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21. 죄악 (2)
낙조가 드리운 제도의 밤은 고요하다기보다는 조용하다.
돌아가는 수레바퀴 소리와 말발굽, 귀가를 재촉하는 발걸음마저도 아침과 다른 정숙함이 깃들어 있었다.
창가를 통해 모로 비치는 햇살을 얼굴에 반쯤 받은 채 루페르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루페르트의 침실이다.
룸왕이자 선제후의 방답게 무모할 정도로 넓은 방이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은 루페르트 하나다.
하지만 혼자 있는 건 아니다.
그의 목엔 소라고둥이 걸려 있고 입구 쪽엔 소녀의 조각상이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그가 거울 앞에 서자 조각상이 고개를 돌려 동공 없는 대리석의 눈으로 그쪽을 바라본다.
루페르트의 왼쪽 눈에 불경한 녹색 빛이 일렁거렸고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루페르트 가우저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남부 제국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20세(누적 35세)
명성: 대단히 높음
2. 일반 평가
무력: B-
마법: E+
군략: E-
경영: D-
지식: C+
기예: C+
3. 능력치
- 의미 없음
4. 축복과 가호
- 수레바퀴에 올라선 자
- 아티팩트 “통찰의 만화경”
- 아티팩트 “카드의 군단”
- 아티팩트 “시간의 책갈피”
5. 영혼 동맹
- 한스 징펠만 A+ / 위기 감지 A
- 피리스 홀리바레스 A / 마법사의 후각 A
- 아서 픽튼 A / 북부의 힘 A
- 하인리히 폰 지겔슈타트 S / 마법 무력화 S
5. 총평
- 초보 군주
“오.”
루페르트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벌레, 농부, 기타 갖가지 혐오스러운 표현으로 가득 찬 총평 항목에 드디어 군주라는 칭호가 등장한 것이다.
“여신님.”
루페르트가 웃으며 소라고둥을 더듬었다.
“지금은 그쪽이 아니잖아요.”
조각상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페르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표정을 고치고 조각상을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적응되지 않아. 저 모습은. 석상이 움직인다니. 아무리 내가 조각상에 미련이 있다고 하지만 이런 건 싫어.’
싫고 좋고를 떠나서 여신님이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정자세로 서서 기꺼이 여신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어떤가요? 당신의 진보가?”
“놀랍습니다. 솔직히 능력치 쪽은 별로 오른 거 같진 않지만.”
“당연하죠. 군주의 무력이란 건 자기 한 몸만을 지키면 충분하고 군주의 지식이란 건 신하의 거짓말을 판별하는 정도면 충분하며 군주의 지혜는 그 자리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알아보는 정도면 충분하답니다.”
군주는 홀로 모든 걸 하는 존재가 아닌 사람을 부리는 자다.
리프니에가 몇 번이고 거듭해서 강조했던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상이다.
루페르트도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물론 반례를 들자면 최초의 황제 노예제 티그리트, 선제 클라우데 2세, 그보다 앞선 천둥제 등 불세출의 명군이라 불리는 군주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예외적인 존재다.
당장 루페르트가 직접 겪은 클라우데 2세만 하더라도 범접하기 어려운 지혜와 안목, 그리고 루페르트가 아마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냉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될 순 없다.
철혈대제의 말대로 루페르트는 평범한 자니까.
“미안해요. 루페르트 가우저.”
갑자기 조각상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과 행동은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
루페르트는 인간과 닮았지만, 인간과 명백히 다른 존재가 인간 흉내를 내는 걸 보고 있자니 강한 거부감이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걸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하시는 겁니까? 여신님. 여신님은 제게 사과할 게…….”
조각상이 고개를 떨군 상태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여정. 제 예상과 달리 대단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리 대단치도 않았던 여정이었습니다.”
“루페르트 가우저.”
조각상이 루페르트의 손을 잡았다.
대리석의 차가움과 단단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거기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세요.”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신님의 권능은 대단하지만 호라처럼 모든 걸 본다는 전지의 능력까진 가지고 있지 않으신 모양이군. 하긴 여신께서 날 지켜봐 주셨다면 그 숱한 위기 속에서 날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겠지.’
루페르트는 차분하게 룸왕의 의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꽃이 뿌려진 길을 따라 붉은 산맥을 넘어 룸에 도달하고 거기서 파비안 아비투스라는 사내와 만난 일, 반란 폭도가 성을 포위한 일, 루돌프와의 재회, 설인의 습격, 베르크 란의 연기와 염소 가면에 관한 이야기를.
“그런 일이 있었군요.”
조각상이 손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큰일이었겠어요.”
“아닙니다. 여신님께서 주신 권능만으로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이건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다.
여신이 없었고 여신에 의한 권능과 단련이 없었다면 루페르트는 그 하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여정은 루페르트에게도 많은 시사점과 자부심을 남겼다.
여신의 권능 없이도 이겨 낸 첫 위기니까.
심지어 가장 강한 동료를 영혼 동맹으로 영입하기까지 했다.
통찰의 만화경에 나타난 진보는 허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회랑의 그분을 다시 만났다고 했죠?”
여신이 뒷짐을 진 채 복도를 돌이 맞부딪치는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었다.
다만 그 움직임 하나하나는 인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루페르트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이질감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대답했다.
“네.”
“그분이 뭐라고 하던가요?”
“별말은 안 했습니다. 단지.”
“단지?”
“저보고 평범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볼 때 당신은 평범한가요?”
“평범한 축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전 아니라고 봐요.”
조각상이 돌아서서 미소 지었다.
“당신은 충분히 특별한 사람이에요. 루페르트 가우저. 그러니 자신을 믿으세요.”
“……여신님.”
조각상이 원래 서 있던 입구 쪽으로 돌아가더니 처음처럼 다소곳하게 손을 모은 채 옆을 돌아보는 자세 그대로 멈춰 버렸다.
여신의 유희가 드디어 끝난 모양이다.
‘목욕이나 하고 잠이나 잘까.’
목욕 전에 가볍게 한잔을 걸칠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목에 건 소라고둥이 가볍게 움직였다.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앗. 여신님.”
“설인을 만났다고 했죠?”
“네.”
“설인이 뭐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설인이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인이 자신을 덮친 건 사실이다.
일곱, 어쩌면 여덟 개의 수정체 같은 눈동자마다 자신의 모습이 가득 찼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설인이 말을 걸어온 적은 없었다.
기억나는 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설봉 사이를 떨쳐 울리는 오싹한 포효뿐이다.
“아니요. 설인은 단지 저를 죽이려 했을 뿐입니다. 마를로네가 절 구했고요.”
“마를로네? 아, 그 금발 계집애 말이죠?”
“그렇습니다.”
“아무튼, 루페르트 가우저. 언제쯤 안젤리나의 시신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소라고둥이 다시금 움직였다.
이번엔 진동이 전보다 강했다.
아무래도 단단히 원하는 모양.
루페르트는 표정 관리를 하며 잘 떼 지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떼며 힘겹게 한마디를 토해 냈다.
“……최대한 빠르게 확보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시신은 이곳, 황궁에 자리 잡은 당신의 침실 안에 놓도록 하세요.”
“선제후 저택이 아닌 이 침실에 말입니까?”
“제국 안에서 곧 황제가 될 룸왕의 침소보다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어요?”
“하오나, 그 시신을 여기에 끌고 오는 것이…….”
루페르트의 말에 리프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할 말을 다 했고 이제 이 세상에서 잠시 시선을 거둔 모양이다.
‘시신을 파헤치는 것만으로 쉽지 않은 일인데, 거기다 이곳 테타우 황궁 안에 시신을 가지고 오라니. 그건 제아무리 하브루타인들이 뛰어나다고 해도…….’
루페르트는 린넨부르그를 찾아갔다.
“준비는 전부 끝났다고 합니다. 남은 건, 박해자의 뼈를 가지신 분의 결단뿐입니다.”
루페르트는 굳은 얼굴로 새로운 요구 조건을 말했다.
“그건 쉽지 않을 겁니다.”
린넨부르그는 단언했다.
“황궁은 전하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경계가 삼엄한 곳입니다. 아무리 우리 길드라고 해도 눈에 띄지 않고 그것을 테타우에 자리 잡은 룸왕의 방에 가져다 놓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
루페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가락을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경비를 치운다면?”
“최소 인원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루페르트는 자신의 계획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린넨부르그에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린넨부르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의외로 쉽게 처리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제후 저택을 나서며 루페르트는 시종에게 명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라. 대관식 전에 제국 의회장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모든 사태를 해명하지 않는다면…….”
아주 잠깐 루페르트는 망설였다.
자신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흔들림은 찰나에서 그쳤다.
“……황제의 분노가 있을 거라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앞에 펼쳐진 것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라고 할지라도.
* * *
최초의 황제 노예제 티그리트는 살아생전 많은 문제를 고대의 방식, 결투로 해결했다고 전해진다.
수많은 전사가 자신의 힘과 기량을 믿고 도전했지만 룸 제국 최강의 검투사였던 티그리트를 꺾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천하의 티그리트도 흘러가는 세월 앞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결코 검을 놓지 않았던 손아귀의 힘줄은 느슨해지고 종일을 달려도 지치지 않던 사자의 심장은 쇠락했으며 당당하던 허리는 말려 들어가는 나무껍질처럼 쪼그라들었다.
황제가 전처럼 결투를 통한 해결을 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해지자 반항적인 선제후-부족장들이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때 티그리트는 자신과 자신의 부족을 위해 대신 싸워 줄 전사를 내세웠다.
이른바 황제의 챔피언이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 단지 백인면상(百人面上)으로 알려진 자가 최초의 챔피언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티그리트의 챔피언은 그의 주군처럼 수많은 결투에서 승리, 갓 탄생한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고 전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리 결투는 야만 시대의 잔재 취급을 받아 점점 그 명맥이 끊어졌다.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난 후 역사 속에 파묻힌 대리 결투를 재현하려는 자가 나타났다.
“선제에게 감사해야겠군.”
렌타이어마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내를 흐뭇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계열의 군복, 군복 위에 휘장처럼 두른 12개의 탄환과 화약을 종이에 싼 탄약대, 손잡이와 칼날받이만으로 사치스러움을 능히 예단할 수 있는 짧은 기병도.
그는 가면을 썼다.
꽤 먼 곳에서 썩어 가는 피의 악취를 맡을 수 있는 말라비틀어진 염소의 두상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말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그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최고의 전사를 내게 내려 줬으니 말이야.”
쩍 벌린 선제후의 입 안에선 썩어 가는 선창에서 날 법한 악취가 새어 나왔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은 그에게 움직일 때마다 번들거리는 은 가면을 대령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그 가면을 손수 염소 가면에게 내밀었다.
염소 가면은 말없이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소문과 달리 상당한 미남자군. 젊지 않은 나이에도.”
“…….”
가면을 벗은 사내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은 가면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천년도 전에 룸 제국이 자랑하는 상승 무패의 군단 기수(旗手)가 쓰던 그 가면은 마치 그를 위해 만든 것처럼 유격도 낌도 없이 부드럽게 사내의 얼굴을 감쌌다.
“그래, 렌타이어마르크의 챔피언이여. 그대가 이길 수 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했었지?”
“붉은 산맥에서 선제의 챔피언과 겨뤘습니다.”
“선제의 챔피언? 아, 안젤리나의 장난감이 됐다는 그 중늙은이 말인가?”
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과가 어떻게 됐지?”
“어리고 미숙할 땐 알지 못했지만 이제 겨뤄 보니 확실히 알 거 같더군요. 그가 전쟁 신의 총애를 받는다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이제는 숭배가 금지된 전쟁의 신, 미르미도스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쟁 신의 가호를 받는 자를 이길 수 있겠는가?”
선제후의 물음에 은 가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주먹을 내밀어 자신의 가슴을 절도 있게 두드렸다.
“그는 저에게 미치진 못합니다.”
은 가면 너머에서 불길한 기류가 꿈틀거렸다.
선제후의 죽어 가는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시다시피 저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으니까요.”
마치 주변이 불타는 듯한 보이지 않는 불꽃이 사내를 감싸고 있었다.
“융커스 베샤문트.”
선제후가 그의 이름을 말했다.
경의와 공포를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