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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91화 (91/225)

91화 24. 황제의 검 (4)

천 년을 바라보는 제국의 수도답게 테타우의 황궁은 관리자조차 그 숫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전에 지어진 용도가 불분명한 건물은 원래의 용도를 잃고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개조되거나 증축 혹은 비워지는 데 황궁 뒤뜰에 자리 잡은 작은 집도 그중 하나였다.

나이 지긋한 정원사가 말하길 선선제, 천둥제가 바깥에서 데려온 여인과 밀회의 장소로 썼다고도 하는 그 아담한 석조 주택의 이름은 전나무관이었다.

평소에 비워진 그 전나무관엔 최근 새로운 입주민이 들어왔다.

“어때? 이제 움직일 수 있을 거 같아?”

“크윽!”

“무리하지 말고. 아프면 누워 있어.”

마를로네와 베르크 란.

루페르트에게 극적인 승리를 안겨다 주었던 조손이 이 작은 집의 주인이다.

그들의 신분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그들은 더 이상 빨간 명찰을 달지 않는다.

루페르트의 명령으로 챔피언과 그 혈육에 대한 예외를 인정한 것이다.

도펠죌트너 전체에 대한 차별 철폐는 현재로서는 꺼내기 힘든 주제지만, 적어도 황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서 승리한 자에겐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누구도 감히 이 명령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건 당연지사.

덕분에 마를로네는 더 이상 남장을 하고 사내아이 흉내를 내지 않는다.

아마도 모친에게 물려받았을 긴 금발을 드리우고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여성의 의복을 입고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황궁 내의 허락된 지역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게 그녀의 일과다.

“조금만 더 지나면 나을 거 같네요.”

의사가 사망 판정을 내렸던 베르크 란은 의사가 경악할 정도의 회복세를 보였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의식은 하루 만에 찾았고 뒤집힌 내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를 찾았으며 온몸 구석구석 뼈에 간 금도 남들보다 빠르게 아물었다.

“도펠죌트너의 회복력이 보통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마를로네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병상에 누운 채 먼 곳을 바라보는 조부의 눈동자에 서린 분노의 불길은 조금도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

사면과 함께 상당한 재산을 얻고 제국 어디든지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손에 쥐었지만, 베르크 란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헛된 꿈을 욕망한다.

덧없는 등불을 향해 뛰어드는 날벌레처럼.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는 그 욕망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것이다.

“…….”

조부의 소원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마를로네는 조부를 도울 것이다.

이미 손을 써 놓았다.

그 젊은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는 지켜볼 일이겠지만.

의사가 떠난 후 마를로네는 주변을 가지런히 정리하고는 조부를 향해 불쑥 물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밖에 나갔다 올 생각인데.”

“크림을 안에 넣은 크루아상이 먹고 싶군. 위에 가루 설탕을 듬뿍 뿌리고 딸기도 곁들인.”

“소시지는?”

“지금은 별로 먹고 싶지 않다.”

“알았어. 저녁에 들어올 테니 그전까지 혼자 잘 있을 수 있지?”

“……빨리 돌아와라.”

베르크 란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마지못한 어조로 대답하는 걸 보고 마를로네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전나무관을 나섰다.

황궁은 언제나 분주했다.

황제의 알현실로 통하는 복도엔 제국 각지는 물론이고 외국에서 온 귀족과 관리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비친 기대감은 예외 없이 탐욕을 머금고 있었다.

“황제 폐하가 남작 시절에 인사를 나눈 적이 있지. 바로 이곳 황궁에서 말이야.”

“듣자 하니 새로운 황제 폐하의 관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더군. 아무 조건 없이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를 복권하고 영지로 돌려보냈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지.”

“나는 폐하에게 작은 은혜를 입힌 일이 있네.”

하나 같이 황제에게 뭔가를 바라는 얼굴.

마를로네는 그 기름기 번들거리는 욕망에 구역질을 느끼며 그들을 지나쳤다.

‘폐하도 큰일이겠네. 매일 이런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니.’

복도 끝 넓은 홀 쪽엔 한 무리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별 흥미는 없지만, 황궁의 후문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거쳐 가야 하는 길이라 홀에 들어섰다.

홀에 들어서자마자 곳곳에서 찬탄이 흘러나왔다.

“오오. 소문대로 정말로 아름다우시고 마음씨도 그야말로 천사 그 자체시군.”

“역시 울피아나 님이야. 단지 보는 것만으로 마음에 평화가 깃들어.”

‘울피아나?’

마를로네도 그 이름을 잘 알고 있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비단 용모뿐만 아니라 깊은 신앙심과 그에 기반한 자애심으로 빈자와 고아들을 돕고 전쟁 노병에게 일자리를 찾아 주는 등 현재 제국에서 가장 평판이 높은 여인이다.

소문에 의하면 선제후의 자제는 물론이고 부르봉과 카스무어, 쟁쟁한 왕국의 왕자 둘에게 동시에 구혼을 받기도 했다고.

‘한번 얼굴이나 보고 갈까.’

호기심이 일었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세간에서 말하는 제국 미녀들은 나보다 다 못한 거 같던데.’

제국 여자가 못생겼다는 이야기는 제국 국경을 벗어나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특히 마를로네가 유년기를 보냈던 부르봉에선 음식과 더불어 주된 음해의 대상이었다.

제국 여자는 그들의 얼굴을 닮은 요리를 만든다.

부르봉인들이 틈만 나면 하는 소리다.

따지고 보면 마를로네의 몸에 흐르는 피의 사 분의 삼은 부르봉 계열이다.

부르봉인의 정체성을 가진 그녀는 자기가 제국 여자보다 낫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고 있었다.

실제로 거울을 봐도 자기가 나아 보이기도 하고.

화장만 하고 좀 꾸미면 내가 그들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과연 제국 제일의 미녀는 어느 정도일까.’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 마를로네는 사람들을 비집고 홀 중앙에 서 있는 주인공을 찾아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곧 한 여인이 그녀의 눈동자를 사로잡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한 눈에도 기품 있는 드레스를 입은 은발의 여인이 웃음기 띤 얼굴로 고아로 이루어진 연주대를 조율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문득 마를로네를 응시했다.

“!”

순간 마를로네는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존재할 줄이야.

그녀가 자주 보던 동네 귀족 영애와는 차원이 다르다.

거울에 비친 나름 한 인물 한다고 생각한 자신의 얼굴조차 어딘가 어긋나고 뒤틀려 보일 정도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이다.

물론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단순한 살가죽이 아닌, 미소를 머금은 채 내면의 아름다움을 마치 빛처럼 뿜어내는 저 오라와 같은 밝음이리라.

자신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찬란함.

바닥없는 낭패감과 더불어 미열을 부르는 기묘한 감정을 머금은 채 그녀는 황궁 밖으로 나가 상점가로 향했다.

“주문하신 크루아상입니다. 딸기도 얹었고 크림도 안에 듬뿍 넣었습죠.”

주인장이 마를로네를 힐끗 쳐다보더니 히죽 웃었다.

“왜 웃어요?”

마를로네가 퉁명스레 묻자 주인장이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얼굴도 예쁜 아가씨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요. 웃어요. 웃는 쪽이 훨씬 예뻐 보이니까.”

“제가 웃으면 남자들이 전부 넘어와서 곤란해요.”

“하하, 재밌는 아가씨네.”

시답잖은 담소지만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근래 희석되긴 했지만 빨간 명찰 없는 삶의 찬란함도 만끽했고.

빨간 명찰을 달고 있었다면 저 인심 넉넉한 주인장의 미소를 볼 일도 없을 것이다.

마를로네는 황궁을 나올 때보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황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황궁 앞에서 마를로네는 갑자기 소름이 돋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틀림없다.

진한 죽음의 냄새가 느껴진다.

근원을 알 수 없고 누구로부터 비롯된 권능인지도 알 수 없지만 도펠죌트너들은 흔히 죽음의 냄새를 맡는 능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건 모든 도펠죌트너가 가진 것이 아니다.

이 능력도 우열의 차이가 있다.

마를로네는 가장 예민한 죽음의 후각을 가지고 있다.

그 깐깐하고 남이 자기보다 잘났다는 걸 절대 인정하지 않는 베르크 란 조차 인정할 정도로 강력한 후각을 말이다.

마를로네가 소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이는 열둘에서 열셋 사이일까.

옷차림만 보면 거리의 아이다.

행색도 더럽고 얼굴도 초췌하다.

건강 상태가 대단히 좋지 않은 건 확실했다.

안타깝게도 행인 중에 사내아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내아이는 이미 여러 번 호된 꼴을 겪었는지 그런 몰골이 되고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려 들지 않았다.

단지 소극적으로 눈치를 살피며 자신을 도와줄 기적 같은 희망을 찾는 게 전부였다.

그 모습은 어린 시절, 빨간 명찰을 달고 다닐 때의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를로네가 사내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얘. 너 거기서 뭐 하니?”

큰 도움은 못 주겠지만 먹을 것과 병원에 갈 돈 정도는 쥐여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내아이의 옷, 자세히 보니 꽤 재질이 좋다.

해지기 전엔 귀족이나 입을 법한 복장이랄까.

사내아이가 마를로네를 흐릿한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화, 황제.”

“뭐?”

“황제 폐하에게 저를 데려가 주세요!”

병세가 완연히 느껴지는 목소리로 소년이 애타게 말했다.

마를로네는 흐릿한 암녹색 눈동자로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소년의 몸에 검은 얼룩이 묻어 있다.

죽은 자의 기운이 맺혀 있다.

하나가 아닌 여럿.

아니, 수백 명분에 달하는 죽음의 얼룩이 소년의 복부에 혐오스러운 모양으로 맺혀 있었다.

* * *

“요청하신 군인들의 목록입니다.”

오토 브라에가 루페르트에게 문서를 내밀었다.

루페르트는 빠르게 문서를 눈으로 훑어 나갔다.

황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놀랄 정도로 잘 정리된 문서군. 그리 많은 시간을 주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의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다니.’

안젤리나의 삼인방 중 하나인 그는 베르너나 요하네스에 비해 색깔이 분명 옅어 보였지만 루페르트는 이 차분하고 온순한 사내가 정보 수집과 행정 처리, 특히 문서 작성에 강점이 있다는 걸 어렵지 발견했다.

다른 둘보다 행정에 보다 치중된 느낌이라고 할까.

루페르트는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문서를 검토했다.

오토 브라에의 목록에 적힌 군인들의 수준은 고만고만했다.

부쿼이-부르봉인. 저지대와 남부 반란에서 경험을 쌓음. 특별한 승전의 기록 없음

파렌하이트-제국인. 저지대, 스베아-야디슈 전쟁에서 경험을 쌓음. 소규모 패전 1회.

곤자가-카스무어인. 저지대에서만 경험을 쌓음. 공성전에서 두 차례 승전 경험 있음.

…….

‘이 정도인가.’

목록을 살피던 중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보인다.

분더발트-제국인. 저지대와 디터팔츠-부르봉 분쟁에서 경험을 쌓음. 장군 경력은 아직 없음.

분더발트. 인연이 있는 이름이다.

‘한번 능력이나 확인해 볼까. 어차피 통찰의 만화경은 쓴다고 해서 닳는 것도 아니니까.’

루페르트는 목록에서 후보를 몇 명으로 추려 자신의 집무실로 데리고 올 것을 명했다.

오토 브라에의 일 처리는 빈틈이 없었다.

루페르트의 대리 장군직에 자원한 후보들에게 최소 일주일 동안 언제든 황제를 볼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을 것을 귀띔해 놓았던 것이다.

루페르트가 수배를 명한 지 2시간도 되지 않아 장군 후보들이 모였다.

어두운 비밀의 방에서 루페르트는 대기실에 앉은 장군 후보들을 불경한 녹색 빛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음.”

오토 브라에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장군 후보 중 딱히 두각을 드러내는 자는 없었다.

등급 C에서 B 정도.

주어진 역할은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 불리하거나 결정적인 싸움에서는 한계를 드러내는 자질이다.

나름 기대했던 분더발트의 등급은 아래와 같았다.

상상력이 빈약한 군인 B

루페르트는 일단 후보들을 돌려보냈다.

실력이 다들 비슷하니 아무나 선택해 군대를 빠르게 조직할 수도 있겠지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된 사람을 좀 더 찾아보고 싶었다.

어차피 회귀를 가정할 때보다 좋은 인재를 찾는 건 향후 루페르트에게 있어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적어도 A급, A급 정도가 딱 좋겠는데 말이야.’

루페르트는 골트문트가 확보했다는 유능한 장군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 임무에 한해 장군을 빌려달라고 해 볼까. 운이 좋으면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를 테니.’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중 오후가 찾아왔다.

석양이 지기 전 황제는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루페르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집무실 뒤편에 은밀한 화원에 앉아 차를 즐겼다.

“…….”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였다.

비단 장군 선택만이 아니라 끝도 이어지는 탄원에, 뭔가를 바라고 온 사람들, 명백히 황제의 소관이 아닌데도 사안에 개입해 줄 걸 원하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회귀 전에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거 같은데 더 힘들고 수고스러운 느낌이 드는 걸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땐 책임감이라는 게 없었던 거 같다.

문서를 읽어 보지도 않고 도장만을 찍어 댔다.

어쩔 수 없었다.

문서를 봐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니.

“폐하. 이상의 문서를 제가 검토한바, 특별히 문제가 있는 사안은 없었습니다.”

골트문트가 붙여 준 디트리히슈타인 주교라는 자가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서명을 하기만 했었다.

그러니 일이 쉬울 수밖에.

하지만 루페르트에겐 지금이 더 좋다.

더 수고롭고 더 힘들다고 해도 한 명의 진정한 황제로 국정을 운영한다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는가.

루페르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식어가는 커피를 마저 들이켜고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화원은 완연한 봄날의 정취를 머금고 있었다.

형형색색 제국 각지는 물론 외국에서 수입한 이국적인 꽃들이 저마다의 향기를 은은히 내뿜으며 눈과 코 모두를 즐겁게 했다.

루페르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럴 때 플루트를 잠시 불어 주고 싶은데 말이야.’

축구와 마찬가지로 플루트는 목동 시절부터 루페르트에게 위안을 주던 취미였다.

지금까지는 눈치를 보느라 멀리했지만, 황제가 된 지금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간간이 남는 시간에 플루트를 연주하며 몸과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생각을 비우고 멍하니 이름 모를 꽃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무렵 시종이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폐하.”

“말하게.”

“마를로네라는 분이 폐하를 뵙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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