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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77화 (77/225)

77화 21. 죄악 (1)

황제 대관일까지 앞으로 일주일.

테타우 전역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테타우로 통하는 도로는 제국 각지에서 올라온 군주와 귀족의 마차로 정체됐고, 여관은 새로운 황제를 보려고 올라온 수많은 여행자로 가득 찼다.

꽃들이 거리에 뿌려졌고, 제국 전역에서 모여든 떠돌이 악단과 곡마단이 광장을 차지하여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도시 전체가 들썩이는 활기 속에서 두 사내가 긴 여행을 마치고 루페르트의 저택에 도착했다.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한스 징펠만과 지겔슈타트였다.

“추격자는 모두 떠났고 매복의 징조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의 음모를 분쇄했다는 걸 안 이상 그들이 애꿎은 소귀족을 공격할 이유는 없겠지요.”

루페르트는 기꺼이 문 앞까지 나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이번에 정말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루페르트는 살아서 여기에 도착할 수 없었으리라.

루페르트는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을 준비했지만 지겔슈타트도 한스 징펠만도 그다지 재물에 욕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저는 이만 대학으로 돌아가 이번 일에 대해 보고를 드려야겠습니다. 설인부터 시작해서 저의 스승은 물론이고 오각의 마법사마저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이야기가 가득하거든요.”

여전히 신비롭지만 동시에 친근해진 시선으로 루페르트를 바라보며 지겔슈타트는 고개를 숙이고 이별을 고했다.

루페르트는 그에게서 전과는 다른 끈끈한 줄이 둘 사이에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단 그 끈끈함은 영혼 동맹의 효과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겔슈타트가 떠난 후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을 응시했다.

루페르트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한스 징펠만은 손사래를 쳤다.

“저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 약간의 금전적 보상은 필요할 거 같군요. 장비를 적잖이 잃어버렸으니. 아, 그리고 신선한 우유를 한 잔 청하고 싶군요. 가급적 거품이 없는 녀석으로.”

한스 징펠만은 하녀가 내온 우유를 행복한 표정으로 음미한 후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루페르트에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그 도펠죌트너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썩 친하지도 살갑게 지낸 것도 아니지만 한스 징펠만은 두 번이나 함께 싸운 그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루페르트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일단 적절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더 해 주고 싶은 게 있지만, 그건 황제가 된 이후에나 가능할 거 같아서요.”

“더 해 주고 싶다 함은……?”

한스 징펠만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루페르트는 언제나 그를 지켜 주던 두 조손의 모습을 희미하게 떠올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습니다.”

“자유라…….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군요.”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펠죌트너의 복권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도펠죌트너에 대한 차별 정책을 만든 게 저 철혈대제다.

차별에 관한 칙령 전체를 뒤집을 것인지, 개개인에 대한 사면이 가능한 것인지 법적 요소를 파고들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선제후와 궁정 귀족들의 의견들을 살펴야 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베르크 란 일행에겐 언질조차 주지 않았다.

괜히 이야기가 새어 나갔다가는 루페르트의 발목을 잡으려는 자들에게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으니까.

이건 누구의 생각도 아닌, 궁정 암투에 닳도록 닳은 루페르트 개인의 판단이다.

‘그들은 작은 꼬투리 하나를 잡고 그걸 물고 늘어지며 작은 걸 큰 것으로 꾸며 내 말하지. 애당초 건수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에겐 말씀하셨습니까?”

한스 징펠만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아니요. 아직은.”

여유가 없었다.

대관식 준비도 준비이거니와 갑자기 숙적으로 떠오른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동향도 파악해야 했고, 거기다 한술 더 떠 리프니에의 무리한 요구까지 있었다.

“후우.”

루페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관식 준비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도 아무래도 좋지만, 안젤리나의 무덤을 파헤치는 건 정말로 못 할 일이다.

아무리 그것이 좋은 의도라고 해도 안젤리나의 묘를 파헤쳐 그 시신을 본다는 것이.

“마를로네라는 여성분은 나이보다 어른스러워 보이더군요.”

한스 징펠만의 목소리가 상념에 잠긴 루페르트의 의식을 일깨웠다.

“그런가요?”

루페르트는 가문의 숲에서 짜증을 내던 마를로네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직 짜증 내는 모습을 못 보셨군.’

“무엇보다 행동이 빠른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것도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유형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몸도 동시에 움직이는 유형이라고 할까요. 보기 드문 재능입니다.”

“움직임이 빠르다는 말엔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조부인 베르크 란이라는 분은 시야가 좁아 보이더군요. 인내심도 썩 훌륭하다고 볼 수도 없고.”

한스 징펠만의 얼굴에 선명한 걱정이 떠올랐다.

‘베르크 란 때문에 말을 꺼낸 건가. 내가 사람 좋다는 말을 많이 듣긴 하지만 정작 사람이 좋은 건 이 사람이겠지.’

“그가 원하는 건 금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보였습니다.”

“그렇게 보이던가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 쪽에서 그들과 접촉해 전하의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때 시종이 들어와 양해를 구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붉은 명찰을 단 두 사람이 전하의 알현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붉은 명찰을 단 두 사람?”

“네. 전하를 따라 룸까지 수행했던 그 도펠죌트너입니다.”

루페르트와 한스 징펠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루페르트가 시종에게 그들을 들라 명했다.

곧 응접실에 붉은 명찰을 단 두 남녀가 나타났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가 차례대로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있는 쪽은 역시 베르크 란이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오는 대관식에서 대리 결투를 준비 중이라는.”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첩보를 들은 적이 있긴 합니다만.”

뜬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결투를 신청한다고 하더라도 받아 줄 생각 따윈 없었다.

황제가 되면 즉시 죄를 물어 룸과 자부아, 제국 영내에 있었던 모든 진상을 파헤칠 것이니.

렌타이어마르크는 가난한 땅이다.

한때 금광으로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다 옛말.

주기적인 역병과 갱생이 불가능한 늪지, 우울한 기후로 일곱 선제후령 중 가장 가난한 땅이라 불리는 곳이다.

회귀 전 루페르트의 치세에 렌타이어마르크가 이름에 오르내리지 못했던 건 중립 때문만은 아니었다.

땅 자체가 워낙 가난하고 볼품이 없기에 아예 무대로 뛰어들 생각을 못 한 것이다.

그 렌타이어마르크가 감히 루페르트에게 도전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당장 현재 보유한 슈발츠마인의 세입만으로 렌타이어마르크의 하찮은 수입의 8배를 상회할 것이다.

거기다 황제가 되면 황제의 직할 영지인 카렐리아 왕국이 루페르트의 손안에 들어온다.

지금은 고어문트와 슈발츠마인에 밀려 3위로 밀려났지만 카렐리아 왕국은 제국과 연방되기 전부터 대륙 중앙에서 가장 부유한 곳으로 이름을 떨쳤다.

슈발츠마인 주와 카렐리아 왕국 두 곳을 동시에 거느린다면 렌타이어마르크 주와의 격차는 최소 15배를 상회할 것이다.

애당초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라는 소리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대리 결투를 받아 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루페르트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대리 결투를 추진한다는 첩보를 들었을 때도 일소에 부쳤다.

그런데 그 소문을 뒤늦게 베르크 란이 듣고 찾아온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언제나 분노로 타오르는 눈동자를 착잡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치 없는 정보를 물고 기회를 얻기 위해 찾아온 건가.’

아마 그가 원하는 건 하나일 것이다.

대리 결투에서 또 다른 공훈을 세워 인정받는 것.

그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

그의 의도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루페르트에겐 걸 것이 없다.

“대단히…….”

거절의 말을 막 시작하려 할 때였다.

그의 머릿속에 실로 오랜만에 청명한 목소리가 또렷이 울려 퍼졌다.

[ 루페르트 가우저. ]

목에 걸고 있던 소라고둥이 실로 오랜만에 움직였다.

‘여신님이? 지금은 조각상에 깃든 게 아닌가?’

루페르트는 말을 멈추었다.

[ 수락하는 게 어떤가요? ]

“네?”

루페르트는 양해를 구하고 별실로 들어갔다.

“제 상황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므로 잃을 게 없는 그 사람의 제의를 굳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왜요?”

소라고둥이 루페르트의 가슴을 가볍게 때렸다.

“왜라니요……?”

“재밌잖아요? 혹시 절 두고 다녀서 저의 권능이 뭔지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그건 아닙니다. 여신님.”

“일단 수락해 보세요. 당신에겐 시간의 책갈피도 있잖아요?”

“으음.”

딱히 내키는 건 아니지만 리프니에의 말도 일리가 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잃을 게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잃을 게 없는 건 루페르트다.

모든 걸 건다고 해 봤자 결과가 나쁘면 회귀하면 그만이니.

애당초 그의 챔피언은 약해빠진 마를로네도 아닌 선제의 챔피언이었던 베르크 란이다.

그가 지는 그림은 상상하기 어렵다.

‘어쩌면 대리 결투에서 이긴다면, 단순히 전쟁을 하는 것보다 더 쉽고 간편하게 좋은 조건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루페르트는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신님.”

“드디어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네요!”

“그런가요?”

“네. 시간 나면 통찰의 만화경으로 당신의 능력을 살펴보세요. 요즘 등한시한 거 같은데.”

“사람을 부리는 입장이 돼서 그런지 저 자신을 살펴볼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신의 본분을 이해하고 있다니, 정말로 지켜보는 저로서는 흐뭇할 따름이네요. 처음엔 뭐든 혼자서 하려고 하시더니. 그래도 타인을 부리려면 최소한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죠?”

소라고둥이 가볍게 움직이며 루페르트의 가슴팍을 툭툭 건드렸다.

갑작스런 여신의 애교에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그동안 리프니에에게 가졌던 나쁜 생각들이 너무나도 쉽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여신님은 나쁘지 않아. 역시 나를 이해해 주고 나를 구원해 주시는 건 늘 여신님뿐이야. 선제가 왜 그토록 여신님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지만, 필경 오해가 있었겠지.’

그래도 안젤리나의 시신을 파헤치는 건 역시 꺼림칙했다.

심리적 장벽의 한계라고 할까.

‘그, 그건 좀 아닌 거 같지만 의도는 좋잖아. 안젤리나 님이 걸린 병도 어쩌면 사악한 저주 때문일지도 모르지.’

가까스로 합리화하며 루페르트는 방을 나섰다.

이글거리는 시선이 화살처럼 꽂혔다.

아무리 봐도 적응되지 않는 그 강렬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루페르트가 말했다.

“베르크 란.”

베르크 란이 절도 있게 두 발을 모아 군화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턱을 들었다.

전형적인 제국 보병대의 무언 복창.

그 칼날처럼 엄정한 모습에 루페르트는 왠지 모를 가슴 벅참을 느끼며 엄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대리 결투를 자청한다면…….”

루페르트가 검을 뽑았다.

스르릉.

번쩍이는 검이 향하는 곳은 베르크 란의 어깨.

“그대를 나의 챔피언으로 임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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