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92화 (92/225)

92화 24. 황제의 검 (5)

“마를로네? 음…….”

지금은 딱히 만나고 싶지 않다.

만나면 재밌는 녀석이긴 하지만 당장 할 일도 많을뿐더러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은 게 루페르트의 마음이다.

루페르트는 이름 모를 꽃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줘라. 굳이 얼굴을 맞대고 할 필요는 없겠지.”

“그게 그분이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

“반드시 폐하에게 직접 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일단 기다리게 해라. 잠시 뒤에 스베아에서 돌아온 대사를 접견해야 되니.”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할까요?”

“저녁 이후가 좋겠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종이 물러간 후 루페르트는 잠시 머리를 비운 채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

잠시 후 또 다른 시종이 루페르트를 찾아왔다.

“스베아에서 돌아온 프라이헤르 백작이 집무실 앞에 대기 중입니다.”

“그래. 곧 가지.”

선제후 시절과 달리 주요 국가의 외교도 황제의 주된 임무 중 하나다.

선제후나 군주가 저마다 독립국의 자격으로 타국과 무역을 트거나 군사를 파병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들이 대표하는 건 그들의 작은 왕국이 전부다.

황제는 제국을 대표하는 자다.

황제는 제국 전체의 외교를 결정할 권한이 있고 신하국이 맺은 협정 체결의 파기를 요구할 권한이 있다.

일개 군주국으로 아무리 약정을 해 봐야 황제가 간섭하면 무위로 돌아간다는 소리다.

그렇기에 외교는 더더욱 황제의 독점적인 영역으로 간주된다.

‘스베아라.’

스베아 왕국은 제국 북부, 빙해 건너 얼어붙은 반도에 자리 잡고 있다.

얼어붙은 반도는 빙해 약탈자라 불리는 북부인의 땅.

스베아 왕국의 주민도 북부인 출신이다.

하지만 스베아 왕국은 형제 북부인과 엄연히 다르다.

그들은 잡신을 믿는 형제 북부인과 달리 제국과 같은 호라신을 믿으며 오래전부터 제국에게 문물과 지식을 흡수하여 나름 문명화된 왕국을 건설했다.

제국 입장에서도 긴 배를 타고 해안가나 약탈하는 야만 부족 대신 무역이 가능하고 말도 통하는 상대가 나은지라 오래전부터 스베아 왕국에 대해 선교사와 지식인, 기술자들을 파견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비록 제국의 봉신은 아니지만 스베아 왕국은 전통적인 제국의 우방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크로지우스라는 이단아의 등장은 수백 년에 이르는 관계조차 뒤흔들어 놓았다.

스베아 왕은 신교를 믿는다.

구교를 중심으로 하는 슈발츠마인계 황제인 루페르트와는 원만하지 않은 사이가 될 수 있다는 소리다.

다만 회귀 전 스베아 왕국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내전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간섭하지도 않았다.

다만 제국이 멸망하기 1년 전쯤에 스베아 왕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초토화된 노르드마르크에 상륙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무너진 폐허를 재건하고 갈 곳 없는 제국 시민들에게 안식을 제공해 주는 한편 들끓는 탈영병과 도적, 마물들을 상대하며 나름의 근거지를 확보했다고.

‘뭐, 별거 없겠지.’

그 스베아 왕국에서 돌아온 프라이헤르 백작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스베아 왕국은 현재 우리 제국의 동맹국이기도 한 야디슈 왕국과 전쟁 중에 있습니다. 다만 최근 전장에서 들려 온 소식에 의하면 일진일퇴의 공방을 하고 화평 교섭 중이라고 하지요. 두 나라 꽤 많은 전비를 들여 전쟁한지라 당분간 스베아 왕국이 제국에 위협을 가할 일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라이헤르 백작의 말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전과 같군. 뭐, 어차피 당연한 일인가. 스베아 왕국은 외국이니.’

루페르트가 경험했던 제국의 멸망에서 외국의 개입은 한정적이다.

뒤늦게 부르봉 왕국이 뜬금없이 레벤호스트 편을 들며 전장에 개입하긴 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그 시점엔 이미 융커스 베샤문트가 이끄는 군대가 제국 국토의 절반을 초토화시키고 테타우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으니까.

스베아 왕국이 제국에 상륙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대세엔 어떤 지장도 없다.

‘어차피 내전만 잘 정리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융커스 베샤문트가 그토록 득세할 수 있었던 것도 내전으로 제국이 너무 황폐화됐기 때문이지.’

제국이 현재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면 누가 감히 제국을 침략할 생각을 하겠는가?

그런데 프라이헤르 백작의 얼굴이 묘하게 심각하다.

그는 루페르트를 보며 눈치를 보다 눈이 마주치자 심각함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스베아 왕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스베아 왕?”

이름도 모른다.

여느 제국인과 마찬가지로 루페르트 또한 외국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으니까.

‘아돌 뭐인 거 같은데.’

“아돌푸스 4세 바사.”

“그런 이름이었지.”

“아돌푸스 바사라고들 불리지요.”

“그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지? 백작?”

“그는 최근에 왕위에 오른 자로 대단히 호전적인 인물입니다.”

“호전적인 군주야 많지.”

“그는 이제 서른을 조금 넘겼는데, 10대 시절부터 부친을 따라 무스코브 공국을 비롯한 북방의 나라와 전쟁에 참전하여 수많은 경험을 쌓았으며 이제 왕위에 오른 지금은 그만의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야디슈 왕국과 비겼다고 하지 않았나?”

“비긴 건 맞습니다. 일진일퇴의 공방을 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와 함께 전쟁을 치른 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다음에 아돌푸스 바사를 상대하는 국가는 진정한 사자의 강림을 볼 거라고.”

프라이헤르 백작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솔직히 전생에선 기억에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성마른 듯한 깐깐한 얼굴과 신중한 말투는 그가 결코 가볍거나 엄살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드러내고 있다.

‘아돌푸스 바사.’

기억해 둘 만한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페르트는 멀리서 온 대사를 돌려보냈다.

대사를 보내고 창밖을 보니 어느새 노을이 졌다.

또 황제의 하루가 지났다.

하지만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루페르트의 일은 멈추지 않는다.

‘당장 중요한 건 장군 쪽이긴 한데. 일단 아무나 임명해서 렌타이어마르크 쪽 반응이나 기다려 볼까.’

당면한 가장 큰 문제.

장군의 선택이다.

이건 군주가 할 수 있는 결단 중 가장 중요한 결단 중 하나다.

제아무리 강성한 국력을 가진 나라라고 해도 무능한 장군이 군대를 말아먹기라도 한다면 크게 휘청이게 될 테니 말이다.

다섯 개의 왕관이라 불리는 제국 주변의 강국들도 한 번의 전쟁에서 패배하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울 것이다.

물론 루페르트의 제국 정도면 3번 정도 큰 패배를 당해도 일어설 수 있겠지만 말이다.

“폐하.”

식사 내내 장군 생각을 한 루페르트에게 시종이 다가왔다.

“뭔가?”

“마를로네 아가씨는 오늘 그냥 돌려보낼까요?”

“아. 그런 일도 있었지. 일단 집무실에…….”

루페르트는 말을 하다 멈추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또 다른 시종에게 시선을 옮겼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쪽이 좀 더 급해 보인다.

“무슨 일인가?”

“알브레히트 폰 만슈타인이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만슈타인?”

“네. 이번 렌타이어마르크 사태에 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루페르트는 앞선 시종에게 손짓했다.

마를로네는 나중에.

지금은 그보다 더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만슈타인?’

리히트보덴에서 만난 신학 대학생.

용기 있고 재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운명의 실타래가 보이지 않았던 자다.

리프니에가 말하길, 그라는 존재는 루페르트를 만나 이전과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운명의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하니까.

그 사내의 운명이 지금쯤 어떻게 변했을까.

루페르트는 즐거워하며 비밀의 방으로 들어갔다.

밖에서는 결코 안을 볼 수 없는 유리창 너머에 만슈타인이 편안하게 앉아 있다.

매부리코에 주걱턱, 심하게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

겉보기엔 평범한 관상에 썩 대단할 것 없는 사내지만, 루페르트의 눈엔 확실히 보였다.

만슈타인이라는 남자 안에 감춰진 자신감의 크기를.

만슈타인은 오로지 자신을, 자신의 운명을 확신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눈빛을 가지고 있다.

‘그럼, 그대의 변화를 볼까?’

루페르트의 왼쪽 눈에 불경한 녹색 빛이 떠올랐다.

곧 빛나는 문자가 눈앞을 덮어 나갔다.

1. 개요

종족: 인간 - 동부 고지 제국인

분류: 천재

성별: 남성

연령: 27세

명성: 어느 정도 알려짐

신체상의 특징: 미약한 통풍

2. 운명의 실타래

별을 보는 자 - A+

3. 특기사항

- 특별히 없음

4. 등급

A+

< “카렐리아의 기병 대위” 알브레히트 폰 만슈타인에 관한 보고 >

‘이 정도의 남자였나.’

비범하다는 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이 정도로 성장한 건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만슈타인에겐 특별한 점이 또 하나 있다.

‘운명의 실타래가 하나밖에 없어.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때 느닷없이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 사람. 전에 본 그 사람이네요. ]

“여신님.”

[ 당신은 만나기 전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지만, 당신을 만나서 운명의 틀 자체가 바뀌어 버렸네요. 그래서일까요? 그에겐 하나의 운명밖에 보이지 않네요. ]

“별을 보는 자……?”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이 가진 하나의 운명을 가만히 응시했다.

곧 그 아래 부연 설명이 나타났다.

고대인처럼 별을 보며 길흉화복을 점치고 미래를 예측하고 나아가 내일의 행동까지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보는 별이라는 건, 내면의 투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욕망, 재능, 열정. 같은 시대에 두각을 드러내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덕목으로 똘똘 뭉친 이 사람이 보는 별은 오직 승리의 길만을 속삭일 것입니다.

‘여신님답지 않게 대단히 우호적인 평가야.’

[ 장군을 찾고 있다고 했죠? 루페르트 가우저. ]

“네, 그렇습니다.”

[ 이 사람은 아주 훌륭한 장군이 되겠어요. 어쩌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

“정말입니까?!”

[ 네, 거기다가. 이 사람의 발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마 당신과 더불어 나아가는 그런 유형의 사람으로 보이네요. 운명이 쌍별로 묶인 관계라고 할까. 하지만 말이죠. 루페르트 가우저. ]

여신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의식 안에서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 운명이 쌍별로 묶였다는 반드시 좋은 징조는 아니에요. ]

“왜 그렇죠? 쌍별로 묶인다는 건 그만큼 단단하게 묶여 있다는 뜻 아닙니까?”

[ 가령 부부를 예를 들면 그렇죠. 그들의 운명은 가장 대표적으로 쌍별로 묶인 관계죠. 하지만 말이죠. 루페르트 가우저. 인간에겐 좋은 관계만이 아니라 좋지 않은 관계도 존재하지 않나요? 이를테면 숙적이라든가. ]

‘운명이 쌍별에 묶인 적?’

루페르트가 떠올린 건 융커스 베샤문트다.

그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가 황제 루페르트 일생일대의 대적이다.

융커스 베샤문트는 그야말로 악마가 내린 자로 출신, 출생, 경력 모든 것이 불명이며 악마의 힘을 휘두르고 지나가는 곳에 어떠한 산 것도 남기지 않았다.

만슈타인이 아무리 비범하다고 해도 제국의 파멸자와 같은 선상에 놓일 것 같진 않다.

무엇보다 그에겐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내 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 늘 그렇듯 결정은 당신의 몫이에요. 관망자인 저로서는 이런 가능성이 있다 이야기해 주는 게 고작이니까요. ]

“…….”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에겐 유능한 장군이 필요하다.

그것이 양날의 검이 됐든 뭐가 됐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루페르트에겐 시간을 돌리는 힘이 있으니까.

무엇보다.

‘……만슈타인.’

그는 루페르트와 함께한 사람이다.

직접 두 눈으로 보았고 어떻게 행동하고 판단하는지 보았다.

곧 어두운 시대가 올 것이다.

전쟁과 역병, 마물과 종말이 들끓을 그 지옥도를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안전하고 무능한 자보다 위험성이 있더라도 뛰어난 자가 나을 것이다.

루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을 정했다.

누구를 황제의 장군, 황제의 검으로 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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