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25. 믿음 (6)
마음이라는 것이 몸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마음이 몸을 만드는 것인지 그 기원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같은 무한히 순환되는 허무한 질문과 크게 다를 바 없겠지만, 마음과 몸이 서로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건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몸이 병들면 마음은 대체로 망가지는 법이다.
일부 예외를 들며 정신이 육체보다 강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두르며 불가능한 업무를 요구하는 감독관과 다를 바가 없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몸은 오래전에 병들었다.
사람들은 그의 병든 몸이 영민하고 고결하던 마음까지 병들게 했다고 숙덕거린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가 겪었던 상실과 고통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르게 말하리라.
“…….”
최근 시력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아마도 황궁에 연금된 전후일 것이다.
지금 그가 구분할 수 있는 사물의 형체뿐이다.
잘 보이지 않는 눈은 방에 걸려 있을 한 여성의 초상화를 향했다.
침침한 눈은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선제후는 단지 눈을 감는 것만으로 화폭에 그려진 얼굴을 현실보다 생생하게 그려 낼 수 있다.
그 그림은 아내의 초상이다.
그가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고 정성을 다했던.
더 오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와 가문을, 나아가 렌타이어마르크를 위해 건강한 아이를 낳아 줄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국이 그녀를 죽였다.
철혈대제라 불리는 폭군이 그녀를 죽게 만들었고, 선제후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그 이후의 나날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게 무가치했다.
단지 죽는 날만을 기다렸을 뿐이다.
“루페르트 가우저.”
한 사내가 그의 인생에 끼어들기까지 말이다.
“……차라리 무능한 것이 행복했을 터인데.”
문이 열렸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모호한 시계 속에서 흐늘거리며 다가오는 희끄무레한 것을 응시했다.
가벼운 싸구려 종소리가 들렸다.
그 종소리를 듣고 선제후는 다가오는 사람의 정체를 파악했다.
선제후가 희미한 얼굴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오셨는가?”
사람들은 그가 나타나면 도망가기 바쁘다.
몸을 로브로 꽁꽁 싸매고 있지만 차마 가리지 못한 눈자위, 드러난 손에 나타난 썩고 문드러진 흔적은 제국인이 두려워하는 질병의 증상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나병이다.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도시의 출입이 허가되지 않고 사람들이 그들의 접근을 알릴 수 있게끔 늘 딸랑거리는 종을 들고 다녀야 하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집단이다.
그 사내 또한 나병 환자였다.
모두가 그를 피하고 그를 무시하고 다가오는 걸 광적으로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안다면 어느 누구도 그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나병의 에디지우스.”
그는 제국 성인이다.
“황제가 다가오고 있다는군.”
제국 성인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천으로 감싼 몸 여기저기에 불그무레하고 꿈틀거리는 것들이 튀어나와 옷을 역겨운 비린내 나는 액체로 적셨다.
제국 성인이 말했다.
“가급적이면 나라는 거대한 존재가 나서지 않게 했으면 좋겠군.”
선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당신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 둬야겠지.”
“이길 방법이 보이나?”
제국 성인이 소매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이윽고 꿈틀거리는 붉은 벌레를 꺼내 마치 포도를 먹듯 입안에 집어넣고 꿀꺽 삼켰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병든 눈으로 그 흐릿한 기행을 지켜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겨우 5천 명이야. 그걸로 뭘 할 수 있겠나?”
“이미 그자는 테타우에서 당신을 한 번 꺾지 않았나?”
“운이 좋았을 뿐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쿵!
이끼가 낀 나무 같은 피부색을 가진 주먹이 책상을 후려쳤다.
펜이 꽂힌 잉크병이 넘어지며 검은 잉크를 책상 위에 흥건히 흘렸다.
선제후가 날 선 목소리를 쏟아 냈다.
“슈발츠마인 가문에서조차 출신을 의심받는 촌뜨기 상대로 진정한 황제의 후예인 내가 패배하리라고 보나?”
“황제를 우습게 보지 말게. 선제후. 그는 이미 나의 동료 하나를 죽였으니까.”
제국 성인은 선제후를 핏발 선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황제에겐 특별한 힘이 있어.”
같은 시간.
바이엔이 내려다보는 야트막한 산등성이엔 한 무리의 기병이 산정에 올라 아래에 펼쳐진 거대한 성벽에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두에 선 사내가 망원경으로 도시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역시 그림대로네. 동방 제국 30만 군세를 막아 낸 도시 다운 위용이야.”
매부리코에 주걱턱, 구부정한 허리에 심하게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칼.
그 외모는 특출날 것이 전혀 없었지만, 망원경에서 눈을 떼자 마치 별 그 자체가 빛나는 것 같은 확신에 찬 눈동자가 드러났다.
알브레히트 폰 만슈타인.
그가 바라보는 건 도시만이 아니었다.
그는 별을 보는 자다.
광휘를 품은 시선이 도시로 통하는 길목들을 응시했다.
* * *
“여신님. 드디어 바이엔에 도착했습니다.”
여신의 수레 안.
어두컴컴한 차 안에 정물처럼 앉은 소녀를 보며 루페르트는 여신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래요?”
리프니에가 활짝 웃었다.
그녀가 루페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차에서 나오시려고 합니까?”
루페르트가 다급히 묻자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페르트가 리프니에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소름 돋을 정도로 차가운 손이다.
루페르트의 손을 잡고 리프니에는 처음으로 마차 밖으로 나섰다.
루페르트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
황제나 되는 자가 여성을 전쟁터로 데리고 오는 건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리프니에는 그의 여신.
외부에서 어떻게 생각하건 그녀의 뜻을 거스를 순 없다.
“아, 여기군요.”
루페르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프니에는 태평스러운 얼굴로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바이엔은 산과 구릉, 늪으로 가득 찬 렌타이어마르크에서 가장 넓은 평야 위에 큰 강을 끼고 자리 잡은 유서 깊은 고대의 도시다.
렌타이어마르크에서 발원해 노르드마르크로 흘러 들어가는 하나우강의 중상류를 낀 도시는 오랜 시간 동과 서의 육상 교역로의 집산지로 높은 명성을 누렸다.
그 부의 흔적이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과 별 모양으로 증축된 막강한 요새의 형태로 남아 있다.
타인의 시선을 걱정하던 루페르트는 바이엔의 위압적인 모습을 보며 또 다른 걱정에 빠져들었다.
‘역시 동방 제국 수십만 군세를 막아 낸 도시답군. 듣던 것보다 훨씬 견고하고 단단해 보여. 과연 이런 도시를 단지 빠르게 도시 앞에 당도하는 것만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는 소린가?’
만슈타인의 가장 큰 지지자라고 하지만 루페르트도 그의 계획엔 강한 회의를 품고 있었다.
‘뭐, 지켜볼 일이지만.’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시선을 응시하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프니에가 손가락으로 바이엔으로 통하는 길목 하나를 가리켰다.
그것은 강변을 따라 난 포장도로였다.
“저길 보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저 길 말입니까?”
“길옆에 뭐가 보이나요?”
“바위. 큰 바위가 있습니다.”
“저 바위, 사람 같지 않나요?”
리프니에가 가리키는 바위를 보았다.
일견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니 뾰족한 모자를 쓴 팔다리가 짧은 사람이 웅크리고 앉은 듯한 모양새다.
물론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여러모로 조잡한 점이 많았지만 말이다.
‘야만 문명의 원시적인 유물처럼 생겼군. 룸 제국 양식은 결코 아니야.’
아마 룸 제국이 제국 영역에 진출하기 전에 선주민들이 만든 토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옆에서 노랫말처럼 들려왔다.
“저 바위가 움직인다면 믿으시겠어요?”
“저 큰 바위가요? 못해도 높이만 30미터는 족히 넘을 거 같은데.”
“움직여요. 지금은 모종의 사정으로 봉인되어 있지만 말이죠.”
루페르트는 믿기 어려운 눈으로 거대한 바위를 노려보았다.
“…….”
믿기 어렵지만,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다.
리프니에는 측정이 불가능한 과거부터 살아온 존재니.
그녀가 새침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바위를 움직일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멀리서 경쾌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무리의 기병대가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선두에 선 사내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만슈타인.
이미 무한한 믿음을 주었다.
이제는 그가 그 믿음에 보답할 시간이다.
* * *
탁자 위에 지도가 펼쳐졌다.
바이엔과 인근 지형을 간략하게 그린 조잡한 지도였다.
분더발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상황에서 지도를 보는 게 의미가 있는 건가.’
분더발트의 시선은 저 너머 내다보이는 바이엔의 강력한 성벽을 향했다.
계약된 수비병만 3천 명 규모일 것이다.
도시에서 백성을 징병해 무장시키면 숫자를 배나 불리기 가능하다.
훈련받지 못한 병사가 야전에서 쓸모없다고 하나 성벽 위에 세우면 이야기가 다르다.
포위도 불가능하다.
이쪽에 마법사가 하나 있다고 하나 저들의 성벽 위엔 열 문이 넘는 대포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5천 남짓한 병력으로 5개나 되는 성문을 틀어막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단지 바이엔의 성벽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말고 무슨 효과가 있다는 거지? 두 번이나 황제에게 반기를 든 선제후가 고작 그 정도에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할 것 같진 않은데.’
이제는 직언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황제의 권위를 존중해 억지로 여기까지 왔지만, 현실이 눈에 보인다.
당장이라도 군대를 물리고 테타우와 카렐리아에서 정규 병력을 모집해야 한다.
전쟁이 커지는 게 문제라고 하지만 여기서 패배하는 건 더 큰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분더발트가 헛기침을 하며 루페르트의 눈치를 살필 때였다.
“보다시피 바이엔은 다섯 개의 성문을 가지고 있고, 이 성문으로 통하는 길은 수십 개가 있습니다.”
만슈타인이 입을 열었다.
분더발트와 루페르트의 시선이 동시에 그의 얼굴로 향했다.
분더발트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지만, 루페르트는 달랐다.
‘이 친구.’
여전히 확신에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지켜보리라.
만슈타인이라는 별을 보는 자의 날갯짓을.
“허나 자세히 도시로 통하는 흐름을 살펴보면 주로 이용되는 성문은 두 군데입니다.”
만슈타인이 검은 돌로 지도 위의 두 지점을 표시했다.
동남쪽의 그리폰 문, 그리고 서쪽의 쌍두 독수리 문이다
만슈타인은 목탄으로 성문으로 통하는 길 위에 선을 그렸다.
분더발트가 그 선을 보고 불쑥 말했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거지?”
만슈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엔으로 통하는 길은 여럿이 있습니다. 그중엔 새로 닦인 길도 있지만, 가장 많은 사람과 수레가 오가는 전통적인 길은 바로 이 길이지요.”
만슈타인이 목탄이 이미 선을 그은 길 두 지점에 동그라미를 표시했다.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건?”
목탄으로 그은 길의 궤적 양 끝단에 표시한 동그라미 주위로 여러 개의 길이 모여든다.
바이엔에서 출발한 가도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다른 마을과 도시, 혹은 외국으로 통하는 끝없이 갈라지고 수렴하는 길들의 병목점이다.
“성을 포위할 것도 없이 이 두 지점을 장악하는 것만으로 바이엔의 물류를 장악할 수 있습니다.”
“도적의 수법이군.”
분더발트가 코웃음을 치며 날카로운 눈으로 만만치 않은 부관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저들도 바보는 아니야. 길이 장악되어 있다는 걸 알면 다른 길로 물자를 운송하면 그만이지. 산적마냥 길목에 죽치고 앉아 물자나 뜯는 게 그대의 계획인가?”
처음엔 소극적으로 시작했던 분더발트의 반론은 말미에 가서는 군인답게 거칠고 강압적인 모양새를 띠었다.
만슈타인은 장군의 분노에도 일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물건이야 흐름을 바꾸겠죠.”
“무슨 뜻이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평범한 자를 보며 만슈타인은 별을 바라보던 확신에 찬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힘 있게 말했다.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
그건 분더발트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영역이다.
허를 찔렸다고 할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의문 속에서 장군이 입을 다무는 동안 루페르트는 자신의 진정한 장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하게 물었다.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건가? 만슈타인.”
만슈타인이 빙그레 웃었다.
“선제후는 지금 군대를 모으는 중입니다.”
“그건 알고 있지.”
“그 군대는 어디서 만들어질까요?”
“글쎄. 바이엔인가?”
“바이엔이지요. 렌타이어마르크에서 대량의 장비와 물자를 마련할 수 있는 곳은 거기뿐이니까요. 그런데 병사들은 어디서 올 것 같습니까?”
“그건.”
누군가 탁자를 주먹으로 쳤다.
분더발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