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25. 믿음 (4)
“그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어요. 폐하.”
리프니에는 발랄한 걸음으로 루돌프 주위를 돌았다.
루돌프의 그늘진 시선은 그녀가 휘날리는 길게 자란 검은 머리카락의 끝단을 향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 루페르트 가우저. 루페르트 가우저. 그런 이름이었죠!”
“그의 성은 선제후가 되면서 바뀌었습니다.”
“그건 중요치 않아요. 루페르트 가우저는 언제나 저에게 루페르트 가우저죠.”
리프니에가 뭐가 그리 웃긴지 입을 가리고 소녀처럼 킥킥거리는 웃음을 냈다.
루돌프의 얼굴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저기 들어봐요. 폐하. 루페르트 가우저가요. 그 설인을 만났다지 뭐예요? 세상에! 그러고도 살아남은 거 보면 참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바로 회귀 원점을 바꾸라고 명했죠.”
잠자코 리프니에의 말을 듣던 루돌프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 가루를 주시지 않은 겁니까?”
“이제 필요가 없잖아요? 어차피 다 떨어지기도 했고.”
리프니에가 갑자기 거리의 아이처럼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늘진 눈이 움직여 그 기품도 없고 예의도 없는 행동을 무심하게 동공에 담았다.
리프니에가 쪼그리고 앉은 채 루돌프를 힘 빠진 얼굴로 올려보았다.
“……아시다시피 저도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요?”
“두려우십니까?”
“제가요?”
리프니에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저, 당신들과는 다르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녀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어두컴컴한 실내는 순간 백색으로 물들었고 공간 자체가 흔들리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루돌프가 고개를 숙였다.
곧 고개 숙인 그의 입에서 침음성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고 있습니다.”
잠시 루돌프를 노려보던 리프니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활기차게 기지개를 켰다.
기지개를 쭉 들이키며 그녀는 힐끗 루돌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폐하.”
“……좀 더 바깥에 있고 싶군요.”
“그토록 바깥을 싫어하시더니. 마음이 바뀌셨나 보네요? 역시, 그 사람. 루페르트 가우저 때문인가요?”
루돌프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늘진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친구를 보고 있으면 예전의 저를 보는 기분이 들더군요.”
“마음에 드나요?”
“솔직하게 답답합니다. 어떤 때는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어리석은 고집을 부리기도 하더군요.”
울타니아의 눈 덮인 산맥을 떠올리며 루돌프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지나치게 순수합니다.”
소녀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폐하. 이상할 정도로 운이 좋은 건 둘째 치고요.”
“하지만 그 덕분에 많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와 여신님의 비원을 이룰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겠지요.”
루돌프가 돌아섰다.
“가시게요?”
리프니에의 물음에 루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고 어둠 속에 마침내 빛이 드리워졌다.
루돌프는 자신의 발밑까지 이어진 모로 세운 빛의 영역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불쑥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여신님.”
“네. 폐하.”
“어린 시절의 안젤리나를 닮으셨군요.”
“어머, 그렇게 보이나요? 우연이겠죠. 인간은 단순한 동물이잖아요? 미의 기준이라는 게 다들 비슷하니 닮아 보이는 것이겠죠. 어머, 머리 색도 같아서 더 그런 느낌일까요?”
리프니에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흑단처럼 검은 머리가 빛줄기처럼 가느다란 금발로 바뀌었다.
미려한 손가락이 눈을 비비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 눈동자가 흐릿한 안개를 머금은 듯한 암녹색 눈동자로 변했다.
“이러면 조금 달라 보일까나.”
잠자코 그늘진 눈으로 리프니에의 변신을 지켜보던 루돌프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안젤리나에게 손을 대신 겁니까?”
이에 여신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침묵했다.
“제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할까요?”
심해의 바다만큼 차가운 기운이 방 안을 느닷없이 채웠다.
루돌프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말없이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떠나가려는 루돌프를 향해 리프니에에게 차갑게 물었다.
“당신도 저를 배신할 생각인가요?”
“그럴 리가요.”
루돌프가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는 어둠보다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소원이 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여신은 야릇한 시선을 보내며 가만히 루돌프를 응시할 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곧 루돌프가 떠나고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면서 빛 속에 있던 리프니에 또한 어둠에 삼켜졌다.
* * *
“중요한 건 시간입니다.”
만슈타인의 계획의 첫 번째는 어떻게든 빠르게 렌타이어마르크의 수도 바이엔에 도착하는 것이다.
다른 건 부차적인 요소다.
최대한 빠른 도착과 대치.
그것이 만슈타인이 구상한 전략의 핵심이었다.
분더발트는 무모한 부관의 발상에 툴툴거리면서도 노련한 직업군인답게 최적화된 행군로를 설정했다.
그는 장군의 지휘봉을 들고서 루페르트에게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행군은 통상 강을 끼고 이루어집니다. 물을 얻기도 쉽고 통상 군대의 보급은 수운을 통해 이루어지니까요. 이에 따라 진격로를 짜 보면 우리 군은 알트링겐 공작령, 부어카스트 백작령, 뵘-파렌하이트 공작령 등 3개 군주의 영지를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좋아. 행군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통지하도록 하지.”
“훌륭한 견해이십니다. 폐하. 한편 설명을 계속하자면, 렌타이어마르크에 들어서서 바이엔에 이르는 행군로는 전부 육로로 수운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디트리히슈타인 공작령과 렌타이어마르크 경계에 있는 제국도시 하빔에 미리 사람을 보내 필요한 물자를 갖추도록 한다면 한달음에 바이엔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분더발트의 설명 속에서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늘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대담할 발상을 이야기하던 그는 지금은 모범생처럼 단정하게 경청하는 자세로 분더발트의 일거수일투족을 반짝이는 눈에 담고 있었다.
‘분더발트의 경험을 모두 흡수하려는 건가.’
분더발트도 그런 만슈타인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처음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애송이라고 은근슬쩍 경멸하는 눈치였지만, 만슈타인이 진심을 다해 그를 장군으로 모시고 그에게 본을 받으려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이자 누그러지는 듯했다.
물론 만슈타인의 계획 자체엔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만에 하나,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우리보다 많은 군사를 가지고 기습을 한다면 폐하를 지켜 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분더발트는 틈만 나면 루페르트를 찾아와 만슈타인의 계획을 철회할 것을 은근히 압박했다.
루페르트는 그때마다 표정 관리를 하며 새로운 장군을 달래야 했다.
“첩자들이 말하길 선제후의 병력은 갖춰지기 전이라고 하네. 휘하 군주와 봉신들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고. 우리가 바이엔을 공략 못 할 가능성은 있지만 당장 야전에서 수세에 몰릴 일은 없겠지.”
물론 이 말은 거짓이다.
상당한 숫자의 첩자가 렌타이어마르크에 파견됐지만, 적어도 군주나 귀족 층에서 반기를 든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미네아의 붉은 벌레를 다루고 그걸 통해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선제후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미네아의 붉은 벌레요?”
행군 중 잠시 쉬는 시간에 루페르트는 리프니에를 찾아갔다.
리프니에는 군대를 따르는 수레 행렬 중 하나에 섞여 있었다.
처음 그녀가 막무가내로 인간의 몸으로 군대를 따르겠다는 말에 루페르트는 적잖은 걱정을 했지만, 여신답게 막상 행군이 시작되자 그녀를 걸고넘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사람도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마법사 지겔슈타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루페르트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루페르트처럼 물이나 음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마차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루페르트가 보기에 리프니에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는커녕 그 존재가 인식조차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덕분에 루페르트는 별 무리 없이 소녀의 모습을 한 리프니에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만 그게 딱히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진 않았다.
“잘, 모르겠네요. 그보다 미네아가 뭐죠?”
“모르십니까? 룸이 건국되기 전의 고대 문명이라고 들었는데.”
“으음. 그런 문명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네요. 망한 문명이 하나둘이어야죠.”
사람이 돼서 그런지 리프니에는 이제 얼굴로 다채로운 표정을 드러냈다.
지금 그녀의 표정은 조금은 멍청해 보였다.
‘여신님과 잘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한데.’
루페르트가 속으로 작은 불경을 저지르고 있자니 리프니에가 불쑥 묻는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요?”
“여신님도 고대의 존재, 혹 이에 대해 아실까 싶어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런 거 몰라요. 미네아니 뭐니. 붉은 벌레? 전부 다 기분이 나쁘네요. 루페르트 가우저. 저는 비위가 약한 여신이랍니다~.”
“…….”
“그나저나 이제 슬슬 렌타이어마르크 쪽 아닌가요?”
“3일 뒤면 주의 경계에 들어설 겁니다.”
“그렇군요. 골도미안으로 향한다고 했죠?”
리프니에가 갑자기 흥미가 돋운 듯 눈을 반짝였다.
“골도미안요?”
“아, 옛 지명이 나왔네요. 지금 인간의 언어로는 바이엔이라고 부르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바이엔에 도착하면 절 찾아 주세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리프니에는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루페르트는 영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신경 쓸 것이 훨씬 많으니.
“또 강행군인가.”
당장 병사들이 불평불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이번 작전이 정상적인 게 아니라는 건 병사들의 눈으로도 보였을 것이다.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지만 5천에 불과한 병력으로 제국 선제후 중 최약체라고 하나 엄연한 일곱 개의 창 중 하나인 렌타이어마르크를 무릎 꿇린다는 것이 병사들이 보기에도 무리수처럼 비쳤을 것이다.
게다가 렌타이어마르크 쪽으로 다가갈수록 불길한 소식이 속속 들려왔다.
바이엔에 역병이 돌고 있다.
선제후가 이미 3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모집하여 황제를 기다리고 있다.
렌타이어마르크 일대에 죽은 자가 배회하고 있다.
대부분의 헛소문은 한스 징펠만이 이끄는 선행 정찰대가 가볍게 물리쳤다.
“역병의 징후는 없습니다. 선제후 또한 아직 군세를 모집 중이고요. 수비군을 제외하고 당장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전에 폐하께서 직접 보셨던 1개 연대가 전부입니다.”
다만 마지막 소문만은 천하의 한스 징펠만도 부정하지 못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루페르트에게 귀띔했다.
“망자의 목동이 렌타이어마르크 일대를 돌아다니는 건 맞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으며 되물었다.
“강령술사가 돌아다닌다는 소린가?”
한스 징펠만 또한 눈동자에 미약한 경멸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내외엔 시체를 부리는 자가 존재한다.
제국이 시작되기도 전에 존재했다는 죽음과 잠, 부패와 매장의 신 운드마의 신자들이다.
간단히 강령술사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입에 담기도 껄끄러운 죽음의 사술로 시체를 일으켜 세우고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
이단에 자비를 베풀지 않는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건, 호라 경전에 그들의 신이 부정한 신의 목록에 오르지 않아서다.
남쪽의 룸 제국인들은 으슥한 북부의 숲을 배회하는 운드마의 신자를 접할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특성상 모두의 배척을 받는 그들은 공개적인 이단 사냥의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 뿐이지 도펠죌트너보다 더 심한 박해를 받으며 제국의 가장 어두운 영역에 간신히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들은 슈발츠마인에선 자취를 감췄지만 렌타이어마르크 쪽에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굳은 얼굴로 한스 징펠만에게 명했다.
“그 흉측한 것들이 병사들의 눈에 띄면 사기에 좋지 않은 영향만 끼치겠지. 무력을 써도 좋으니 행군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쫓아내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말하게.”
“어디까지나 풍문이지만.”
한스 징펠만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바이엔에 제국 성인이 나타났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