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22. 결투 (2)
고트프리트 브레이머 폰 클라인하르트.
아카이아 대주교로 알려진 68세의 노인의 지금 심정은 귀찮음과 불편함, 그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체 뭘 하는 건지. 선제후끼리.’
선제 클라우데 2세가 제국을 안정시키고 막대한 부와 평화, 상업의 번영을 가져다 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별명대로 철과 피로 이루어 낸 과실이다.
철은 쉽게 부식되고 피는 쉽게 씻긴다.
클라우데 2세가 죽은 지 7년이 다 되어 가는 현재 제국의 우위는 지속되고 있으나, 아카이아 대주교는 알고 있다.
힘으로 억누른 평화가 깨지는 순간, 그때까지 응축된 부정적인 기류가 제국 전체를 휩쓸어 버릴 수도 있다고.
클라우데 2세가 즉위했을 때 상황도 비슷했다.
선제 막시밀리안 3세. 이른바 천둥제라 불리던 강력한 황제가 강력한 군사력과 무자비한 통치로 제국 내외의 갈등을 힘으로 억누르고 있었으나 그가 죽으며 황제 선출이 미루어지는 가운데 갈등이 터졌고, 내전과 국가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다.
오랜 기간 제국은 타국을 압도했으나 최근 들어 외국의 성장세가 만만치 않다.
특히 다섯 왕관이라 불리는 다섯 개의 강대국은 요주의 대상이다.
이들은 호시탐탐 제국이 약해지기만을 기다리며 혹은 제국으로부터 갖은 이익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위기는 제국 바깥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제국 내부에도 종교 갈등을 비롯한 해묵은 문제가 산재해 있다.
선제가 억지로 봉인한 신교와 구교의 갈등은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으며 제국의 교외와 외진 곳에서는 발칙하게도 악마 숭배와 마녀 집회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선제후끼리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국에 선제후끼리 애들같이 결투니 뭐니 하는 장난질로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고 있으니 아카이아 대주교 눈에 좋게 비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루페르트 가우저. 그나마 신앙심이 있는 친구라고 생각해서 뽑아 줬더니 영 실망이군. 이런 하찮은 놀음에 모든 것을 걸 정도로 가벼운 자라니. 이래서는 빙해 사본에 의한 교리 수정도 맡기기 어렵겠는데.’
결투 자체에 회의를 가진 아카이아 대주교지만 그는 루페르트가 결투에서 이기길 바랐다.
그가 이겨야 빠르게 황제가 확정되고 제국이 움직일 수 있으니까.
루페르트가 패배해서 모든 걸 내려놓고 은퇴한다면 황제 후보부터 시작해 황제 선출을 다시 해야 한다.
또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모르는 긴 시간을 허송세월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카이아 대주교의 주름진 눈동자는 곰 가죽을 뒤집어쓴 건장한 사내를 향했다.
“저 친구, 룸왕의 챔피언은 어떤 사람인가?”
이에 정수리 부분을 깨끗이 면도한 수사가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답했다.
“도펠죌트너입니다.”
“그래? 상대방은?”
“마찬가지로 도펠죌트너라고 합니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코웃음을 쳤다.
“선제의 반짝이던 장난감 병정들이 이제는 구걸도 모자라 노예 검투사 역까지 자처하는군.”
“지체 높은 마법사들이 이런 자리에 나올 리가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겠지. 그나저나.”
아카이아 대주교가 곰 가죽을 쓴 사내를 유심히 관찰했다.
어딘가 눈에 익다.
저 크고 단단하며 위협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주는 체구가.
“저 친구 이름이 뭐지?”
“베르크 란이라고 하더군요.”
“베르크 란? 아.”
아카이아 대주교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걸렸다.
수사가 대주교의 미소를 발견하고 물었다.
“뭔가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룸왕 전하 말이야. 상당한 수완가구만.”
“룸왕 전하가요?”
“그래. 그는 이미 현재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어. 그러니 저런 무모한 판돈을 거는 게 가능한 거지.”
“그 베르크 란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지요?”
“선제의 챔피언이었지.”
아카이아 대주교는 등받이에 등을 편하게 기대며 맥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이단 심문청에 연락해 두게. 조만간 거물을 조사할 수도 있으니 이에 대비해 두라고.”
“누, 누굴 조사하시겠다는 겁니까? 설마 선제후?”
“지는 쪽이겠지.”
아카이아 대주교가 사후 처리에 관해 부하에게 지시하고 있는 동안 루페르트는 저 멀리 서 있는 등이 굽은 사내를 꿰뚫어 버릴 것 같은 강렬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그는 루페르트보다 앞선 시대부터 군주의 운명을 탄 고귀한 인물이다.
제국 내의 서열도 루페르트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았다.
게다가 회귀 전에도 그는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는 조용히 살다 조용히 죽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루페르트에게 감히 도전했다.
루페르트에 대한 도전은 곧 제국에 대한 도전이다.
‘누구도 제국을 파괴할 순 없다.’
죽음 직전에 루페르트가 원했던 간절한 소망.
그것은 오직 제국의 수호다.
루페르트가 선제후를 향해 말했다.
“내가 이긴다면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후임자를 내가 결정하겠다.”
둘 다 자신의 직을 걸었지만, 그 무게는 루페르트 쪽이 훨씬 무겁다.
그러므로 루페르트는 더 요구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입 안에서 썩어 가는 선창의 악취를 풍기며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루페르트는 자신의 챔피언에게 다가갔다.
“이길 수 있겠습니까?”
베르크 란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쥔 대검의 무게가 적당하다.
사방에 운집한 수만 명의 함성과 시선도 적당하다.
비록 가슴에 달린 붉은 능직으로 만든 명찰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 위에 덮어쓴 곰의 가죽이 명찰의 일부를 가려 주었다.
“할아버지!”
민중이 모인 남쪽 관전 구역에 모자를 푹 눌러쓴 그의 손녀가 사람들을 비집고 나타나더니 두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무조건 이겨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억지로 꾸민 앳된 사내아이의 목소리 대신 그녀는 살짝 낮은 톤의 여성의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람들이 그녀와 그녀의 붉은 명찰을 쳐다보고 인상을 찌푸리거나 수군거리지만 그들의 반응 따윈 마를로네에겐 안중에도 없었다.
“저 사람, 얼마나 못생겼으면 늘 가면으로 가리고 다닐까?”
빈정거려 보지만 걱정이 앞선다.
온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얼룩.
자부아에서 만났던 염소 가면이다.
그녀가 양손을 입을 모아 가면 남자를 향해 힘차게 야유했다.
“그 가면 벗어 보라고! 왜 못 벗어? 나병이라도 걸렸어?”
은 가면은 아주 짧은 시간 소리가 들리는 방향에 주의를 기울였다.
“…….”
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의 신경은 오직 곧 벌어질 결투에 집중됐다.
“어이. 거기! 빨간 명찰! 조용히 해라!”
병사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그녀 앞에 나타나 주의를 주는 걸 보며 베르크 란은 아주 잠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도 눈치챈 모양이구나. 하긴 죽음의 냄새를 맡는 데 너만큼 특출난 녀석도 또 없으니. 허나, 마리. 내가, 이 베르크 란이 패배할 일은 없을 것이다.’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곧 결투가 시작되리라.
은 가면이 바닥에 깔린 고대와 현재의 무기 중 하나를 골랐다.
그 또한 대검을 선택했다.
군중들이 웅성거렸다.
“일대일의 대결이라면 카스무어인의 짧은 검과 버클러가 낫지 않나?”
“부르봉인의 레이피어가 차라리 나을 거 같은데.”
“룸인의 그물과 삼지창도 있구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병사들의 고대의 법도에 따라 광장 위에 네 자루의 창을 정사각형 형태로 놓았다.
각 창의 길이는 4m가량.
각 변이 4m밖에 되지 않는 좁디좁은 정사각형 안에서 제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맨주먹으로 싸워도 충분히 좁은 투기장에 무기를 들고 싸운다는 건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후퇴 불가. 조금만 물러나도 장외 패라는 소리다.
폭발적인 도약력을 가진 도펠죌트너의 특기 하나가 막히는 셈이지만 저쪽도 사정은 같다.
그야말로 힘 대 힘의 대결.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싸움에 얼마만큼의 기술을 섞느냐에 따라 승부의 방향이 결정될 것이다.
긴 리치와 강한 힘을 동시에 실을 수 있는 대검은 이 결투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다.
북소리가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베르크 란과 은 가면이 마주 섰다.
상대방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
베르크 란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가면을 바꿨군?”
은 가면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베르크 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정자세로 먼 곳을 쳐다보고 있다.
완벽한 무시에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렁거렸다.
“이번은 전과 다를 것이다.”
심판을 맡은 제국 장교가 결투장 밖에서 낭랑하게 소리쳤다.
“두 결투자는 서로의 무기를 맞대시오.”
두 전사가 대검을 맞댔다.
북소리가 그쳤다.
동시에 그토록 웅성거리던 관중들도 말을 멈추고 결투자들을 바라보았다.
긴장감이 결투장에 감돌았다.
자신이 싸우는 것이 아님에도 관중들은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역사에 남을 승부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살얼음 같은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두 검사 너머 오만하게 앉은 선제후를 노려보았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단순히 꾸며 냈다기엔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미소와 행동이 그의 심리를 반영해 주는 듯했다.
루페르트는 의아함을 느꼈다.
‘설마 저 사람은 자기가 이 싸움에서 이길 거라고 생각하나.’
기묘할 정도의 자신감이다.
제아무리 자신의 챔피언에 자신이 있다고 하지만 이 싸움엔 걸린 것이 너무나 많다.
당장 자식의 모든 직을 잃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의 가문이 응당 결정해야 할 후임자의 인선마저 루페르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선제후직만 아니라 가문마저 파괴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내 챔피언이 누군지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루페르트는 은 가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틀림없다.
가면을 바꿨지만 루페르트를 추격했던 염소 가면이다.
‘저자가 베르크 란과 호각으로 싸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는 베르크 란도 어느 정도 방심했을 것이다. 이번 결투의 결과는 전과는 다를지도 모르지.’
장교가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시작하시오!”
그의 외침에 채 끝나기도 전에 대검과 대검이 격돌했다.
챙캉!
무시무시한 힘이 실린, 최고의 명공들이 만든 대검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두 대검이 부딪치자 번개가 친 것 같은 번쩍임이 일었고, 군중의 함성마저 묻어 버릴 정도의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한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귀를 부여잡았다.
“아악!”
고막이 터졌다.
격돌이 일으킨 파동만으로 일어난 일이다.
그야말로 인간을 초월한 힘과 힘의 대치.
4개의 창으로 만든 좁은 결투장에서 가장 우선되는 가치는 힘.
둘의 힘은 대등해 보였다.
몇 번이고 맞부딪치고, 힘을 겨루고, 다시 떨어져 격돌한다.
어느 쪽도 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용호상박.
비천한 군중은 물론이고 지체 높은 군주들마저도 숨을 죽이고 두 전사의 숨 막히는 경합을 지켜보았다.
‘역시. 저 가면을 쓴 남자. 결코 만만하지 않군. 그의 실력은 베르크 란과 거의 호각이다.’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만지작거리며 은 가면을 쓴 도펠죌트너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대체 저 사내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디서 저런 힘을 얻은 거지? 베르크 란의 동료인가. 동료라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는데.’
루페르트가 가면남의 정체를 놓고 고민하는 동안 변화의 조짐이 일어났다.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도 무방하겠지.’
베르크 란은 허투루 나이를 먹은 게 아니다.
그의 강함은 노쇠함으로 상쇄되긴 했지만, 노련함으로 보충됐다.
그는 무수히 많은 전장에서 무수히 많은 유형의 적을 상대했다.
최고의 전사인 그는 특히 적에서도 가장 강력한 병종을 도맡았다.
부르봉 왕국의 장다름, 저지대 연방의 로이테르, 동방 제국의 시파히부터 스베아 왕국의 카롤리너까지.
저마다 타국이 자랑하는 무적의 병종들.
이중 베르크 란이 죽여 보지 않은 병종은 없다.
도펠죌트너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숫자로 치면 가장 많이 죽였을 것이다.
도펠죌트너 반란 초반기만 해도 베르크 란은 몸소 배신자들을 베어 넘기고 다녔으니.
도펠죌트너의 주 무기는 자신의 키만 한 대검이다.
대검을 이용한 승부에서 베르크 란이 패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여러 번 승리를 안겨다 주었던 기만책을 사용하려 한다.
챙캉!
또 한 번의 격돌.
베르크 란은 힘에 부치는 척하며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자연스레 상대방의 무게중심이 앞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진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기세를 올리는 모양.
다음 순간 베르크 란은 칼날을 뒤집었다.
그리하여 적의 칼날이 더 앞으로 쏠릴 수 있도록.
물론 이미 그의 몸은 적의 칼날을 피해 필요 최소한도로 물 흐르듯이 움직인 이후다.
은 가면의 검과 몸이 동시에 앞으로 쓸렸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전력을 다하던 몸이 저절로 앞으로 딸려 온 것이다.
측면이 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선제의 챔피언답군.’
어쩌면 이번엔 회귀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음 순간,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결투장 바로 아래에서 터져 나왔다.
쿵!
은 가면이 강하게 발을 굴렀다.
바닥의 창들이 들썩일 정도의 강렬한 힘으로.
동시에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대각선으로 솟아오르는 반격의 칼날이 날아왔다.
날아오는 대검을 보며 베르크 란은 승리를 확신했다.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이런 반격을 해내다니 보통 기량은 넘는군. 하지만 그런 공격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이미 측면이 열린 상태에서 무리하게 움직임을 멈추며 반격을 가했다.
필연적으로 자세가 무너졌고, 대검을 쥔 손 또한 하나다.
무엇보다 베르크 란이 승리를 확신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베르크 란은 내면에 약동하고 있는 어둡고 축축한 힘을 조용히 느꼈다.
도펠죌트너의 권능.
그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온 것인지 알려 준 사람은 누구도 없다.
그를 도펠죌트너로 만들었던 사람마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그 힘을 고대의 힘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로 얼버무렸을 뿐이다.
그 고대의 권능은 절반 정도 찼다.
반면, 은 가면은 방금 발을 구를 때 권능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것도 대단히 많은 양을.
결투장 전체가 울릴 정도의 괴력을 발휘해서 무너진 자세를 그나마 바로잡았으니까.
반면 이쪽은 자세도 안정됐고 권능 또한 비축했다.
다음 한 번의 격돌로 이 승부는 끝이 나리라.
상대방의 팔이 풀어지거나, 꺾이는 걸 기대하며 베르크 란은 검을 격돌했다.
챙캉!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다음 순간.
“……!!”
베르크 란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경악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