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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83화 (83/225)

83화 22. 결투 (4)

‘뭐든지 하겠다라…….’

루페르트도 그랬다.

불타는 황궁에서 죽어 가면서 미지의 존재에게 애원했다.

뭐든지 하겠다고.

대상은 중요하지 않았다.

신이든 악마든.

그때 그에게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여신 리프니에다.

그녀의 부드러운 가호와 빛나는 문자가 포근하게 루페르트의 마음을 감쌌다.

루페르트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며 턱을 들었다.

‘여신님이 인내하라 명했다.’

루페르트는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사도이다.

루돌프라는 또 다른 사도가 있다고 하나 그는 자리에 없고 그 신앙마저 희미해 보인다.

무엇보다 루페르트는 현재 여신의 소라고둥을 가진 자다.

그가 아니면 누가 여신의 명을 따르겠는가.

그녀가 말했다.

베르크 란은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니 기다리라고.

그렇다면 따르리라.

눈앞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끔찍하더라도.

똑바로 바라보며 현실에 맞서리라.

“마리.”

루페르트가 엎드린 마를로네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마를로네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루페르트의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그것은 광신도 만용도 아닌 신성한 확신에 가득 찬 믿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믿고 기다려라.”

평소의 성격이라면 헛소리라고 되받아쳤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마치 이 세상의 섭리로부터 초탈한 것 같은 저 얼굴엔 마술적인 설득력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지켜보아라. 네 조부의 꺾이지 않는 투지를.”

루페르트는 패배를 앞둔 챔피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한 치의 흔들림도 의심도 두려움도 없는 맑고 올곧은 태도로 그는 베르크 란을 바라보았다.

“!”

마를로네의 동공이 수축됐다.

마치 긴 꿈을 꾼 것 같은 감각이 그녀의 의식을 멍하게 했고 조부에 대한 걱정을 한순간이나마 지워 버렸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방금?’

그녀만이 아니다.

루페르트에게 특별함을 느낀 건.

함께 배석한 선제후들은 저마다 믿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루페르트의 의연함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 친구. 마음이 무쇠로 이루어진 건가?”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건, 시늉이 아니군.”

선제후 하나가 혀를 찼다.

“……아까운 황제를 잃게 됐군.”

아카이아 대주교 또한 루페르트의 흔들림 없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리타분한 늙은이답게 그의 시선은 우선 시시콜콜한 부분에 머물렀다.

그는 마를로네를 보았다.

“룸왕이 도펠죌트너와 친하게 지낸다더니 사실이었군. 일개 도펠죌트너가 저렇게 허물없이 행동하다니. 거기다 계집이라.”

아카이아 대주교는 한숨을 내쉬며 결투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카이아 대주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거기다 베르크 란이 패배할 줄이야. 황제가 바뀌겠군. 하지만, 그건 좋지 않아.’

이미 많은 치적과 업적을 이루었고 이제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지만, 아카이아 대주교는 여전히 젊은 시절의 욕망을 기억하고 실천하고자 한다.

그의 소망은 단순하고도 어려웠다.

위대해지는 것.

역사에 길길이 남고 그 이름이 후대에 칭송되는 위인이 되는 것이다.

그가 현재까지 쌓은 치적은 성직 선제후로서는 대단한 업적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위인급이냐고 묻는다면 다소 부족함이 있다.

대주교는 그 부족함을 메꾸기 위한 거대한 대업을 일찍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문서로부터 비롯됐다.

* * *

그 문서의 이름은 빙해 사본이었다.

그것은 노예제의 시대, 그러니까 약 천 년 전 빙해 앞, 노르드마르크 지방의 동굴에서 우연히 발견된 호라교의 경전이다.

학자들은 그것이 원시 호라 신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룸 제국의 역사보다 오래됐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룸 제국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진정한 호라 신앙.

그것은 아카이아 대주교를 포함한 호라 교단의 성직자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진실한 복음이다.

다만 태고의 경전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문자로 적혀 있어 해석에 난항을 겪었으나 십수 년간 문자 몇 개가 해독됨으로서 급속한 진보를 거듭했고 최근에는 몇 개 항을 해석하는데 이르렀다.

겨우 몇 마디 문장에 불과하지만, 해석된 내용은 현재까지 알려진 상식과 호라교 전체를 뒤흔들고도 남을 정도로 심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진실한 복음에 의한 호라 교단의 개혁.

그것은 아카이아 대주교를 그가 그토록 되기를 원했던 거인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황제가 바뀌는 건 곤란해. 간신히 찾은 신자에 뼈대가 있는 녀석이다. 카를 호이징거 같은 꼭두각시가 황제가 된다면 내 계획은 시작조차 할 수 없어. 거기다 내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전례 없는 유혹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투를 무위로 돌리는 게 좋을까?’

구실이야 만들면 된다.

당장 저 은 가면만 해도 수상쩍어 보인다.

잘은 모르지만, 그에게선 부정한 기운이 느껴졌다.

물론 중요한 건 선제후들의 지지다.

대견하게도 루페르트 가우저는 모든 걸 잃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철혈대제의 혈족다운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건 상당한 이점이 될 것이다.

선제후들은 강한 황제가 등장하는 걸 두려워하지만 다들 마음 한구석엔 진정으로 뛰어난 황제에게 지배받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욕망 또한 품고 있으니.

솔직하게 말해서 쇠락하는 제국의 선제후보다 우월한 제국의 선제후가 훨씬 낫지 않은가.

‘어떻게 할까.’

아카이아 대주교가 수많은 셈법을 머리에 굴리며 이제 최후로 치닫는 결투를 지켜보고 있을 때 한 사내는 절망 속에서 천천히 그만이 아는 길을 되새기며 최후의 반격을 모색한다.

“…….”

베르크 란.

그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

비록 팔이 부러지고 온몸에 금이 가고 숨을 쉴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그의 투지는 올곧은 눈동자 안에 살아 있었다.

은 가면은 그런 베르크 란을 꼿꼿이 허리를 세운 상태에서 노려본다.

젊은 시절 부르봉 왕국과의 전쟁이 불현듯 노병의 눈앞에 떠올랐다.

외국에도 도펠죌트너와 같은 이능의 힘을 가진 병사가 존재한다.

부르봉 왕국이 자랑하는 괴물 기병 장다름도 그중 하나.

엄밀하게 말해서 장다름은 도펠죌트너보다 강하다.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도펠죌트너와 달리 그들은 태생부터가 귀족이고 최상의 훈련을 받았고, 자신과 그들의 군마를 같이 그들 고유의 힘으로 강화했다.

그야말로 최강의 충격 기병이라고 할까.

전장에서 용도는 사뭇 다르지만, 그 장다름과 일대일로 싸울 기회가 있었다.

보통 군마보다 1.5배는 큰 괴물 말 위에 갖가지 화려한 상감과 무늬를 새긴 번쩍이는 갑주를 입은 기병이 오만하게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젊은 베르크 란의 팔은 지금처럼 부러졌고, 숨은 찰 때로 찼으며 귀 하나가 들리지 않았다.

기사가 고압적인 부르봉어로 조롱했다.

“쓰레기 같은 제국에 어울리는 쓰레기 같은 병사군.”

이에 베르크 란 또한 부르봉어로 답했다.

“나의 나라를 욕하지 마라.”

기사의 투구 속에서 비음이 새어 나왔다.

“부르봉인인가?”

베르크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교도?”

베르크 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사가 코웃음을 쳤다.

“도망간 평민인가.”

장다름이 그들의 상징과도 같은 길이 7미터에 달하는 육중한 랜스를 꼿꼿이 세웠다.

끝내겠다는 소리다.

“악마의 은총을 얻었다고 너의 옛 주인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 전투에선 이긴 거 같은데?”

베르크 란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대로다.

적의 우익 기병대가 패퇴하고 보병 연대로 이루어진 중군조차 무너지고 있다.

적의 장군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그 깃발이 슬금슬금 물러날 채비를 하고 있다.

“그 더러운 아가리 안에 랜스를 넣어 주마.”

장다름이 박차를 찼다.

육중한 괴물 말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지축을 울리며 다가온다.

빈사의 베르크 란은 조용히 다가오는 적을 차갑게 식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리며.

“…….”

꿈인가 현실인가.

베르크 란의 시야에 환상과 시야가 겹치기 시작했다.

울대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치는 관중 대신 교차하는 수천 개의 검과 창이 보였고, 응원과 조롱의 외침 대신 격노의 색채를 띤 전장의 외침과 비명이 들렸다.

전쟁이다.

전쟁이 베르크 란과 그 주변을 숙명처럼 감싸고 있다.

평온과는 가장 거리가 속성 한가운데서 베르크 란은 더할 나위 없는 편안함을 느끼고 허리를 폈다.

덜렁거리는 왼팔을 놔둔 채 오른손만으로 대검을 들어 올렸다.

적이 보인다.

그가 죽여야 할 적이.

그는 분명 같은 도펠죌트너지만 베르크 란의 시야에 겹쳐진 그의 모습은 그를 죽일 뻔했던 장다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

은 가면의 눈동자에 의문부호가 떠올랐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최후의 사형 집행을 준비했다.

대검이 위로 올라갔고 처형인의 칼날처럼 번개처럼 내리쳤다.

여전히 환상 속에 있던 베르크 란은 하나의 장면을 떠올렸다.

휘날리는 군기, 열과 오를 짜고 질서정연하게 서 있던 도펠죌트너들, 작지만 잘 정돈된 연병장, 낮은 단상과 번쩍이는 군복, 그 단상 위에 올라 서 있던 중년의 자신.

‘……내 삶은 잘못되지 않았다.’

순간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늘 머물러 있던 이글거리는 불꽃이 지워졌다.

불꽃을 걷어 내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

전쟁과 기사와 적과 그리고 그가 베어야 할 단 하나의 선을.

부웅-

한 손으로 휘두른 검이 적에게 나아간다.

수천 개의 검과 창, 하늘을 가득 메울 분노의 색채를 담은 외침.

즉, 전쟁 그 자체를 담고서.

“!!”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던 은 가면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건!’

맞설 수 없다.

맞서서도 안 된다.

전쟁이라는 파멸의 소용돌이는 피해야 하는 것이지, 맞서 싸울 성질의 것이 아니니.

가면의 눈구멍 너머, 은 가면은 경악한 눈으로 그에게 검을 휘두르는 사내의 얼굴을 응시했다.

‘역시, 전쟁의 신 미르미도스의 총애를 받는 자인가. 하필 이럴 때.’

쿵!

은 가면이 또 한 번의 강렬한 발 구름으로 지축을 울렸다.

전력을 다해 공격하던 은 가면의 몸이 뒤로 쏠렸다.

전쟁을 머금은 검이 허공을 갈랐다.

칼날은 은 가면의 몸에 닿지 않았다.

무익한 휘두름으로 보였다.

그러나.

“창을 밟았어요!”

마를로네가 손가락으로 은 가면의 발뒤축을 가리켰다.

은 가면이 재빨리 창을 밟은 발을 교묘하게 앞으로 밀어 보지만, 인간의 눈은 의외로 빠르고 속이기가 어렵다.

“이번엔 확실히 창을 밟았다고요! 장외야! 장외!”

마를로네가 숨 가쁘게 소리쳤다.

심판이 손을 들었다.

선제후나 권력자의 눈치를 볼 것도 없었다.

은 가면이 비열하게 옮겨 놓은 왼발 뒤의 창은 지금도 달그락거리며 떨리고 있었으니.

“결투 종료!”

승부가 났다.

베르크 란의 승리다.

만신창이가 되고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지만, 모든 걸 건 공격으로 적을 몰아세웠고 장외로 내몰았다.

모든 걸 쏟아부은 베르크 란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지!”

늘 연막을 피우던 마를로네의 얼굴에 선명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루페르트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며 소라고둥을 만지작거렸다.

기다림은 보상받았다.

그런데.

“…….”

은 가면이 검을 들었다.

이미 패배 선언이 울렸는데도 그는 싸움을 그만둘 기미가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심판의 외침 속에서 은 가면은 대검을 들고 베르크 란을 향해 달려갔다.

숨통을 끊을 기세다.

모든 이가 베르크 란의 죽음을 예상할 때 느닷없이 발랄한 소녀의 노래가 들려왔다.

죽은 신이여, 제단 없는 신들을 맞으소서.

때가 되면 한 분이 그대들과 세계를 지킬 것이니.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두가 같은 노래를 들었고 같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베르크 란도 은 가면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결투자 또한 이지를 넘어선 기이한 소리에 이끌려 약속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위에서 다음 소절이 울려 퍼졌다.

죽은 신은 진정한 이름을 찾게 되리라.

진정한 신이 친히 그대들의 의식을 지휘하시리라.

노래가 끝난 후 맨발이 결투장의 바닥을 밟았다.

또각.

돌과 돌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하지만 아무도 그 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광휘에 찬 소녀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하나의 여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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