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82화 (82/225)

82화 22. 결투 (3)

적의 검이 밀리지 않는다.

밀리는 건 오히려 베르크 란의 검이었다.

‘이 짧은 간극을 두고 연거푸 권능을 쓴다고?’

한 번에 수십 미터를 돌진하는 도약, 견고한 적의 보병 방진을 망치처럼 내리치는 파멸적인 일격 등으로 유명한 도펠죌트너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악마의 병사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으로 군림했지만, 그들의 본질은 엄연한 인간이다.

따라서 그들의 권능은 무한도 무적도 아니고 엄격한 내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도펠죌트너 권능의 발현 형태는 총기나 대포에 비유되지만, 실제 운용하는 모습은 물독에 찬물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일단 권능을 사용하고자 하면 도펠죌트너라는 그릇에 권능이라는 물을 채워야 한다.

사용하고자 하는 권능이 강하면 강할수록 많은 물을 사용하며, 그 물을 다 쓰면 다시 독이 채워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 권능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많은 대기 시간을 요하는 건 당연지사.

그 물독의 크기와 채워지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베르크 란이 최강의 도펠죌트너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독의 크기와 채워지는 양이 다른 도펠죌트너보다 현저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은 가면은 방금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가장 강도 높은 권능을 사용했다.

물독에 채워진 물을 다 썼다는 이야기다.

반면 이쪽은 절반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 상태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 보다 정돈된 자세로 상대방과 맞부딪쳤다.

이 결투의 본질은 힘 대 힘의 대결.

베르크 란의 압승으로 끝나야 하는 것이 그가 아는 세계의 법칙이다.

그런데 은 가면의 검에 실린 힘은 터무니없게도 절반의 힘이 실린 베르크 란의 검격보다 오히려 강했다.

마치 물독이 가득 찬 상태에서 휘두르는 듯한.

베르크 란은 터무니없는 불합리함을 느꼈다.

‘100%의 권능이라고?! 어떻게?!’

충격 속에서도 가혹한 현실은 용서 없이 다가온다.

베르크 란은 상대방이 100%의 권능으로 휘두른 대검을 단지 절반의 권능으로 맞서야 했다.

권능의 부족분은 우월한 자세와 위치로 어느 정도 상쇄했지만, 나머지 부족분은 고스란히 순수한 인간의 육체로 받아 내야 한다.

빠직!

베르크 란이 부릅뜬 눈으로 은 가면을 노려보았다.

인대가 끊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늘어났고 팔 어딘가의 뼈에 금이 갔다.

날카로운 고통도 고통이지만 신체의 완전성을 잃었다는 것이 베르크 란에게 더 아프게 느껴졌다.

‘빌어먹을. 뼈에 금이 갔다. 이래서는 전력을 발휘할 수 없어!’

경악에 잠긴 베르크 란을 향해 은 가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누군지 아직도 못 알아보는가?”

은 가면의 눈구멍 안의 눈동자가 베르크 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그 안의 허무한 눈동자는 그와 비슷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

베르크 란은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상대방의 정체 따위가 아니다.

패배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에겐 수천 배나 더 중요했다.

‘이 베르크 란이, 철혈대제의 챔피언이, 이런 놈에게 패배한다고?’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입을 벌려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쩍 벌린 그의 입 안에선 주변의 모든 사람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한 악취가 풍겨 나왔다.

그의 눈으로도 확실히 보인 것이다.

두 챔피언의 힘의 격차가.

선제후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루페르트의 얼굴을 향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도박에 모든 걸 건 젊은 군주의 얼굴이 궁금했던 것이다.

몇몇 선제후의 기대와는 달리 루페르트의 얼굴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음.”

루페르트는 단지 고민할 뿐이다.

가슴 위에 찬 소라고둥을 어루만지며.

‘회귀를 해야 하나.’

아니, 회귀를 해야만 할 것 같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선제의 챔피언은 저 은 가면의 상대가 안 되는 것으로 보이니.

챙캉!

격돌이 길어질수록 그 사실은 명확해졌다.

베르크 란은 방금 접전에서 팔에 부상을 입었고, 그 부상은 마치 닻줄처럼 베르크 란을 아래로 잡아당기며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냈다.

제국의 노병답게 베르크 란은 열세인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버티고 있지만, 상대방이 너무 건재하다.

은 가면은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베르크 란을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코너로 몰아세웠다.

무엇보다 강한 패배의 증거는 관중석에서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

마를로네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러 댄 것이다.

누구보다 베르크 란을 잘 아는 마를로네마저 조부를 걱정하고 나섰다.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끌렀다.

‘아무래도 이 결투는 나의 패배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굳이 결투의 끝을 볼 필요는 없으리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 베르크 란이라는 사내가 타인의 칼날에 죽는 장면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아울러 그의 시체 옆에서 울부짖을 마를로네의 모습 또한.

그들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지만, 루페르트는 그들이 처음 봤을 때처럼 비천하지만 누구보다 강한 이미지 속에 남기를 원했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한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건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게 인간의 욕심이니까.

모처럼 루페르트의 입에 소라고둥의 끝이 닿았다.

[ 루페르트 가우저. ]

갑자기 여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신님?’

느닷없이 여신이 말을 걸었다.

이제는 루페르트도 알고 있다.

그의 여신은 허투루 말을 거는 법이 없다는 것을.

[ 조금만 더 지켜보아요. 루페르트 가우저. 저 인간이 결투에서 밀리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제가 본 그의 운명의 실타래에 의하면 그는 이런 곳에서 죽을 운명이 아니랍니다. ]

“그렇습니까…….”

루페르트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좁은 결투장을 그늘이 진 눈으로 응시했다.

은 가면이 공세를 가하고 있다.

하나의 검격 마다 대포의 포성 같은 파공음을 동반하는.

베르크 란은 막기에 급급했지만, 그의 팔도 다리도 자세도 무자비한 포격에 깎여 나가는 보병 방진처럼 마멸되고 있었다.

“커억!”

베르크 란이 피를 토해 내는 가운데 또 다른 일격이 그를 두드렸다.

베르크 란이 대검을 세워 막아 보지만, 그 결과는.

푹-

왼쪽 팔뼈가 부러지며 옷을 뚫고 나왔다.

대검을 쥔 왼손의 힘이 풀리며 위태롭게 대롱거렸다.

그걸 본 귀부인과 여성들은 부채나 손으로 눈을 가렸다.

“저런.”

군주들, 특히 참석한 선제후들의 시선이 결투장 대신 루페르트를 향한다.

그들의 표정과 자세는 제각각이나 시선에 실린 의미는 하나였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루페르트 가우저.

이 결투에서 지면 선제후직은 물론이고 황제직마저 잃게 된다.

위버하임 남작 자리와 리히트보덴 총독 자리가 남겠지만, 위버하임 남작은 아직 회수되지 않은 작위에 불과하며 리히트보덴의 총독이라는 건 실제 법적인 자격이나 권한을 부여받은 적이 없는 칭호 같은 것이다.

루페르트가 평범한 자로 전락하게 된다는 소리다.

총독 소리를 들을 정도로 리히트보덴을 꽉 잡고 있으니 돈이야 여전히 많겠지만, 제국은 부유하다는 것만으로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다.

그가 목숨을 다해 개척한 식민지는 더 강하고 권세 높은 군주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고 그가 모은 알량한 재산은 그보다 못한 귀족들의 폭압 속에서 송두리째 뺏길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목숨은 천수를 다하지 못할 것이다.

암살이건, 모살이건, 형장의 이슬이건 어떤 형태로든 저 젊은이는 늙은이가 되기 전에 죽을 것이다.

“…….”

군주들의 시선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들을 의문에 몰아넣은 건 다름 아닌 루페르트의 태연한 표정이다.

예정된 파국을 앞두고도 그에겐 일말의 동요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엄청난 강심장인 건지, 타고난 도박꾼인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처구니없는 백치인 건지.”

선제후 레벤호스트가 양옆에 앉은 아내와 아들을 향해 읊조리듯 말했다.

그의 시선은 결투장으로 향했다.

베르크 란의 패배는 명확하다.

두 팔로도 막지 못했던 은 가면의 파멸적인 공세를 이제는 한 팔만으로 막아야 한다.

도망칠 곳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물러서면 지는 전장이며, 오직 팔 하나만으로 가망 없는 대적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

루페르트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여신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싸움의 끝을 지켜보라고.’

부러지고 인대가 끊긴 채 간신히 근육 몇 가닥과 피부에 의지해 덜렁거리는 팔이 눈에 밟힌다.

간신히 지지한 떨리는 두 다리와 지금 이 순간에도 연신 피를 토해 내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또한 시선을 잡아끈다.

과연 저 상태에서 어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루페르트 또한 베르크 란의 승리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하지만 저 지경이 되고도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가열하게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니, 하나의 미래는 확실하게 점칠 수 있었다.

저 사내, 베르크 란은 여기서 죽을지언정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야말로 빈사의 사자군.’

은 가면이 검을 휘둘렀다.

챙캉!

베르크 란이 한 팔만으로 대검을 휘두르며 검격을 막아 냈으나, 그의 몸은 형편없이 뒤로 밀려나 간신히 장외를 가리키는 실선 앞에 멈췄다.

뒷발이 선을 살짝 밟았기에 은 가면 혹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장외 패를 주장할 여지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들의 무시는 그러나 곧 군중 속에서 울려 퍼진 간절한 외침에 의해 도전받았다.

“선을 밟았어! 장외야! 장외!”

마를로네가 고함을 쳤다.

이미 그녀 앞에 주의를 주기 위해 기병 하나가 채찍을 들고 지키고 서 있었지만, 그녀에게 그딴 건 안중에도 없었다.

“선을 밟았다고! 졌어! 슈발츠마인 쪽 챔피언이 패배했다고! 심판은 뭐 하는 거야?! 어!”

기병이 채찍을 휘둘렀다.

철썩!

아홉 가닥으로 갈라진 채찍은 그녀의 어깨를 강타하며 옷을 찢어 놓고, 어깨와 목에 피멍을 만들어 놓았다.

마를로네는 이를 악물었지만, 신음은 내지 않았다.

단지 부릅뜬 눈으로 죽어 가는 그의 조부만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할아버지!’

이대로는 죽는다.

그녀도 알고 있다.

자신의 조부가 항복을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는걸.

아울러 자신에게 이 싸움을 말릴 힘이 없다는걸.

도움이 필요하다.

그녀의 시선은 가장 익숙한 한 사내에게 고정됐다.

‘루페르트 가우저.’

그녀가 경계선을 넘었다.

기병이 채찍을 들어 올리지만, 마를로네는 탄환처럼 도약해 그를 지나쳤다.

“도펠죌트너다!”

“도펠죌트너가 난입했다!”

“암살자인가?!”

병사들이 날카롭게 고함을 지르고 깜짝 놀란 군주들과 귀족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마다의 호위가 있는 선제후급들 앞엔 대동한 호위병들이 선제후를 막아서며 철통같은 경계를 펼쳤다.

결투 이상으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마를로네는 결투 당사자 한 명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부탁이에요. 룸왕 전하.”

뒤에서 병사들이 살기를 머금고 달려오고 있다.

루페르트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할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무릎을 꿇은 채 마를로네가 말했다.

뒤편에서 포성을 연성케 하는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뒤로 돌리며 조부의 안위를 확인했다.

조부가 아직 무사함을 안 그녀는 루페르트에게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제발 부탁드려요!”

장교들이 다가와 루페르트의 얼굴을 보았다.

루페르트는 병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냥 놔두라는 손짓을 한 후 결투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베르크 란은 한계에 몰렸다.

어떤 역전의 희망도 기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은 가면이 숨을 고르며 사형집행인처럼 대검을 높이 들어 올리지만, 그에겐 반격할 힘도 기운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사냥당해 죽어 가는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운명이 다가오는 걸 지켜볼 뿐이다.

군중들 속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가 바뀔 거라는 소리가 불온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러하다.

루페르트는 결투에서 패배했다.

“전하. 지금이라도 결투를 멈춰 주세요.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요!”

루페르트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애원하는 마를로네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여신님이 견디라고 명하셨다.’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수천 번이나 견디고 또 견뎌 왔다.

하지만 여신은 그에게 거듭된 인내를 주문했다.

“부탁이에요. 제가 전하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줬잖아요? 할아버지도 전하의 목숨을 구해 줬고요.”

“…….”

자꾸만 손이 소라고둥에 간다.

이 상황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 이 질척거림을 무로 돌리고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고 싶은 욕망이 황제의 뇌리를 잠식해 갔다.

지친 눈동자에 죽어 가는 베르크 란의 모습이 들어온다.

회귀, 그것 말고는 답이 없어 보인다.

떨리는 손이 소라고둥의 표면에 닿았고 그것을 움켜쥐었다.

소라고둥을 쥐면서 루페르트는 여신의 꾸짖음을 내심 기대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욕망을 이겨 낼 수 없을 거 같았으니.

그러나 소라고둥을 쥐었음에도 여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전하.”

마를로네가 고개를 숙였다.

모자가 벗겨지고 감추고 있던 금발이 차가운 돌바닥에 드리워졌다.

무질서하게 널린 머리카락과 그 가닥의 끝자락이 루페르트의 발치에 닿았다.

“전하…….”

마를로네가 애원했다.

“뭐든지 할게요. 뭐든지…….”

갈등에 시달리던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

마를로네의 한마디가 잊고 있던 기억의 편린을 끄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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