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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79화 (79/225)

79화 21. 죄악 (3)

이른 아침부터 한 사내가 루페르트를 찾아왔다.

카를로비의 남작 베르너다.

그가 루페르트를 찾은 이유는 현재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에 대해 조언은 물론 이에 대처할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해서다.

‘룸왕 전하가 제아무리 용맹한 탐험가이자 수완이 뛰어난 책략가라고 해도 궁정 생활엔 아직 익숙지 않으실 것이다. 궁정의 공기는 바깥의 공기와 같지 않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

베르너는 부친의 남작 작위를 물려받기 전 궁정에서 여러 사무직을 전전하며 제국 권력의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일과 절차, 법도를 익혔다.

슈발츠마인 가문에서 어련히 보좌진을 보내겠지만, 베르너가 보기엔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그들보다는 자신이 좀 더 진정성 있는 역할을 수행하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에게도 욕망은 있다.

황제의 총신으로 제국이라는 대륙 최강국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역사에 이름을 새기고 그에 걸맞은 명성과 부를 누리는 것, 아울러 자신의 가문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

그 모든 걸 위한 포석이다.

그의 주군 루페르트는 황궁 안에 마련된 집무실 안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있었다.

시종이 그의 예방을 알리자 루페르트가 고개를 들어 베르너 쪽을 조금은 졸린 눈으로 응시했다.

베르너를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마침 잘 왔군.”

루페르트가 말했다.

그는 다짜고짜 베르너에게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이건……?”

“렌타이어마르크 건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작성해 봤어. 이런 서류 꾸미는 건 익숙지 않아서 대충 가안만 적었는데, 한번 검토하고 보충할 게 있으면 알려 줘. 이쪽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여기서 검토해도 관계없어. 기다리지.”

서류를 받아든 베르너는 속으로 생각했다.

‘벌써 가안을 짰다고?’

제법 흥미로운 일이다.

오히려 가공되지 않은 가안을 본다는 것이 더 구미가 당긴다.

새로운 황제의 가공 없는 생각과 식견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니 말이다.

‘그럼 어디 한번 감상해 볼까. 새로운 황제 폐하의 솜씨를.’

베르너는 회의용 탁자에 앉아 서류를 검토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

처음에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은 검토되는 서류가 늘어갈수록 옅어졌고,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기한이 붙은 해명 요구를 했군. 일견 유약해 보이는 태도지만 대관식 전날 제국 의회 및 선제후 회의를 동시에 소집했어. 의제는 추후 지정이지만 어차피 대관식에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되겠지. 새로운 황제 눈 밖에 나서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

베르너는 시종이 갓 내온 차를 마시는 루페르트를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았다.

‘대관식을 전후해 한 번에 몰아치겠다는 건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큰 흐름을 따라 자연스레 자신의 적을 공격하는 방식.

그것은 베르너가 루페르트에게 권하려던 방식과 놀랄 정도로 흡사했다.

비록 표현 방식과 절차적 미비는 보완해야 할 문제겠지만, 사실 그런 지엽적인 문제는 황제의 일이 아니다.

“어떤가? 베르너?”

루페르트가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눈 주변을 닦으며 물었다.

“전하의 생각은 저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다행이군.”

루페르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한 피로가 루페르트의 얼굴에 떠올랐다.

“대단히 피로해 보이십니다만.”

“밤을 새웠거든.”

“의견 하나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아.”

“전하의 안은 큰 틀에서 선제후를 몰아넣기에 최적의 안입니다. 황제의 권력을 무소불위로 해결하는 대신 제국의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책임을 묻는 방안이니까요. 하지만 이 방식의 위험성은 선제후의 눈에도 확실히 보이겠죠.”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도 바보는 아니다.

젊은 시절, 그는 지금과 달리 준수하고 쾌활한 성격에 명민한 구석이 있는 훌륭한 군주였다.

“선제후는 어떤 식으로든지 이쪽의 계획을 무산할 방안을 찾으려 할 겁니다.”

“발악을 한다는 건가?”

“네, 그런 느낌입니다.”

베르너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지. 예상되는 위험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베르너도 자신이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루페르트처럼 밤을 새우진 않았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서 선제후의 반격에 대응할 방법을 고민했다.

다른 선제후와 밀약을 통한 외교적 방법, 여론을 통한 압박, 화해와 용서를 통한 원만한 해결, 최악의 경우엔 군사적 방법까지.

과연 루페르트 가우저는 어떤 방안을 생각했을까.

같은 해답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도 생각지 못한 신묘한 방안을 생각해 냈을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베르너는 루페르트의 말을 기다렸다.

루페르트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가볍게 말했다.

“발악하라지.”

순간 베르너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발악하라니. 그런 무책임한…….’

“그가 발악하는 게 내가 원하는 바야.”

루페르트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베르너는 그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볼 뿐 주군의 생각까진 헤아리지 못했다.

“내 가안을 보완해 주고 즉시 실행할 수 있게 해 주게.”

루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눈 좀 붙이고 오지.”

루페르트가 자리에 떠난 이후에도 베르너는 루페르트의 생각이 뭔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을 해도 알 수가 없다.

그는 루페르트의 집무실을 나서 황궁 안에 자리 잡은 슈발츠마인 가문을 위한 별실에 노닥거리고 있는 자신의 동료를 찾아갔다.

오토 브라에 그리고 요하네스.

그들은 브라에와 달랐다.

베르너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서로를 마주 보며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의 새로운 황제는 생각보다 정치에 능하신 분이군.”

“시골 출신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브라에가 둘을 보며 물었다.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나?”

요하네스가 오토 브라에에게 눈짓하자 오토 브라에가 헛기침을 한 차례 하고는 입을 열었다.

“새로운 황제 폐하는 선제후의 술수를 이미 알고 계신 모양이야.”

“알고 있다고? 그게 뭔지 아나?”

“그건 몰라. 우리가 무슨 정보가 있겠어. 하지만 전하의 의도는 명확하잖아? 발악을 하든가, 아니면 가만히 매를 맞든가.”

요하네스가 손톱을 다듬으며 덧붙였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는 대리 결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대리 결투?!”

“882년만인가. 제국 역사에 대리 결투라는 고대의 해결 방식이 등장하는 건.”

요하네스가 빙그레 웃었다.

“기대되지 않습니까?”

해맑게 웃는 그의 얼굴엔 약간의 걱정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루페르트의 운명이 자신과는 하등 관계도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 * *

룸왕이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에게 그가 룸왕의 의례 중 있었던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한 소명을 요구했다.

기한은 정하지 않았지만, 선제후는 현재 룸왕과 함께 테타우에 머물러 있다.

거리를 핑계로 답변을 미룰 수 없다.

거기다 룸왕은 오는 대관식을 전후하여 새로운 제국 의회와 선제후 회의를 소집했다.

의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룸왕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했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를 공개적인 자리에 끌어내 책임을 묻는다.

그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의 군대가 직접 룸왕을 공격한 적은 없지만, 그의 사주로 보이는 일련의 공격 행위가 있었으니.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룸왕은 전설에 나오는 설인과 마주치기도 했다는 소문이 테타우는 물론 제국 전역을 뜨겁게 달궜다.

점점 뜨거워지는 관심 속에서 모두의 시선은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게 향했다.

궁지에 몰린 선제후가 과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모두의 시선이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머문 황궁 안의 독수리궁으로 향하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려 하고 있었다.

“이들은 글도 모르고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록산느가 인부들에게 입을 열라 지시했다.

루페르트는 보지 않았다.

누군가의 결핍을 보는 건 두렵지 않지만, 록산느를 비롯한 하브루타인의 기이한 행동 양식을 보는 건 마음에 상처를 줄 것 같았다.

같은 인간이지만 전혀 다른 동기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들과 일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이쪽으로.”

빠르게 끝내리라.

안젤리나의 묘는 황궁 옆에 자리 잡은 슈발츠마인 가문 소유의 장미 생울타리로 둘러싸인 저택 뒤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문 소유라고 하나 안젤리나 개인 전용으로 쓰인 탓에 주인이 죽은 지금은 텅 비어 있는 상태다.

쓸쓸한 정적이 흐르는 집안을 지키는 건 안젤리나의 시종을 들던 시녀를 비롯한 소수의 관리인뿐이다.

지켜야 할 대상이 없기에 경비 자체는 허술하다.

바로 옆에 황궁 근위대의 초소가 있기도 하거니와 저택 자체의 검소함과 안젤리나라는 주인의 상실이 이 저택을 황궁 주변에서 덜 중요한 곳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이 저택 안에서 가지고 갈 건 아무도 없다.

안젤리나의 시녀, 55세의 아마리에 폰 카셀부르그가 이 저택에 계속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반평생 자신을 위해 봉사한 그녀를 위해 안젤리나가 베푼 은혜니까.

그녀는 그녀의 주인처럼 이 장미 생울타리가 있는 저택에서 죽을 때까지 안젤리나가 좋아하던 장미들을 가꾸며 살아갈 것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룸인들의 왕이시여.”

시녀라고 하나 안젤리나를 옆에서 오래 모신 경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루페르트의 방문에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은은하지만 확연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 누추한 곳엔 어찌하여 오셨습니까? 전하 같은 고귀한 분께서 찾아 주실 정도로 대단한 곳이 아닙니다.”

“대황후의 묘가 여기 있다고 들었다. 그분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세를 졌지. 그대가 본 것처럼.”

과거를 바라보는 우울한 눈동자에 담긴 감정의 대부분은 진실이다.

여전히 안젤리나는 루페르트의 마음 한구석에 위풍당당하게 눈을 가리는 검은 가면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거인처럼 헤아릴 수 없는 장미 덤불을 뒤로한 채 우뚝 서 있다.

“황제가 되기 전에 꼭 찾아서 그녀의 명복을 직접 빌어 주고 싶다. 그대도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황제가 된 이후엔 시간이 그다지 나지 않을 게 분명하니.”

방 안은 고요하다 못해 정적 비슷한 답답함이 흐르고 있었지만 루페르트는 돌과 돌이 갈리고 쇠가 부식되어 부러지는 듯한 기묘한 파공음을 들었다.

실제로 소리가 난 건 아니다.

이것은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려는 자가 그 일을 저지를 때 나는.

“…….”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며 호흡과 안색에 영향을 주려 한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루페르트의 마음을 물리적으로 마모시켰다.

‘참아라. 루페르트 가우저. 여기선 참아야 한다.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 잊지 마라. 나는 악의로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제국을 구하기 위해, 오직 제국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꼭두각시 황제 시절 어쩔 수 없이 익혀야 했던 표정 관리의 마술이 시공을 넘어 이 자리에서 빛을 발했다.

상대방은 자신을 쥐락펴락하던 선제후 대신 일개 시녀로 변했지만, 그 중요성의 농도는 그때와 비할 바가 아니다.

안젤리나의 시녀가 루페르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피다 곧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리로 안내하겠습니다.”

시녀의 시선이 루페르트가 데리고 온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사내들을 향했다.

“그런데 이분들은?”

피부색이 다르고 이국적인 용모를 하고 있다.

하브루타인이다.

제국의 밑바닥에서 매춘, 사기, 사기 점술, 소매치기 등 갖가지 더럽고 비열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안젤리나의 신성한 묘역에 발을 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비천한 존재다.

“이들은 나의 개인 호위다. 잃을 게 없기에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성적으로 싸우는 자들이지. 이들 덕분에 몇 번이고 목숨을 건졌지.”

시녀가 장미 생울타리를 지나 저택의 뒤편으로 안내했다.

장미 덤불 이외엔 거의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작은 정원 중앙에 작은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루페르트는 비석을 향해 고개 숙였다.

‘안젤리나 님…….’

해서는 안 될 짓을 해야 한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만 루페르트는 알고 있다.

이 짓을 하면 그의 마음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일그러짐이 있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루페르트는 뒤에 서 있는 하브루타인에게 손짓했다.

안젤리나의 묘를 파헤치고 그 시신을 꺼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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