.”

여성이 시체들을 돌아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은 오래전에 역병에 걸려 죽었겠지요.”

눈동자에 흔들림이 없다.

마치 호수의 표면처럼 잔잔하다.

망자의 안식을 방해하는 역겨운 일을 하는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한 눈이다.

그녀만이 아니다.

기침을 하던 사내가 비로소 얼굴을 보였다.

그 또한 여성과 비슷한 표정과 눈을 갖고 있었다.

“……사정은 확인했다.”

여전히 경멸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마음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최대한 빠르게 저들을 우리 앞에서 치우도록.”

한마디 말을 남기고 루페르트는 돌아섰다.

시체들이 떠났다.

짙은 안개와 더불어.

아침 햇살을 측면에서 받으며 루페르트는 진중으로 돌아왔다.

병사들이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그들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 약속하겠다.”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제를 향했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고요가 진중을 감쌌다.

그 중심에서 루페르트가 말했다.

“너희들 중 단 한 명도 죽지 않게 하겠다.”

허황된 약속일지도 모른다.

병사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허황된 약속이라고 할지라도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망자를 몰아내고 승리를 약속하는 황제를 목격한 병사들은 다시 한번 제국과 군기에 대한 충성을 떠올렸다.

“폐하.”

분더발트가 굳은 얼굴로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의 뜻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너무 과장된 약속을 하신 건 아니신지……. 한 명이 아니라 한 50명, 아니 100명 정도만 죽겠다고 하는 것이…….”

“걱정하지 마시게. 장군. 이건 허언이 아니니.”

루페르트가 유쾌하게 웃었다.

‘수틀리면 회귀하면 그만이야.’

그 태평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를로네는 평소와는 다른 눈빛으로 쾌활하게 웃는 황제의 옆 모습을 응시했다.

어째서인지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녀는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크기로 속삭였다.

“우리 폐하, 거짓말 좀 하는데?”

그런데 루페르트는 자신의 약속이 허황된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신뢰하는 진정한 장군, 만슈타인이 옳다면 약속은 지켜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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